고대진: 두 판 사이의 차이

WONGOwiki
(새 문서: == 프로필 == * 법호 : 이산(理山) * 법명 : 고대진(高大振) * 출생 : 1962년 * 출생지 : 남원 아영 * 부친 : 고성원 * 모친 : 장용지옥 == 이력 ==)
 
편집 요약 없음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15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이산생각]]
== 프로필 ==
== 프로필 ==
* 법호 : 이산(理山)
* 법호 : 이산(理山)
* 법명 : 고대진(高大振)
* 법명 : 고대진(高大振)
* 출생 : 1962년
* 출생 : 1962년 남원 아영
* 출생지 : 남원 아영
* 부친 : 고성원
* 부친 : 고성원
* 모친 : 장용지옥
* 모친 : 장용지옥
== 이력 ==
* 입교 : 원기 55년
 
== 출생과 유아 시절 ==
*1962년 1세 - 음10 06 남원 아영에서 부친 [[고성원]](40) 모친 [[장용지옥]](28)의 3남3녀중 차남으로 태어남.
**내가 태어 호흡도 불안하고 심장도 안좋아 동내 의원으로부터 회생 불가능하다하여 집안 거름자리 옆에 가마니로 쌓아서 놔두었었는데 다음 날 아침 가보니 꾸물꾸물 살아 있더랍니다. 그래서 집 안으로 가져와 키웠답니다. 다행히 죽을 팔자는 아니다 싶어 각고의 노력으로 고비를 넘겼답니다.
 
*1963년 2세 - 아명 "희곤"이라 불리웠다. 그 당시에는 태어나면 호적에 올리는 것을 잘 몰라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 출생 신고 하는 일을 논의하였지만 어떻게 등록되어 있는지는 몰랐다.
 
*1964년 3세
**집안이 기억난다. 형과 누나들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옆에서 놀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어설프게 겉다가 여지없이 뒤로 넘어져 방바닥에 뒤통수를 부딛혔다. 머리에서 팅하는 소리가 들리고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있는데 천정만 보인다. 한참 지나서야 어떤 누나인지 모르지만 일으켜 앉혀놓고 바로 가버렸다.
*1965년 4세
*1966년 5세
*1967년 6세
**아버지는 대장간을 하셨고 엄마는 두부를 만들어 파셨다. 두부 만드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줄을 서며 기다리는 모습이 생각이난다. 나는 배가고파 두부판을 바라보고 엄마는 대나무자를 대고 칼로 두부를 썰며 남은 껍질같은 가장자리 남은 것을 주어 먹으려고 기다린다. 그 마져도 쉽게 먹을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학교 갔다 오면 마루와 마당에서 놀았는데 옆집으로 부터 온 삐삐선 두 가닥이 스피커로 이어졌고 또 다른집으로 선이 갔다. 그 곳에서 가끔 소리가 났는데 지금 생각하면 라디오 갔았다. 소리가 잘 나지 않을 때에는 아버지가 스피커 뒷 뚜컹을 열어 보기도 하고 손으로 두드려 보기도 하였다. 나도 가끔 뜯어 보기도 하다가 아버지한테 야단 맞기도 하였다.
**집에서 잠시 걸어 나가면 큰 냇가에 가면 아버지가 냇가 뚝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나도 낚시 하고 싶어서 졸랐는데 나를 볼 겨를이 없으신가보다 하여 내가 나무가지 끝에 실을 묶고 철사를 구부려 실 끝에 묶어 파리를 잡아 끼고 개울가 에 낚시대를 드리우곤 하였다.
**어머지는 남의 집일을 나가는 일이 자주있는데 저녁에 돌아 올 때면 간장 조금 담아오시거나 보리쌀을 박 바가지에 담아오셨다. 아마도 품싹으로 받아오신것 같다. 아버지는 자주 볼 수 없었는지 기억이 별로 나질 않는다.
*1968년 7세
**식구들 아무도 나와 놀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난 홀로 있을 때가 많았나 보다. 나는 가끔 벽을 보고 주워있는 때가 많았다. 하루는 벽을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펑펑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울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죽으면 어떻하지? 하며 울었다. 그 다음 날도 그랬다. 3일이지나서야 그 슬픔은 가라앉았다. 그 뒤로는 슬프지 않았다. 오직 먹고 사는 문제만 남았던거 같다.
**
 
== 국민학교 시절 ==
*1969년 8세 - 신도국민학교 입학 날,
** 엄마가 나의 손을 잡고 끌다시피 학교에 갔다. 국민학교에 입학할 당시에는 너무 낮설고 싫어서 가지 않으려고 때를 썼고 학교에 두고 가는 엄마를 쫒아가 붙잡으며 울었다. 그래도 엄마는 매몰차게 가버리는 뒷모습에 서운해 하면서도 누나가 나를 교실까지 데려다 주었다.
 
