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교사: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4. 대종사의 입정) |
잔글편집 요약 없음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분류:원불교교서]] | [[분류:원불교교서]] | ||
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 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全文 | ||
== 제1편 개벽(開闢)의 여명(黎明) == | == 제1편 개벽(開闢)의 여명(黎明) == | ||
=== 제1장 동방(東方)의 새 불토(佛土) === | === 제1장 동방(東方)의 새 불토(佛土) === |
2025년 1월 22일 (수) 18:05 판
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全文
제1편 개벽(開闢)의 여명(黎明)
제1장 동방(東方)의 새 불토(佛土)
1. 서설
일찌기 정산 종사(鼎山宗師)는 새 회상의 창건사 서문에 쓰시기를 「역사는 세상의 거울이라 하였나니,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일의 흥망 성쇠가 다 이 역사에 나타나는 까닭이니라. 그러나, 역사를 보는 이가 다만 문자에 의지하여 지명(地名)이나 인명(人名)이나 연대(年代)만 보고 잘 기억하는 것으로 능히 역사의 진면(眞面)을 다 알았다고 할 수 없나니,반드시 그 때의 대세와, 그 주인공의 심경과, 그 법도(法度) 조직과, 그 실행 경로를 잘 해득하여야만 능히 역사의 진면을 볼 수 있고, 내외를 다 비치는 거울이 될 것이니라. 그런즉 우리 회상은 과연 어떠한 사명을 가졌으며, 시대는 과연 어떠한 시대이며, 대종사(大宗師)는 과연 어떠한 성인이시며, 법은 과연 어떠한 법이며, 실행 경로는 과연 어떻게 되었으며, 미래에는 과연 어떻게 결실될 것인가를 잘 연구하여야 할 것이니라」하시었다. 이에 따라, 이 교사는 먼저 동방의 새 불토인 한반도의 내력과, 선지자들의 자취와, 말세 말법의 현상을 대략 더듬고, 창건사에 의하여, 새 부처님 대종사의 출세기연(出世機緣)과, 성도 경로(成道經路)를 기술한 다음, 제생 의세의 크신 경륜 아래 첫 교화를 베푸시고 회상 건설을 정초(定礎)하시며, 새 교법을 초안하신 후, 새 회상의 창립을 공개하신 경로를 살폈다. 대종사께서 교법과 교제(敎制)를 정비하신 후 열반하시매, 정산 종사께서 시국의 만난(萬難)중에 법등(法燈)을 이어, 교단 체제를 형성 완비하시며, 보본 사업(報本事業)을 주재(主宰)하시며, 모든 목표사업 기관을 확립하시며, 교전의 편수, 삼동윤리의 선포 등으로 일원 세계 건설의 터전을 다지신 경과를 살피고, 정산 종사 열반 후 교헌에 따라 대산(大山)종법사를 추대하고, 대중이 합력하여, 교전 교서의 결집 발간, 법위 향상 운동, 종협 참여, 해외 포교, 제2차 보본 사업, 반백년 기념대회 등으로 결실의 성업에 정진한 개교 반백년 동안의 대체 과정(大體過程)을 살폈다. 우리는 이로써, 대종사께서 일찌기 예시 하신 사 오십 년 결실(四五十年結實)의 자취를 대관(大觀)하고, 사 오백 년 결복(四五百年結福) 향한 앞으로의 무궁한 전진에 반조하는 거울을 삼게 될 것이다.
