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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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장 교단체제(敎團體制)의 형성(形成) === | === 제3장 교단체제(敎團體制)의 형성(形成) === | ||
==== 1. 교화 기관지의 발행 ==== | |||
제 1회 기념 총회(원기13년3월)를 마치고 제 2회에 접어 들면서 새 회상이 먼저 착수한 중요한 일은 교화 기관지의 발행이었다. | |||
원기 13년(1928·戊辰) 5월에 월간(月刊) [월말통신(月末通信)]이 송 도성(硏究部書記) 주간(主幹)으로 창간되어 복사판으로 34호(원기15년 12월호)까지 발행하다가, 교서 편찬 등 사무 관계로 부득이 한 동안 중단되었으며, 원기 17년(1932·壬申) 4월에 복간, [월보(月報)]로 개제하여, 전 음광(硏究部長) 주간 아래 등사판으로 48호(원기18년 6월호) 까지 발행하다가, 출판법 관계로 적발되어 48호 전부를 일경(日警)에게 압수 당하고 폐간 되었다. | |||
원기 18년(1933·癸酉) 9월, 총독부 당국의 정식 허가를 얻어, 월간 [회보(會報)](全飮光주간)를 창간, 등사판 발행을 계속하다가, 원기 19년(1934·甲戌) 12월호(會報13호)부터 이 공주(通信部長) 주간으로 인쇄판을 발행, 점차 부수가 증가되었으나, 25년(1940·庚辰) 제 2차 세계 대전이 급박해지면서 계간으로 바꾸었다가, 26년(1941·辛巳) 1월, 통권(通卷) 65호를 마지막으로 마침내 휴간하였다. | |||
[월말 통신(月末通信)]은 당시 몇 개소의 지방 교당에 법설 요지와 총부 전달 사항 및 교단 소식을 주로 보도하였고, [월보]와 등사판 [회보]는 거기에 의견 교환의 역할도 겸하였으며, 인쇄판 [회보]는 차차 교화와 문화 기능도 겸하게 되어, 일정(日政) 압제 아래 유일한 문화 활동의 명맥이 되었고, 법설 기재와 감각·감상·의견·처리·문목건 등의 제출이 많이 권장되어, 초기 교단의 정신적 유산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 |||
==== 2. 초기 교서들의 발간 ==== | |||
제 1회 기념 총회(원기13년3월) 이후 교단이 진행한 중요 사업의 또 하나는 초기 교서들의 편집 발간과 [회규]의 개정 시행이었다. 이미 간행된 첫 교서로 [취지규약서]와 [수양 연구 요론]이 있으나, 다 교리의 원강(元綱)이 두루 밝혀지지 못하였을 뿐더러, 제도 조직도 교세의 발전을 유감 없이 뒷받침하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 |||
원기 15년(1930·庚午)부터 대종사 몇 몇 제자(별록17)에게 그 동안 편편으로 제정 발표하신 교리 제도의 강령들을 정리 편집케 하신 후, 친감(親鑑)을 거쳐 이를 차례로 발간하시니, 원기 16년(1931·辛未) 7월에는 [불법연구회 통치조단 규약]이, 17년(1932·壬申) 4월에는 [보경 육대요령(寶經六大要領)]이 발간되었고, 19년(1934·甲戌) 5월에는 개정판 [불법연구회 회규]가, 그 해 12월에는 [보경 삼대요령(寶經三大要領)]이 발간 되었으며, 20년(1935·乙亥) 4월에는 과거 봉래산에서 초안하신 [조선불교 혁신론]이, 그 해 8월에는 [예전(禮典)]이 발간되었고, 21년(1936·丙子)에는 [회원수지(會員須知)]와 [불법연구회 약보]가, 24년(1939·己卯)에는 [불법연구회 근행법]이 각각 발간되었으며, 25년(1940·庚辰)에는 새 회가와 찬불가·찬송가 등이 제정 발표되어, 창립 제 2회 12년 간은 가위 초기 교서 편집 발간의 황금 시기를 이루었다. | |||
[통치 조단 규약]은, 총론에서 조단의 대지를 말하고, 총칙·남녀 구별의 조직·수위단의 조직과 선거 방식·각단의 조직·회의·상벌 등을 밝힌 후, 세칙으로 일기 조사법 등을 밝혔다. [육대요령]은 권두에 개교 표어·교리도·총론을 싣고, 제 1장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제 2장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제 3장 훈련편·제 4장 학력 고시편·제 5장 학위 등급편·제 6장 사업 고시편 등으로 편찬되어 있다. 개정판 [회규]는 다음 절에 설명할 바와 같고, [삼대요령]은 육대요령 가운데 제 3장 까지가 촬요 편찬된 바, 심고와 기도에 대한 설명이 제 1장 끝에 들어 있다. [조선불교 혁신론]은 총론에 혁신의 대요를 밝히고, 과거 조선 사회의 불법에 대한 견해·조선 승려의 실생활·세존의 지혜와 능력·외방의 불교를 조선의 불교로·소수인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분열된 교화 과목을 통일하기로·등상불 숭배를 불성 일원상(佛性一圓相)으로 등 7개 장(章)으로 편찬된 바, 일원상 신앙법과 일원상 조성법이 비로소 나타나 있다. [예전]은 총론에서 신정 의례의 대요를 밝히고, 제 1편 출생례·제 2편 성년례·제 3편 혼례·제 4편 상장례(喪葬禮)·제 5편 제례(祭禮)·제 6편 유공인 상장례(有功人喪葬禮)·제 7편 4기념례·제 8편 학위 승급례·제 9편 설법례 등으로 되어 있고, [회원수지]·[약보]·[근행법]등은 다른 모든 교서 중에서 발췌 편찬한 작은 책자들이다. | |||