*1970년 9세 - 계룡산 신도안으로 이사를 하다.
** 신도국민학교 2학기 될 쯤 어느 날 갑자기 이사를 간다고 한다. 어두운 새벽 잠도 덜 깨어있는 나를 깨워 일어나보니 벌써 엄마가 남동생을 업고 보따리 짐을 들고 여동생 손을 잡고 나보고 가자 한다. 아영 청계리에서 어두운 새벽 밤에 집을 나서면서 돌아보니 언제 그랬는지 빈집처럼 아무도 없었다. 버스를 타고 한참 후에야 남원에 도착하여 기차 타기는 때가 아닌지 식구들이 어떤 집에 들어 갔는데 우리들을 반가히 맞이해주었다. 알고 보니 아영집에 자주 왔던 남원 비단장수 아줌마가 사는 집이었던 같다. 날이 밝아 남원 기차역에서 생전 처음 타는 기차를 탔다. 신기하여 기차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자마자 엄마가 뭐라한다. 기차 내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한번씩 지나가면 먹고싶은 과자 등에 시선을 가 있지만 도무지 엄마는 사줄 생각을 안 한다.
** 기차를 타고 하루 종일 걸려 저녁이 되서야 논산 양정역에서 내려 버스로 신도안에 도착하였다. 삼동원에서인지 아니면 신도교당에서 마련해준 초가집 한채에 누나와 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삼동원에서 일을 하였고 어머니는 교당 일을 하였다.
** 신도국민학교 가던 날, 엄마는 나를 데리고 신도국민학교에 갔다. 학교 담임선생과 면담 후 나만 남겨두고 집으로 가고 선생님 안내로 교실에 들어섰다. 낮설음이 밀려오고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숙스러움이 온몸을 감싼다. 어떻게 인사는 되었지 아닌지 모르게 지정해준 뒷좌석에 앉았다. 휴식시간에는 반 아이들이 신기한듯 나를 둘러싸고 충청도 사투리로 질문이 쏱아진다. 전라도 사투리 석인 말을 할 때 마다 박장대소를 하였고 난 왜 그렇게 웃는지 알 수 없었다.
 
== 전무출신 근무이력 ==
원기70년 1월 1일~71년 12월 30일 - 교정원 재무부 간사 2년
원기72년 1월 1일~75년 12월 30일 - 영산선원 및 원불교선학대학 4년
원기76년 1월 1일~76년 12월 30일 - 동산선원 훈련교무 1년
원기77년 1월 3일~81년 1월 2일 - 운봉교당 부교무겸지리산운봉훈련원 주사4
원기81년 1월 3일~84년 1월 1일 - 원로원 주임 3년 ( 중앙남자원로수도원)
원기84년 1월 2일~85년 1월 2일 - 원로원 교무 1년
원기85년 1월 3일~86년 1월 1일 - 구의교당 보좌교무 1년
원기86년 1월 2일~87년 1월 1일 - 영산원불교대학교 1년
원기87년 1월 2일~90년 1월 1일 - 원불교역사박물관 3년
원기90년 1월 2일~90년 12월 31일 - 수위단회사무처 과장 1년
원기91년 1월 1일~91년 12월 31일 - 요양휴무 1년
원기92년 1월 1일~94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과장 3년
원기95년 1월 1일~95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교무 (기록물관리) 1년
원기96년 1월 1일~96년 12월 31일 - 휴양( 기록물관리 폐지) 1년
원기97년 1월 1일~97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교무(기록물관리) 1년
원기98년 1월 1일~98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교무(기록물관리)1년
원기99년 1월 1일~99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과장( 기록물관리) 1년
원기100년 1월 1일~100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과장(기록관리실) 1년
원기101년 1월 1일~ 103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과장 ( 기록관리실) 3년
원기104년 1월 1일~106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과장 ( 기록관리실) 3년  유임
원기107년 1월 1일~
원기108년 기록관리소 소장