2. 한민족과 한반도
하늘의 자손임을 믿는 인류의 한 갈래가 밝음의 근원을 찾아 동으로 동으로 옮겨 와서 극동의 한 반도에 정착하니 이것이 한민족이라 한다. 한민족은 대략 반만년 전에 이미 나라를 세우고, 아름다운 강산, 알맞은 기후와, 기름진 풍토, 넉넉한 물산에 의좋게 살면서 슬기로운 문화를 한반도에 이룩하여 왔다. 밝음을 숭배하고 예의를 숭상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한민족의 나라는, 이웃 나라들로 부터 예의 동방 군자국이라는 기림을 받았으며, 부당한 침략을 용감히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일찌기 한 번도 이웃을 침략하는 부당한 싸움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하나라는 뜻과 크다는 뜻을 겸하여 갖춘 [한]민족 가운데, 대대로 신령한 인물들이 이어 나왔지마는, 시대의 대운이 하나의 세계로 향하여 크게 열리는 새 세상 개벽의 여명에 도덕으로 천하를 한 집안 삼을 큰 주세 성자가 한민족 가운데서 출현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지도상의 한반도는 아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북으로 부터 남을 향하여 뻗어 내려, 양대륙이 좌우에서 감싸고 있으니, 이는 마치 세계의 추기(樞機)를 이룰 지형이며, 삼면 바다 일면 대륙에 연결된 그 위치는 세계의 문호가 됨직하다. 더구나 금강산은 천하의 명산이라, 대종사께서 [이 산은 장차 세계의 공원이 될 것이라. ···이 나라는 금강산으로 인하여 세계에 크게 드러나리라] 하셨을 뿐더러, 일찍부터 금강산에 얽혀 온 불가(佛家)의 여러 인연 설화들은, 다 고요한 아침 나라 한반도가 장차 동방의 새 불토로 무궁한 영광을 길이 누릴 것을 예시하여 왔다.
3. 한반도의 종교
아득한 옛날 부터 한민족도 숱한 신앙을 가졌겠지마는, 역사의 첫 장을 넘기게 되는 때에는 이미 태양 숭배를 알맹이로 하는 민족적 종교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반도 고유의 신앙이다. 그 후 대륙과의 교통이 활발해 지면서 불교가 들어 오고, 유교·도교가 들어 와서, 서로 공존도 하고 배척도 하는 가운데, 각각 그 시대의 정신계를 지배하였고, 이웃 나라의 문화에 까지 적지 않은 이바지를 하였으며, 회회교도 전래된 흔적이 있으나 희미해 졌다. 근세에 이르러 개화의 물결을 타고 기독교가 서양에서 들어 왔으며,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개탄하고 무기력해진 유·불·선 삼교(儒佛仙三敎)의 총화를 이루어, 서교(西敎)에 대응하면서, 보국 안민(輔國安民) 광제 창생(廣濟蒼生) 하기를 주장하는 동학(東學)이 일어나고, 동학이 여러 가지 변모와 분파를 이루면서 특히 호남을 중심으로 펴지는 가운데 증산교(甑山敎)가 일어나, 동학과 쌍벽을 이룸으로써, 한반도에는 고유의 민간 신앙에 전래(傳來)의 비결들을 결부시켜 개벽의 대운을 기다리는 수 많은 신생 종파가 뒤를 이어 일어 났다.
4. 선지자들의 자취
서가모니 불께서 정법(正法).상법(像法).계법(季法)을 말씀하시고 여래 멸후 후 오백년을 말씀하시어, 삼시(三時) 또는 오시(五時)로 불법의 성쇠와 재흥(再興)을 예언하신 것이나, 미륵 보살을 당래 교주로 수기(授記)하신 것 등은 다 불문에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 중 특히 한반도에서, 금강산이 법기 도량(法起 道場)으로, 이 나라가 불국 연토(佛國緣土)로 믿어져 온 것은, 미륵불을 기다리는 신앙 행사가 다른 어느 지역에서 보다 성행하였던 사실과 더불어 주목할 일이다. 이는 실로 이 땅 불문의 선지자들이 한반도가 장차 새 불토로 될 것을 예견하고, 민중의 마음 속에 그 믿음을 뿌리 깊이 심어 준 것이다. 그 후, 한반도에는 유명 무명의 많은 선지자들이, 혹은 비결로, 혹은 도참(圖讖)으로, 혹은 가요로, 미래의 조선이 세계가 우러르는 거룩한 국토로 된다는 신념을 더욱 고취하였고, 원기 전(圓紀前) 50년 대(1860~1864)에 동학의 최 수운(崔水雲 名濟愚)은 후천의 개벽을 외치면서 [유도(儒道)·불도(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運)이 역시 다했던가. ···만고(萬古) 없는 무극 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 ···운수(運數) 있는 그 사람은 차차 차차 받아다가 차차 차차 가르치니 나 없어도 다행일세]라 하였으며, 원기 전 10년대(1900~1909)에 강 증산(姜甑山 名一淳)은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라]고 말하고, [예수교도는 예수의 재강림을 기다리고, 불교도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동학 신도는 최 수운의 갱생을 기다리나니, 누구든지 한 사람만 나오면 각기 저의 스승이라 하여 따르리라]고 말하여, 이 땅에 새 세상의 주세 성자가 뒤이어 출세하여 새 세상의 큰 회상을 건설할 것임을 밝히 예언하였다.