==== 3. 각 조단의 정비와 새 회규의 시행 ==== | |||
[단규]로 알려진 [불법연구회 통치조단 규약]이 발간된 것은 원기 16년(1931·辛未) 7월이었으나, 그 원칙과 세칙 초안을 대종사께서 친감 완정하신 것은 그 해 초였다. 2월에, 대종사 친히 각급 조단에 착수하시어, 그 동안 경우에 따라 남녀 합동으로 조직하였던 각급단을 다 남녀 구분으로 조직하시고, 남자 수위단원 중 실무 불능한 3명의 대리를 확정하시는 동시에, 여자 수위단 시보단을 내정하시며, 갑·을·병 3종의 예비 수위단을 각 1단씩 조직하시는 동시에, 산업·육영 두 창립단도 남녀를 구분하여 조직하시었다. | |||
한 편, 그 해(원기 16·1931) 3월 26일에는, 대종사, 제 2차 법위 승급자를 발표하시니, 예비 법마상전부에 송 도성·김 기천·전 음광·송 규·이 동진화·이 공주·송 벽조 등 7인이었고, 총지부를 망라하여 정식 특신부가 문 정규 등 54인(별록18), 예비 특신부가 양 하운 등 48인(별록19)이었다. | |||
또한, 새 [회규] 제정에 앞서 이미 입법된 주요 법규는, 원기 12년(1927·丁卯) 2월에 신분 검사법, 14년(1929·己巳) 4월에 은부모 시자녀법, 16년(1931·辛未) 3월에 임원 등급 및 용금 제도, 18년(1933·癸酉)에 정남 정녀에 관한 종법사 명령과 간이 일기법 등이 있어 시행되었다. | |||
그 중 특히 신분 검사법은, 당연 등급 각 조항과 부당 등급 각 조항을 자기가 검사하여, 선악의 근성과 죄복의 요소가 어느 정도에 있는가를 스스로 비판하며, 혜수·혜시와 대부·차용을 자기가 검사하여, 복록과 부채가 어느 정도에 있는가를 스스로 알게 하여, 기질 변화와 복록 저축을 스스로 촉진하고, 회상의 인재 선택에도 도움을 얻기 위한 법으로, 연중 1차씩 행하게 하시었고, 은부모 시자녀 법은 교도간에 특별한 은의로 공부 사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은부자 은모녀의 의를 맺는 것인 바, 이 법의 시행으로 이 무렵(원기14~15)에 대종사를 비롯한 회상 원로 요인들과 후진 청년들 사이에 은부자 은모녀의 결의가 상당히 많았다. | |||
앞 절(본장 2절)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창립 총회(원기9년4월)에서 채택한 [회규]는 시대의 추이와 교세의 발전에 따라 그 개정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원기 18년(1933·癸酉)부터 대종사께서 송 규에게 명하여 [회규]의 개정 작업을 진행케 하시더니, 드디어 19년(1934·甲戌) 3월, 총대회의 찬성을 얻어, 그 동안 시행 해온 총재·회장 아래 7부제로 된 회규를 대폭 개정하여, 종법사·회장 아래 이원 십부제(二院十部制)를 골자로 하는 총 9장 29조의 원칙(原則)과 총 12장 75조의 세칙(細則)으로 된 새 회규를 제정 시행하게 되었다. 이는 실로 새 회상이 교단의 새 체제를 형성하게 된 중요한 작업이었다. | |||
이에 따라, 그 동안 총재라 칭하여 오던 회상의 최고 직위를 종법사라 하게 되었고, 그 아래, 회장과 2원(院) 10부(部)를 두어 회무를 분장하되, 교정원에 교무·연구·통신·감사 4부를 두어 공부계의 모든 사무를 총관하게 하고, 서정원에 서무·상조·산업·공익·육영·공급 6부를 두어 사업계의 모든 사무를 총관하게 하였으며, 총대회를 대의 기관으로 두고, 회원은 통상 회원·특별 회원 2종으로 하되, 의무를 지키지 않는 신도 제도를 두었으며, 지방에는 지부와 출장소를 두고, 중앙에 입법 위원회를 두어 규약의 실행 장려와 감시 독려를 하게 하였다. | |||
이 때, 종법사에 대종사, 회장에 조 송광이 유임되고, 초대 교정원장에 송 규, 초대 서정원장에 이 재철이 선임되었으며, 원기 22년(1937·丁丑)에 3대 회장에 이 용광(李庸廣), 2대 교정원장에 송 도성이 선임되었다. | |||
==== 4. 일원상 봉안과 교무의 훈련 ==== | |||
원기 20년(1935·乙亥) 4월에 익산 총부 대각전이 준공되고, 그 정면 불단에 심불 일원상(心佛一圓相)이 정식으로 봉안되니, 이는 새 회상이 신앙의 체계를 확립하여 종교의 체제를 완전히 갖춘 또 하나의 중대한 사실이었다. 대종사 대각 직후 일원 대도의 제일성을 발하시고, 원기(圓機)·일원(一圓) 등의 어귀(語句) 사용과 함께 일원상을 그려 보신 바도 있었으며, 교법을 제정하실 때, 사은 곧 일원(四恩卽一圓)의 신앙법을 꾸준히 구상은 해 오시었으나, 이에 이르러 비로소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확정 시행하신 것이다. | |||