2023년 6월 2일 (금) 10:56 기준 최신판

*이산생각

프로필[편집 | 원본 편집]

  • 법호 : 이산(理山)
  • 법명 : 고대진(高大振)
  • 출생 : 1962년 남원 아영
  • 부친 : 고성원
  • 모친 : 장용지옥
  • 입교 : 원기 55년

출생과 유아 시절[편집 | 원본 편집]

  • 1962년 1세 - 음10 06 남원 아영에서 부친 고성원(40) 모친 장용지옥(28)의 3남3녀중 차남으로 태어남.
    • 내가 태어 호흡도 불안하고 심장도 안좋아 동내 의원으로부터 회생 불가능하다하여 집안 거름자리 옆에 가마니로 쌓아서 놔두었었는데 다음 날 아침 가보니 꾸물꾸물 살아 있더랍니다. 그래서 집 안으로 가져와 키웠답니다. 다행히 죽을 팔자는 아니다 싶어 각고의 노력으로 고비를 넘겼답니다.
  • 1963년 2세 - 아명 "희곤"이라 불리웠다. 그 당시에는 태어나면 호적에 올리는 것을 잘 몰라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 출생 신고 하는 일을 논의하였지만 어떻게 등록되어 있는지는 몰랐다.
  • 1964년 3세
    • 집안이 기억난다. 형과 누나들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옆에서 놀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어설프게 겉다가 여지없이 뒤로 넘어져 방바닥에 뒤통수를 부딛혔다. 머리에서 팅하는 소리가 들리고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있는데 천정만 보인다. 한참 지나서야 어떤 누나인지 모르지만 일으켜 앉혀놓고 바로 가버렸다.
  • 1965년 4세
  • 1966년 5세
  • 1967년 6세
    • 아버지는 대장간을 하셨고 엄마는 두부를 만들어 파셨다. 두부 만드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줄을 서며 기다리는 모습이 생각이난다. 나는 배가고파 두부판을 바라보고 엄마는 대나무자를 대고 칼로 두부를 썰며 남은 껍질같은 가장자리 남은 것을 주어 먹으려고 기다린다. 그 마져도 쉽게 먹을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 학교 갔다 오면 마루와 마당에서 놀았는데 옆집으로 부터 온 삐삐선 두 가닥이 스피커로 이어졌고 또 다른집으로 선이 갔다. 그 곳에서 가끔 소리가 났는데 지금 생각하면 라디오 갔았다. 소리가 잘 나지 않을 때에는 아버지가 스피커 뒷 뚜컹을 열어 보기도 하고 손으로 두드려 보기도 하였다. 나도 가끔 뜯어 보기도 하다가 아버지한테 야단 맞기도 하였다.
    • 집에서 잠시 걸어 나가면 큰 냇가에 가면 아버지가 냇가 뚝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나도 낚시 하고 싶어서 졸랐는데 나를 볼 겨를이 없으신가보다 하여 내가 나무가지 끝에 실을 묶고 철사를 구부려 실 끝에 묶어 파리를 잡아 끼고 개울가 에 낚시대를 드리우곤 하였다.
    • 어머지는 남의 집일을 나가는 일이 자주있는데 저녁에 돌아 올 때면 간장 조금 담아오시거나 보리쌀을 박 바가지에 담아오셨다. 아마도 품싹으로 받아오신것 같다. 아버지는 자주 볼 수 없었는지 기억이 별로 나질 않는다.
  • 1968년 7세
    • 식구들 아무도 나와 놀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난 홀로 있을 때가 많았나 보다. 나는 가끔 벽을 보고 주워있는 때가 많았다. 하루는 벽을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펑펑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울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죽으면 어떻하지? 하며 울었다. 그 다음 날도 그랬다. 3일이지나서야 그 슬픔은 가라앉았다. 그 뒤로는 슬프지 않았다. 오직 먹고 사는 문제만 남았던거 같다.