5. 일대전환의 시대
대종사께서 이 세상에 오신 시대는 인류 역사상 일찌기 없었던 큰 격동의 시대요 일대 전환의 시대였다. 19세기 말엽부터 밖으로는 열강 여러 나라의 침략 주의가 기세를 올려, 마침내 세계 동란의 기운이 감돌았고, 급속한 과학 문명의 발달은 인류의 정신 세력이 그 주체를 잃게 하였다. 안으로 한국의 국정은 극도로 피폐되고, 외세의 침범으로 국가의 존망이 경각에 달려 있었으며, 수백년 내려 온 불합리한 차별 제도 아래서 수탈과 탄압에 시달린 민중은 도탄에 빠져 있는 가운데, 개화의 틈을 타서 재빠르게 밀려 든 서양의 물질 문명은 도덕의 타락과 사회의 혼란을 가중 시켜 말세의 위기를 더욱 실감하게 하였다. 당시의 일대 위기를, 후일, 대종사께서는 [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사람이 사용하여야 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 고해가 없으리요] 라고 개교의 동기 설명에 요약하여 개탄하시고, [이제 부터는 묵은 세상을 새 세상으로 건설하게] 된다고 말씀하시었다.
6. 말법현상과 구주출세
당시 한반도의 종교계 또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니, 고유의 신앙과 유·불·선 삼교는, 혹은 무당들의 미신 무대로 화하고, 혹은 유교의 세력에 밀려 산중에 숨어 들었으며, 혹은 허례와 공론으로 형식만 남게 되고, 혹은 일 없는 이의 양생술로 그림자만 남았으며, 서교(西敎)는 숱한 박해를 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고, 동학은 갖은 경난(經難)끝에 숨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 밖의 여러 교파들은 혹세 무민으로 민심의 혼란에 부채질을 더할 따름이었다. 이에 따라, 민중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으로써, 새 성자에 의한 새 사상 새 종교를 더욱 기다리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구원 겁래의 크신 서원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신 것이다. 후일 정산 종사는 대종사의 성비(聖碑)에 쓰시기를 [대범, 천지에는 사시가 순환하고 일월이 대명(代明)하므로 만물이 그 생성의 도(道)를 얻게 되고, 세상에는 불불(佛佛)이 계세(繼世)하고 성성(聖聖)이 상전(相傳)하므로 중생이 그 제도(濟度)의 은(恩)을 입게 되나니, 이는 우주 자연의 정칙(定則)이다] 하시고, [옛날 영산 회상이 열린 후, 정법과 상법을 지내고 계법 시대에 들어 와서, 바른 도가 행하지 못하고 삿된 법이 세상에 편만하며, 정신이 세력을 잃고 물질이 천하를 지배하여 생령의 고해가 날로 증심 하였나니, 이것이 곧 대종사께서 다시 이 세상에 출현하시게 된 기연이다] 라고 밝히시어, 대종사께서는 새 세상의 주세불로 이 땅에 다시 오시었고, 새 부처님께서 세우신 새 회상은 새 세상의 주세 회상임을 분명히 하여 주시었다.