이어서 이듬해(원기21·1936) 9월에 초량 교당, 12월에 영산 대각전과 신흥 교당, 그 이듬해(원기22·1937) 3월에 용신 교당과 원평 교당을 신축하면서 다 일제히 불단을 마련하고 일원상을 봉안하였으며, 뒤이어, 모든 교당도 일제히 불단을 신설하여 일원상을 봉안하게 하시는 동시에, 혹은 설법 혹은 법문으로 일원의 종지를 더욱 천명해 오시다가, 원기 23년(1938·戊寅) 11월 동선에는 심불 일원상 봉안법을 정식으로 제정하여 선포하시고, [심불 일원상 내역급 서원문]을 친제 발표하시었다. 이리하여 일원상은 새 회상의 최고 종지로서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이 되었으며, 그 봉안은 교당 뿐 아니라 교도 가정에도 적극 권장하여, 원기 25년도(1940·庚辰)의 각지 심불 봉안 실시 상황을 보면, 13개 지방을 통하여 180가정이 일원상을 봉안하였다. | |||
한편, 원기 23년(1938·戊寅) 11월 21일에는 새 회상 처음으로 교무 강습회(교감柳虛一)를 개최하고 각 지방 교무를 총부에 소집하여, 대종사 친히 설법하시는 아래 40일간의 교리 훈련을 실시하시니, 이것이 새 회상 교무 훈련의 효시가 되었다. 창립 후 지부 교당이 늘어남을 따라 교무의 수효도 점차 불어났으나, 당시의 교무들은 일정한 훈련 기간을 거침이 없이 일선 교화에 나서게 되었으므로 통일적 교화를 실시하는데 아쉬움이 적지 않던 바, 이에 이르러 교리가 새롭게 이해되고, 모든 법도가 고루 단련되어 통제 있는 대중 교화에 새로운 기틀을 잡게 되었다. | |||
또한, 교도는 매인 아래 9인 이상을 인도하여 입교하게 하자는 연원 의무 실행을 적극 권장하기 위하여, 원기 21년도(1936·丙子)에는 교무부에 연원부를 비치하고 일반 회원의 포교 활동을 장려한 바, 원기 23년도(1938·戊寅) 말에는 최고 이행자 박 사시화(364명)를 비롯하여 각 지방의 연원 의무 이행자 수가 96명에 달하였다. | |||
==== 5. 산업부의 발전과 산업 기관 창설 ==== | |||
원기 12년(1927·丁卯)에 발족한 산업부 창립단은 꾸준히 기금 조성에 노력하여 오다가, 원기 13년(1928·戊辰) 10월에 박 대완(朴大完)의 의견을 받아 들여 총부앞(現大覺殿貞和院間)에 복숭아 과수원을 시작하여 좋은 성과를 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진안 만덕산에 4천 여주의 감 과수원, 황등(益山郡黃登面)에 2천 4백주와 총부 뒤 알봉(謁峰)에 7백주의 밤 과수원, 총부 부근(現圓光大學敷地一部)에 1천 여주와 영산 교당 앞에 1천 여주의 복숭아 과수원, 신흥 교당 부근 이흥(驪興)에 2천 여주의 종합 과수원이 창설되었고, 21년(1936·丙子)에는 산업부의 가옥을 독립 신축하고, 각종 묘목·약초·야채의 재배와 양계·양돈·양토(養兎) 등을 병행하여 큰 성과를 보게 되었다. 또한 22년(1937·丁丑) 9월에는 산업부의 양계를 대폭 확장하여 총 18간(間)의 계사(鷄舍)를 신축하였고, 생산된 계란은 멀리 만주에 까지 대량 수출하여 새 회상 산업 활동의 기세를 올렸다. | |||
한 편, 원기 19년(1934·甲戌) 8월에는 이리에 보화당 한약방을 합자 회사 형식으로 창설하니, 이것이 후일 새 회상 수익 기관의 으뜸을 이루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이는 대종사께서 앞으로 교단 자선 병원(慈善病院이름濟衆院)의 설립 기금과 교화 교육 사업의 기금을 마련하실 뜻으로 설립하신 것인 바, 그 동안 신정 예법의 실행에 의하여 저축된 총지부 일반 교도의 공익금(公益金1만원)을 총 투자하였으며, 대표 이사 이 재철(庶政院長겸임)과 첫 실무 임원(이사 李東安 의사 朴理碩)이 그 발전의 기반을 다졌다. | |||
또한, 원기 25년(1940·庚辰) 2월에는 삼례수계리(三禮岫溪里)에 임야 7만평을 사들여 삼례 과수원을 창설하니, 자본금은 각 지부 출장소의 유지비 자금(維持費資金7천여원)을 수합 투자하였으며, 초대 감독에 이 동안(産業部長겸임)이 발령되고, 첫 실무 임원(주무 金碩奎 기사 丁一持)이 파견되어 황도(黃桃)를 주로 하는 종합 과수원을 시작하였다. 삼례 과수원은 그 후 삼창과원(三昌果園)·수계 농원(岫溪農園)·은산재단 수계농원 등으로 개칭되면서 주로 새 회상 기본 인재 양성의 산업 도량으로 발전하였다. | |||
==== 6. 제 2회의 교세와 사회 여론 ==== | |||
원기 25년(1940·庚辰) 4월은 창립 제 1대 제 2회의 결산 총회기에 해당하였으나, 시국 관계로 기념 행사는 일체 갖지 못하고 정례 총회에 지방 회원의 교리 강연회를 처음 겸행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 |||
당년도 말 사업 보고에 의하면 교도 수는 특별 회원 871명, 통상 회원 5,083명, 합계 5,954명이었고, 전무출신은 80여명이었으며, 교당 수는 제 1회(원기13년3월) 이전에 설립된 영산·익산·서울·신흥과, 원기 14년(1929·己巳)에 마령, 15년에 좌포·원평, 16년에 하단, 19년에 남부민, 20년(1935·乙亥)에 전주·대판(日本 大阪), 21년에 관촌·초량, 22년에 대마·신하·용신·개성, 23년에 남원·이리, 24년에 운봉·화해 등 교당이 차례로 설립되어 도합 21개소가 되었고, 당년(원기25·1940)에 대덕·호곡 등 교당이 신설되었다. | |||