국민학교 시절[편집 | 원본 편집]

  • 1969년 8세 - 신도국민학교 입학 날,
    • 엄마가 나의 손을 잡고 끌다시피 학교에 갔다. 국민학교에 입학할 당시에는 너무 낮설고 싫어서 가지 않으려고 때를 썼고 학교에 두고 가는 엄마를 쫒아가 붙잡으며 울었다. 그래도 엄마는 매몰차게 가버리는 뒷모습에 서운해 하면서도 누나가 나를 교실까지 데려다 주었다.
  • 1970년 9세 - 계룡산 신도안으로 이사를 하다.
    • 신도국민학교 2학기 될 쯤 어느 날 갑자기 이사를 간다고 한다. 어두운 새벽 잠도 덜 깨어있는 나를 깨워 일어나보니 벌써 엄마가 남동생을 업고 보따리 짐을 들고 여동생 손을 잡고 나보고 가자 한다. 아영 청계리에서 어두운 새벽 밤에 집을 나서면서 돌아보니 언제 그랬는지 빈집처럼 아무도 없었다. 버스를 타고 한참 후에야 남원에 도착하여 기차 타기는 때가 아닌지 식구들이 어떤 집에 들어 갔는데 우리들을 반가히 맞이해주었다. 알고 보니 아영집에 자주 왔던 남원 비단장수 아줌마가 사는 집이었던 같다. 날이 밝아 남원 기차역에서 생전 처음 타는 기차를 탔다. 신기하여 기차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자마자 엄마가 뭐라한다. 기차 내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한번씩 지나가면 먹고싶은 과자 등에 시선을 가 있지만 도무지 엄마는 사줄 생각을 안 한다.
    • 기차를 타고 하루 종일 걸려 저녁이 되서야 논산 양정역에서 내려 버스로 신도안에 도착하였다. 삼동원에서인지 아니면 신도교당에서 마련해준 초가집 한채에 누나와 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삼동원에서 일을 하였고 어머니는 교당 일을 하였다.
    • 신도국민학교 가던 날, 엄마는 나를 데리고 신도국민학교에 갔다. 학교 담임선생과 면담 후 나만 남겨두고 집으로 가고 선생님 안내로 교실에 들어섰다. 낮설음이 밀려오고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숙스러움이 온몸을 감싼다. 어떻게 인사는 되었지 아닌지 모르게 지정해준 뒷좌석에 앉았다. 휴식시간에는 반 아이들이 신기한듯 나를 둘러싸고 충청도 사투리로 질문이 쏱아진다. 전라도 사투리 석인 말을 할 때 마다 박장대소를 하였고 난 왜 그렇게 웃는지 알 수 없었다.

전무출신 근무이력[편집 | 원본 편집]

원기70년 1월 1일~71년 12월 30일 - 교정원 재무부 간사 2년
원기72년 1월 1일~75년 12월 30일 - 영산선원 및 원불교선학대학 4년
원기76년 1월 1일~76년 12월 30일 - 동산선원 훈련교무 1년
원기77년 1월 3일~81년 1월 2일 - 운봉교당 부교무겸지리산운봉훈련원 주사4

원기81년 1월 3일~84년 1월 1일 - 원로원 주임 3년 ( 중앙남자원로수도원)
원기84년 1월 2일~85년 1월 2일 - 원로원 교무 1년 
원기85년 1월 3일~86년 1월 1일 - 구의교당 보좌교무 1년
원기86년 1월 2일~87년 1월 1일 - 영산원불교대학교 1년
원기87년 1월 2일~90년 1월 1일 - 원불교역사박물관 3년

원기90년 1월 2일~90년 12월 31일 - 수위단회사무처 과장 1년
원기91년 1월 1일~91년 12월 31일 - 요양휴무 1년
원기92년 1월 1일~94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과장 3년

원기95년 1월 1일~95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교무 (기록물관리) 1년
원기96년 1월 1일~96년 12월 31일 - 휴양( 기록물관리 폐지) 1년
원기97년 1월 1일~97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교무(기록물관리) 1년

원기98년 1월 1일~98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교무(기록물관리)1년
원기99년 1월 1일~99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과장( 기록물관리) 1년
원기100년 1월 1일~100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과장(기록관리실) 1년
원기101년 1월 1일~ 103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과장 ( 기록관리실) 3년
원기104년 1월 1일~106년 12월 31일 - 문화사회부 과장 ( 기록관리실) 3년  유임
원기107년 1월 1일~ 
원기108년 기록관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