제2장 소태산 대종사(少太山大宗師)
1. 대종사의 탄생과 유시
대종사의 성(姓)은 박(朴)씨요, 이름은 중빈(重彬)이시요, 호(號)는 소태산(少太山)이시니, 원기 전(圓紀前) 25년(1891·辛卯) 음 3월 27일에 한반도의 서남 해변, 전라 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全羅南道 靈光郡 白岫面 吉龍里) 영촌(永村)에서 탄생하시어, 이웃 마을 구호동(九號洞)에서 성장하시었다. 부친은 박 회경(法名晦傾 字成三)이시요, 모친은 유 정천(江陵劉氏 法名正天)이시며, 신라 시조왕 박 혁거세(新羅始祖王朴赫居世)의 후예이시다. 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이시니, 신라 밀성 대군(景明王長子密成大君)에 의하여 본(本)을 얻었고, 그 후,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에 세거(世居)하다가, 대종사의 7대조 때 영광군에 이거하였으며, 처음에는 군서면 마읍리에 거주하다가, 대종사 탄생 전 7년(1884·甲申) 길룡리로 이사하시었다. 부친은, 가난하여 학문은 없었으나, 천성이 명민하여 평생에 사람들의 경모함을 받았고, 모친은, 천성이 인후하여 이웃에서 항상 덕인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대종사는 그 3남이시었다. 대종사, 어려서 부터 기상이 늠름하시고 도량이 활달하시며, 모든 사물을 대함에 주의하는 천성이 있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함을 항상 범연히 아니하시며, 매양 어른들을 좇아 그 모든 언행에 묻기를 좋아 하시며, 남과의 약속에 한번 하기로 한 일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실행하시었다. 어리신 때에 마을 앞 개울 가에서 큰 뱀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그를 쫓으신 일과, 4세 때 부친과의 약속을 지켜 동학군 왔다는 경보로 부친을 크게 놀라게 하신 일과, 10세 때 한문 서당 선생과의 약속을 지켜 그 날 해 전에 화재(火災)로 그를 크게 놀라게 하신 일 등은, 대종사의 비범한 성격 일단을 보이는 일화들로서 당시 참견한 여러 사람은, 혹은 장차 큰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고 비방도 하고, 혹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찬탄도 하였다.
2. 대종사의 발심
대종사, 7세 되시던 해, 어느 날, 화창한 하늘에 한 점 구름이 없고, 사방 산천에 맑은 기운이 충만함을 보시다가, 문득 [저 하늘은 얼마나 높고 큰 것이며, 어찌하여 저렇게 깨끗하게 보이는고] 하는 의심이 일어 나고, 뒤를 이어 [저와 같이 깨끗한 하늘에서 우연히 바람이 일고 구름이 일어나니, 그 바람과 구름은 또한 어떻게 일어 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일어났다. 이러한 의심이 시작됨을 따라 모든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 나서, 9세 때 부터는 나를 생각한즉 내가 스스로 의심이 되고, 부모와 형제간을 생각한즉 부모와 형제간 되는 일이 의심이 되고, 물건을 생각한즉 물건이 또한 의심이 되고, 주야가 변천하는 것을 생각한즉 그것이 또한 의심이 되어, 이 의심 저 의심이 한 가지로 대종사를 답답하게 하였다. 그 후 10세 때 부터 부모의 명에 의하여 겉으로는 비록 한문 서당에 다니시었으나, 글 배우는 데에는 뜻이 적으시며, 의복·음식·유희 등에는 조금도 생각이 없으시고, 오직 이 수 많은 의심을 풀어 알고자 하는 한 생각으로 마음이 차 있었다.