그 중 특히 일본 대판에 교당이 설립되어 초대 교무 박 대완이 부임한 일은 새 회상 해외 포교의 효시이며, 원기 22년(1937·丁丑)에 신 영기(申永基)는 총부 사무실을 희사하고, 25년(1940·庚辰)에 몇 몇 특지가(별록20)는 총부 도서실을 마련, 총부의 면모를 향상시켰다. | |||
한 편, 새 회상 공개 이후, 일반 사회의 여론은 한결 같이 우호적이고 고무적이었다. 그 중 중요한 몇 가지를 들면, 원기 13년(1928·戊辰) 11월 25일자 동아일보가 [세상 풍진 벗어나서 담호반(淡湖畔)의 이상적 생활, 정신 수양·사리 연구·작업 취사의 강령하에 움직이는 4백 회원, 익산 불법연구회의 특별한 시설]이라는 제목으로 새 회상 탐방 기사를 낸 후, 19년(1934·甲戌) 5월 28일자 일본의 대판 조일신문이 [불교의 진리에 입각, 근검 역행을 실천, 동지 5백이 공동 생활을 하는 반도의 새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새 회상을 소개하였다. 20년(1935·乙亥) 7월에 조선 총독부가 발간한 조사자료 제 42집에는 [본회는 대체로 미신을 타파하고 자연의 원리에 바탕하여, 민중의 근면을 장려한 바 있어 종교적 진흥회로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평하고, 그 자료 [전선 교별 영향표]에는 [계몽상 좋은 영향 있다. 근로 정신을 양성하고, 일면, 실지 작업으로써 일반에게 범(範)을 보인다]고 되어 있다. | |||
원기 21년(1936·丙子)에는 민족 지도자 안 도산(島山安昌浩)이 총부에 내방하여 찬양과 격려(대종경실시품45)를 아끼지 않았고, 22년(1937·丁丑)에 조광 6월호가 인식 부족한 비방 기사를 실었다가 다음 호에 찬양 기사를 낸 후, 그 달부터 매일신보·조선일보·중앙일보와, 26년(1941·辛巳)에 경성일보 등이 각각 수일 간에 연재 기사로 새 회상의 심전 계발 운동·종교 혁신 운동·문자 보급 운동·종교 생활화 운동을 대대적으로 찬양 보도하여, 창립기 새회상의 발전을 알뜰히 격려하고 그 참 면목을 일반 사회에 널리 인식 시켰다. | |||
=== 제4장 끼쳐주신 법등(法燈) === | === 제4장 끼쳐주신 법등(法燈) === | ||
=== 제5장 교단체제(體制)의 완비(完備) === | === 제5장 교단체제(體制)의 완비(完備) === |
2025년 1월 23일 (목) 17:04 판
■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全文 →제1편 개벽(開闢)의 여명(黎明) →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 → 제3편 성업(聖業)의 결실(結實)
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
제1장 새 회상(會上)의 공개(公開)
1. 불법연구회 창립 총회
원기 9년(1924·甲子) 3월에, 대종사, 서울에서 이리를 거쳐 전주(全飮光집)에 오시니 각 처에서 다수의 신자들이 모였다. 이에, 서중안 등 7인(별록5)이 발기인이 되어 [불법연구회] 창립 준비를 토의할 제, 대종사, 총부 기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리 부근은 토지도 광활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無産者)들의 생활과 각처 회원의 내왕에 편리할 듯 하니 그 곳으로 정함이 어떠하냐] 하심에, 일동이 그 말씀에 복종하였다. 또한 창립 총회 개최 장소는, 이리 부근 보광사(普光寺)로 예정하고 총부 건설지는 후일 실지 답사 후 확정하기로 하였다. 원기 9년 4월 29일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 총회를 열어 종래의 기성 조합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으로 새 회상을 내외에 공개하였다. 총회는, 영광·김제·익산·전주 지방에서 김 기천 등 14인(별록6)이 각각 그 지방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송 만경의 개회사로 개회하고, 서 중안이 임시 의장이 되어 창립 취지를 설명한 후, 규약 초안을 채택하였다. 규약에 따라, 총재로 대종사를 추대하고, 회장에 서 중안, 서기에 김 광선을 선정하였으며, 총부 본관 건설을 위하여 회원들에게 의연금을 수납하되 그 일을 회장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축사(시대일보鄭翰朝)와 회장의 답사가 있은 후 폐회하였다. 이 때 채택된 규약은, 총칙·임원·회의·회원의 권리 의무·가입 및 탈퇴·회계 및 기타 등 총 6장 22조로 되어 있는 바, 서무·교무·연구·상조조합·농업·식사·세탁의 7부를 두고, 총재 1인, 회장 1인, 부장 평의원 간사 각 약간인을 두며, 정기총회·임시총회·평의원회·월예회 등 4종의 회의를 두고, 유지는 입회금 연연금(年捐金) 의연금 농작 식리금 등으로 충용할 것을 규정하였다.
2. 총부 기지의 확정과 건설
창립 총회 후, 대종사, 각지 대표를 데리시고 이리 부근을 일일 순시하여 총부 건설의 기지를 택하시더니, 원기 9년(1924·甲子) 8월, 전라북도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全羅北道益山郡北一面新龍里 現裡里市新龍洞)에 그 터를 확정하시었다. 회장 서 중안이 기지(3천여평)대금과 건축비 일부(6백여원)를 의연하였고, 각처 회원으로부터 상당한 의연금(근8백원)이 수납되었다. 9월에 임시 요인회를 열고 총부 본관 건축을 결의한 후, 바로 공사에 착수하여, 엄동의 추위를 무릅쓰고 10여명의 전무출신과 특별 후원인들의 성심 노력으로, 11월에 비로소 목조 초가(木造草家) 2동(棟) 도합 17간(間)을 성조(成造)하니, 이것이 새 회상 총부 본관의 첫 건설이며 [불법연구회] 간판을 세상에 드러내는 처음이었다. 창립 총회 당년(원기9년·1924)의 교세는 영산(靈山) 신흥(新興) 김제(金堤) 전주(全州) 부안(扶安) 서울(京城) 진안(鎭安) 각지의 회원이 남자 60여명, 여자 70여명으로 도합 130여명이었고, 전무출신은 영광 익산을 통하여 김광선 등 13명(별록7)이었다. 부서의 조직은 인원과 사무의 미비로, 7부 중 서무부(부장吳昌建서기宋道性) 교무부(부장宋萬京) 상조조합부(서기全飮光)의 형식만 두어 사무를 취급하였고, 자산은 정관평 언답과 영산 신흥 부안 익산에 약간의 건물이 있을 뿐이었으며, 언답은 아직 해독(海毒)이 다 해소되지 않아 수익이 아주 적었다. 따라서 비록 회상의 체제는 성립되었으나, 총부의 운영과 전무출신들의 생활 방로는 심히 아득하였다.
3. 전무출신의 공동 생활
이 때 전무출신 김 광선 등은 이리(朴元石집)에 임시 주접(住接)하였으나, 적수공권으로 생활 방로가 심히 막연하던 중, 부근 송학리(松鶴里)에 척식회사 소유 토지 약간을 빌려 근근 작농한 결과, 약간의 추수를 얻어 공부의 자금을 삼게 되었으니, 이것이 새 회상 산업부의 효시이다. 그 후 재가 출가의 일심 합력으로 근근히 총부의 첫 건설은 마쳤으나, 그 유지와 생활 방로는 계속 막연하므로, 송 적벽 등이 발의하여 원기 9년(1924·甲子) 12월에 엿 제조업(製造業)을 시작하였다. 이에, 몇 사람이 주무(主務)가 되고, 모든 인원은 행상(行商)이 되어, 그 이익으로 1년간 호구(糊口)를 하게 되었으나, 이익도 박하고 외경 접촉이 심하여 공부에 방해될 우려도 있으므로, 이듬해(원기10·1925) 7월에 드디어 폐지하였다. 그 후의 생활 대책으로는 만석리(萬石里)에 척식회사 소유답 약간을 다시 빌려, 출장 작농으로 선비(禪費)를 마련하였으며, 총부 경비는 약간의 회금(會金) 수입과 임원들의 출역 농작 등으로 충당하였으니, 이는 곧 생활 종교의 체제를 세우기 시작한 작업이라 할 것이다. 당시 총부의 전무출신들은 평소 각자 가정에서 일찌기 한 번도 노동이나 행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처지였다. 폭염(暴炎)을 무릅쓰고 논과 밭에 작업하며 풍설을 무릅쓰고 거리와 마을을 배회할 때에 그 고생이 오죽하였으며, 대개는 엿밥으로 끼니를 대신하고 침구조차 부족한 누습한 방에서 종일 피곤한 몸을 쉬게 되었으니 그 간난함이 어떠하였으리요.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고생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새 회상 만난 기쁨으로 유일한 낙을 삼아서 모든 일에 조금도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석반 후에는 한 자리에 모여, 하루의 경과를 보고하고 감상과 처리건을 토론하며, 대종사께서는 간간히 법설로 대중의 공부를 지도해 주시니, 그 단란한 공동 생활은 이른 바 지상의 천국이었다.