3. 대종사의 구도
대종사, 한번 의심을 발하신 후로는 날이 갈수록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하시어, 밤 낮으로 오직 소원 성취의 길을 찾기에 노심(勞心)하시더니, 11세 때 마읍리 선산 묘제(先山墓祭)에 참례하셨다가, 산신을 먼저 제사하고 선조를 뒤에 제사함을 보시고 친족 중 한 사람에게 그 연유를 물어, 산신은 크게 신령하다 함을 들으시고는 나의 이 모든 의심을 산신에게 물으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어, 그 날 부터 내심(內心)에 산신을 만나기로 작정하시었다. 그 후로는, 매일 산중을 더듬어 산과(山果)를 거두시며, 혹 정한 음식을 보시면 그것을 가지고 마을 뒷산 [삼밭재]에 오르시어, [마당바위]라는 바위 위에 제물을 진설하시고, 전후 사방을 향하여 종일토록 예배하시다가, 해 진 후에야 귀가하시기를 매일 과정으로 하시되, 혹은 그 곳에서 밤을 지내기도 하고, 혹은 비가 오고 눈이 와도 하루도 빠짐 없이 5년 간을 일관하시었으며, 처음에는 부모 모르게 그 일을 시작하시었으나, 마침내 모친께서 알으시고 그 정성에 감동하여 많은 후원을 하시었다. 대종사, 15세 때에 부모의 명에 의하여 면내 홍곡리의 규수 양 하운(濟州梁氏 法名夏雲)과 결혼하시고, 16세 되시던 정월, 환세 인사 차로 처가에 가셨다가, 마침 마을 사람이 고대 소설(朴太溥傳 趙雄傳등) 읽는 것을 들으시는 중, 그 소설의 주인공들이 천신 만고 끝에 도사(道士)를 만나 소원을 성취하는지라, 대종사의 심중에 큰 변동이 생기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고자 하던 산신은, 5년 간 한결 같이 정성을 들였으나 한 번도 보이지 않으니, 가히 믿을 수 없을 뿐 더러, 그 유무를 확실히 알 수도 없는 것인즉, 나도 이제 부터는 저 소설의 주인공 같이 도사 만나는데에 정성을 들인다면, 도사는 사람이라 반드시 없지도 아니하리라] 생각하시고, 전날의 결심을 도사 만날 결심으로 돌리시었다. 그 후로는 길에 이상한 사람이나 걸인이 있어도 그가 혹 도사나 아닌가 하여 청하여 시험해 보시며, 또한 어디에 이인(異人)이나 은사(隱士)가 있다고 하면 반드시 찾아 가 보시고, 혹은 청하여 같이 지내시며 시험해 보기도 하여, 그 후 6년 간 도사를 찾아 일천 정성을 다 들이시었다.
4. 대종사의 입정
대종사, 어려서 부터 글 공부와 살림에는 뜻이 없으시고, 오직 도(道) 구하는 데에만 뜻을 두시매, 부친께서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다가, 마침내 대종사의 정성에 감동되어 그 구도를 적극 후원하셨으며, 대종사께서 20세에 이르도록 도사 만날 소원도 이루지 못함을 보시고는 [마당바위] 부근에 수간의 초당을 지어 심공(心功)을 들이게도 하시더니, 원기 전 6년(1910·庚戊) 10월 마침내 별세하시었다. 이에 대종사께서는 생활과 구도의 후원을 일시에 잃게 되신 데다가, 이미 큰 형과 아우는 출계(出系) 분가하고, 중형은 일찍 별세한지라, 모친의 봉양과 권속의 부양을 다 대종사께서 책임지시게 되니, 뜻 없는 살림과 경험없는 고생에 그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시었다. 뿐만 아니라, 6년 동안 구하고 바라던 도사도, 수많은 사람을 접응하여 보시었으나, 바른 스승을 찾을 곳이 없게 되매, 22세 때 부터는 도사 만날 생각도 차차 단념하시고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하는 한 생각만 점점 깊어져 갔다. 