4. 훈련법의 발표와 실시
원기 9년(1924·甲子) 5월에, 대종사, 진안 만덕산에 가시어, 한 달 동안 선(禪)(金光旋주관)을 나시며, 김대거(金大擧)를 만나시었고, 이듬해(원기10·1925) 3월에 새 교법을 지도 훈련하기 위하여 정기 훈련법과 상시 훈련법을 제정 발표하시었다. 정기 훈련은, 매년 정기로 공부를 훈련시키는 방법으로서, 동하 양기(冬夏兩期)의 선(禪)으로 하되, 하선은 음 5월 6일에 결제하여 8월 6일에 해제하고, 동선은 11월 6일에 결제하여 이듬해 2월 6일에 해제하며, 과정은, 염불(念佛) 좌선(坐禪) 경전(經典) 강연(講演) 회화(會話) 문목(問目) 성리(性理) 정기일기(定期日記) 주의(注意) 조행(操行) 수시 설교(隨時說敎) 등 11과로 정하였다. 상시 훈련은, 상시로 공부하는 방법으로서 [상시 응용 주의사항] 6조와 [공부인이 교무부에 와서 하는 책임] 6조(條)를 정하였고, 이 모든 조항을 실질적으로 대조 연습하기 위하여, 유무념 조사와 상시 일기 조사법을 정하였으며, 문자 서식에 능치 못한 사람을 위하여 태조사(太調査)법을 두어 유무념을 대조하게 하였다. 특히 일기 조사법은 매일 공부의 실행 여부만 조사 기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육신 물질 삼방면으로 혜시 혜수한 것도 대조 기재하며, 공부 사업 생활 삼방면의 의견 제출과 삼십 계문의 범과 유무도 대조 기재하되, 이 공부를 달로 검사하기 위하여 매월 단장 조사법을 정하고, 해로 검사하기 위하여 매년 교무부 보고법을 정하였으니, 그 방법이 심히 간명하고 맥락이 또한 서로 관통하여, 유무식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근기를 따라 바로 정법에 들게 하는 훈련의 강령이 되었다. 원기 10년(1925·乙丑) 5월 6일에, 대종사, 새 훈련법에 의하여 첫 정기 훈련을 실시하실 제, 총부 가옥이 아직 협착하므로 임시로 구내 개인 가옥(全飮光집) 일부를 빌려 교무 송 규의 지도 아래 10여명의 남녀 선원(禪員)이 하선 훈련을 받게 하시고, 11월에는 교무 이 춘풍(李春風)의 지도 아래 20여명의 남녀 선원이 동선 훈련을 받게 하시니, 이 양기(兩期)의 선(禪)이 새 회상 정기 훈련의 원시(元始)가 되었다. 이 정기 훈련은 일반 선원(禪員)의 공부를 단련하는 중요한 기간이 될 뿐 아니라, 초창기에 교무를 양성하는 유일한 방도로 활용되었으며, 훈련의 장소는 그 후 공회당을 신축하여, 간고한 가운데 선원 훈련의 명맥을 이어 나왔다.
5. 첫 교서의 발간과 교당들의 설치
창립 총회 때에 서 중안의 주선으로 [취지 규약서]를 임시 인쇄하였으나 그 내용이 미비하여, 이듬해 부터 매년 2회의 정기 공부에 모든 교재(敎材)를 등서 학습(騰書學習)하던 바, 원기 12년(1927·丁卯) 3월에 이 공주의 주선으로 [불법연구회 규약] [수양 연구 요론] [상조조합 규약] 등 3종의 교서를 발간하니 새 회상의 첫 교서가 비로소 공부인들에게 보급되었다. 취지 규약서로 알려진 [불법연구회 규약]에는 회상의 유래와 취지 설명과 규약을 먼저 수록하고, 연구인 공부 순서라 하여 삼강령 팔조목 삼십 계문 솔성 요론 고락 법문 등과 재가 출가 공부인들의 훈련 방법을 수록한 다음, 14개 항의 각항 세칙을 수록하여, 새 회상 교리 제도의 개요를 알게 하였고, [수양 연구 요론]에는 정정요론 상하편과 연구의 강령·연구의 진행조건·연구의 사연 조건·각항 연구 문목·공부의 진행 순서 등 7편이 수록되어, 수양 공부와 연구 공부의 지침이 되게 하였으며, [상조조합 규약]은 조합의 총칙·저금 방식·지불 방식 등을 밝혀, 신자들의 생활 향상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한 편, 교당들의 설치 상황은, 원기 9년(1924·甲子)에 익산 총부가 건설됨으로써, 영산원은 영광 지부라 이름하여 초대 지부장에 김 기천, 초대 교무에 송 벽조가 임명되었고, 봉래산 석두암은 부안 수양소로 개칭되었다. 원기 11년(1926·丙寅) 7월에는 서울 이 동진화가 창신동에 목조 초가 2동을 희사하고, 이 공주 등(별록8)이 유지를 부담하며, 김 삼매화가 치산을 담당함으로써, 경성 출장소가 발족되어, 송 도성이 초대 교무로 파견되었다. 원기 12년(1927·丁卯) 3월에는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신흥(靈光郡畝良面新川里新興)에 신흥 출장소가 설치되니, 이는 회상 초기에 이 동안이 대종사께 귀의한 후, 원기 5년(1920·庚申) 3월에 이 완철 등 10여명(별록9)과 함께 공부 비용 장만을 목적하는 묘량 수신조합(畝良守信組合)을 조직하여, 길룡리 기성조합을 법받아 소비 절약과 근검 저축을 장려하더니, 이에 이르러 신흥 출장소로 개칭하고 모든 조합원이 입교하는 동시에 조합의 전재산을 교산에 편입하였고, 교화는 당분간 영광 지부(現靈山支部)에서 출장 지도 하였다.
제2장 새 제도(制度)의 마련
1. 상조조합과 산업·육영 창립단
원기 9년(1924·甲子), 창립 총회를 마치고, 대종사, 상조조합을 신설하여 종래의 기성조합 업무를 이어 받게 하시고, 각종 자금의 저축 제도를 마련하시니, 그 종류는, 총부 각부의 자산을 통일 저축하는 각부 자금, 회원의 유지 의무금 납입을 위한 의무 자금, 정기훈련의 선비(禪費) 조달을 위한 공부비 자금, 선조의 제사 기념을 위한 헌공 자금, 회원의 각종 사업을 위한 사업비 자금, 회원의 자녀 교육을 위한 교육비 자금, 회원의 생활을 위한 생활비 자금 등이었다. 이 각종 자금은, 토지 매입과 작농, 양잠 과원 축산 원예 등에 투자하는 한 편, 영세 생활자에게 저리 융자도 하여 증식하였으며, 처음에는 조합 본점을 총부에 두었으나, 그 업무량이 영광 지방에 많으므로, 원기 12년(1927·丁卯)에 본점을 영산에 두고 총부는 지점 형식으로 업무를 분담 운영하였다. 상조조합은 초기 회상의 금고역을 담당하였으며, 초창기 교단 경제의 발전에 큰 기반이 되었다. 한 편, 총부의 7부(部)중 하나로 예정된 농업부가 창립 총회 후에도 4·5인의 조합 작농으로 근근히 기초를 유지할 뿐 계속 미미 부진하더니, 원기 12년(1927·丁卯)에 송 만경의 제안으로 산업부 창립단을 조직하고, 오 창건 등 8인(별록10)의 발기인이 총지부 각단에 호소하여 영육 쌍전의 이념 구현을 위한 산업부 창립 자금의 확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 해에 송도성의 제안으로 육영부 창립단을 조직하고, 이 동안 등 7인(별록11)의 발기인이 총지부 각단에 호소하여 제생의세의 인재 양성을 위한 육영부 창립 자금의 확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발기인들을 비롯한 각처의 모든 단원은 혼연 일체가 되어, 이듬해(원기13·1928)에는 각각 기성창립연합단(農業部創立聯合團 人材養成創立聯合團)으로 발전, 두 기관의 창립을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한 바, 서울 단원들은 절용 절식 운동, 영광 단원들은 공동 작농, 익산 단원들은 공동 양잠, 각처 임원들은 근로 작업 등 특별한 활동으로 이에 합력하였다.
2. 공부·사업 고시법과 유공인 대우법
원기 10년(1925·乙丑) 8월에, 대종사, 학력 고시법을 발표하시니, 고시 과목은 수양 연구 취사의 3과(科)로 하고, 각 과목 안에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의 5개 반(班)을 두어, 공부인의 3과에 대한 실력을 개별 고시한 후, 그 실력에 따라 반별을 정하게 하시었다. 이어서 학위 등급법을 발표하시니, 공부인의 공부 등급으로 보통부 특신부 법마상전부 법강항마부 출가부 대각여래부 등 6급을 두고, 그 중간에 각 예비부를 두어 승급을 준비하게 하시며, 승급 조항의 조사 기간은 만 3개년씩으로 하고, 승급 때에는 승급 증서의 수여와 승급 의식의 거행으로 회상의 영광을 축하하게 하시었다. 대종사, 그 해(원기10·1925)에 또한 사업 고시법을 발표하시니, 고시 과목은 창립 요론 11개조(대종경교단품34)로써 하되, 매회 12년 기념 때에나, 유공인이 열반한 때에 그 조항으로써 축조 심사하여 회상 창립에 관한 모든 성적 등급을 정하게 하시었다. 사업 등급은 창립 제 1회(回)의 1등(4천원이상)을 기준하여, 2회는 그 배(倍)요, 3회는 또한 2회의 배로 정하고, 그 이하의 등수는 매등(每等)에 반액씩을 내려서 정하며, 성적 총계는 공부 등급을 환산한 액수와 사업 등급의 액수를 아울러 편성하되, 사업 성적은 정신 육신의 근로와 물질의 의연(義捐)과 특별 시상금을 총합하여 보게 하시고, 임원은 대소 계급을 막론하고 전무출신자로 실무를 잡게 하되, 그 성적을 사업액으로 계산하여 편입하게 하시었다. 원기 12년(1927·丁卯) 1월에, 대종사, 또한 새 회상의 유공인 대우법을 발표하시니, 그 유공 종별은 ①정남 정녀로 회상을 위하여 헌신 노력한 이, ②전무출신으로 회상을 위하여 헌신 노력한 이, ③재가 회원으로 회상을 위하여 공적이 있는 이, ④법강 항마부 이상에 승급한 자녀를 희사하여 희사위에 해당한 이 등 4종(種)으로 하고, 각각 성적의 등급과 경우를 따라, 노쇠한 때 봉양하는 법과, 열반한 때 상장(喪葬)하는 법과, 열반 후 기념하는 법 등을 정하시고, 또한 사당(祠堂)을 건설하여 영원히 후세의 추모를 받게 하는 규례를 정하시어, 일제히 시행하게 하시었다.