처음에는 생활에 대한 계교심도 혹 있었고, 고생이라는 느낌도 혹 있었으나, 세월이 갈수록 다른 생각은 다 잊으시고, 오직 그 한 생각으로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고 저녁에서 아침에 이르시며, 때로는 저절로 떠 오르는 주문(呪文)도 외우시고, 때로는 고창 연화봉(全北高敞郡心元面蓮花峰) 초당 등으로 장소를 옮기어 정신을 수습도 해 보시었으나, 25세 때 부터는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그 생각마저도 잊어버리게 되어, 점점 행하여도 행하는 줄을 모르고, 말하여도 말하는 줄을 모르며, 음식을 드시어도 드는 줄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 이사에 집은 두 번 다 무너지고, 생계는 막연하여 조석 공양이 어려운 데다가, 복중(腹中)에는 큰 적(癪)이 들고, 온 몸에는 종기가 가득하여, 가족들의 근심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 사람들은 다 폐인으로 인증하게 되었으며, 그 정신이 어느 때에는 혹 분별이 있는 듯 하다가 다시 혼돈하여 지고, 혹 기억이 나타나는 듯 하다가 다시 어두어 지니, 부인은 대종사의 정신 회복을 위하여 다년간 후원 별처(後園別處)에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5. 대종사의 대각
원기 원년(1916·丙辰) 음 3월 26일 이른 새벽에, 대종사, 묵연히 앉으셨더니, 우연히 정신이 쇄락해 지며, 전에 없던 새로운 기운이 있으므로, 이상히 여기시어 밖에 나와 사면을 살펴 보시니, 천기가 심히 청랑하고 별과 별이 교교(皎皎)하였다. 이에, 맑은 공기를 호흡하시며 뜰 앞을 두루 배회하시더니, 문득 이 생각 저 생각이 마음에 나타나, 그동안 지내 온 바가 모두 고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며, 고생을 면하기로 하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며, 날이 밝으면 우선 머리도 빗고 손톱도 자르고 세수도 하리라는 생각이 일어 났다. 날이 밝으매, 대종사, 먼저 청결하는 기구들을 찾으시는지라, 이를 본 가족들은 대종사의 의외 행동에 한 편 놀라고 한 편 기뻐하여 그 동작을 주시하였으니, 이것이 곧 대종사 출정(出定)의 초보이었다. 그 날 조반 후, 이웃에 사는 몇 몇 마을 사람이 동학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가지고 서로 언론(言論)하는 중, 특히 「오유영부 기명선약 기형태극 우형궁궁(吾有靈符其名仙藥其形太極又形弓弓)」이란 귀절로 논란함을 들으시매, 문득 그 뜻이 해석되는지라, 대종사 내심에 대단히 신기하게 여기시었다. 얼마 후, 또한 유학자 두 사람이 지나다가 뜰 앞에 잠간 쉬어 가는 중, 『주역』에 「대인 여천지합기덕 여일월합기명 여사시합기서 여귀신합기길흉(大人與天地合其德與日月合其明與四時合其序與鬼神合其吉凶)」이라는 귀절을 가지고 서로 언론함을 들으시매, 그 뜻이 또한 환히 해석 되시었다. 이에 더욱 이상히 여기시어 [이것이 아마 마음 밝아지는 증거가 아닌가]하시고, 전 날에 생각하시던 모든 의두를 차례로 연마해 보신즉, 모두 한 생각에 넘지 아니하여, 드디어 대각을 이루시었다. 대종사, 이에 말씀하시기를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하시었다. 이로부터 대종사의 심경은 날이 갈수록 명랑해 지고, 야위던 얼굴과 몸에 기혈이 충만하여, 그간의 모든 병증도 차차 저절로 회복되니, 보는 이들 누구나 정신이 황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종사의 생장하신 길룡리는 산중 궁촌으로, 견문이 심히 적었고, 대종사께서도 글 공부한 시일이 2년에 불과하였으므로, 그 동안 어떤 종교의 교의(敎義)와 역사를 듣고 배우신 바가 없었으나, 듣고 보신 바가 없이 스스로 원을 발하시고, 스스로 정성을 다하시고, 스스로 정(定)에 드시고, 스스로 대각을 성취하여, 필경은 천만 교법의 대소 본말을 일원의 이치로써 관통하시었으니, 이는 곧 영겁에 수도의 종성(種性)이 매(昧)하지 아니한 까닭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