3. 의례 제도의 개혁과 4기념례
대종사, 당시의 예법이 너무나 번거하여 사람들의 생활에 많은 구속을 주고, 경제 방면에도 공연한 허비를 내어, 사회의 발전에 장해가 있음을 개탄하시어, 원기 11년(1926·丙寅) 2월에 신정 의례를 발표하시었다. ①출생의 예로는 입태 전후에 산모와 가권이 주의하는 법과, 산아 명명하고 출생 표기 세우는 법과, 축의 등을 저축하여 교육비에 충용하는 법 등을 정하시고, ②성년의 예로는 성년식 거행하는 법과, 성인으로 대우하는 법을 정하시고, ③혼인의 예로는 혼인 소개소 두는 법과, 약혼하는 법과, 새 식순에 의하여 결혼하는 법과, 절약된 금액으로 공익 사업 하는 법 등을 정하시었다. ④상장(喪葬)의 예로는 간략한 복표로 최고 49일 착복하는 법과, 새 식순에 의하여 출상(出喪)하는 법과, 절약된 금액으로 공익 사업 하는 법과, 풍수 명당설을 타파하고 공원 묘각(廟閣) 건설하는 법 등을 정하시고, ⑤제사의 예로는 장차 자녀와 은법 자녀가 동일한 기념주 되는 법과, 새 식순으로 기념하는 법과, 절약된 금액으로 공익 사업하는 법 등을 정하시어, 이해 있는 이들 부터 먼저 실행하라 하시었다. 이 해(원기11·1926)에, 대종사, 또한 새 회상의 4기념 예법(四紀念禮法)을 발표하시니, ①공동 생일 기념은, 회상의 생일과 교도들의 공동 생일을 한 날로 합동 기념하자는 것이요, ②명절 기념은 재래의 수 많은 명절들을 한 날로 교당에서 합동 기념하자는 것이요, ③공동 선조 기념은 부모 이상 선대의 모든 제사를 한 날로 공동 기념하자는 것이요, ④환세 기념은 새 해를 교당에서 공동 기념하자는 것인 바, 이 모든 법을 실행함으로써 절약된 금액으로 공익 사업을 하는 동시에 각자의 생활에도 도움을 얻자는 것으로, 이해 있는 이들 부터 먼저 실행하라 하시었다. 신정 예법을 발표하신 후, 출생의 예는 진안 노 덕송옥의 손자(金榮奉)와 대종사의 3남(朴光振) 출생 때에, 혼인의 예는 영광 김 광선의 장남(金洪哲)과 김 태상옥(金泰尙玉)의 장녀(李普應華) 결혼 때와, 송 벽조의 차남(宋道性)과 대종사의 장녀(朴吉善) 결혼 때에, 상장의 예는 김제 서 동풍의 열반 때에, 제사의 예는 전 음광의 부친 제사 때에 각각 먼저 단행하였으며, 4기념 예법 또한 모든 인심이 아직도 번문 욕례(繁文縟禮)와 미신 풍속에 깊이 쩌려 있는 때, 각 교당 신자들이 서로 앞장서서 이를 먼저 실행함으로써, 새 세상 건설 대업에 다 같이 거룩한 선행자가 되었다.
4. 제 1대 제 1회 기념 총회
원기 13년(1928·戊辰) 3월 26일은 제 1대 제 1회 기념일에 정기 총회를 겸한 날이었다. 총회 준비를 위하여 연초부터 송 규 등 5인(별록12)이 창립 12년 간의 사업 보고서와 각 교도의 공부 사업 성적을 사정 편성하였고, 당일 총회는 송 만경의 개회사로 시작하여, 12년간의 사업 보고·역사 보고를 마친 후, 2대 회장에 조 송광(曺頌廣)을 선정하고, 각급 임원을 선임하였으며, 산업부 창립단과 육영부 창립단의 상황 보고 후 폐회 하였다. 27일 오전에는 사업 각등 유공인과 10년 이상 전무출신자 등 각항 유공인들의 기념 촬영을 하고, 오후에는 대종사 주재 아래 제 1회 사업 성적표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대종사께서는 [선진 후진이 서로 공덕을 알아 업어서라도 받들고 영접하여, 교운이 한 없이 융창하고 그대들의 공덕도 한 없이 유전되게 하라]는 간곡한 부촉을 하시었다. 제 1회 1등 유공인은 이 청춘·이 동진화·서 중안·전 삼삼·김 광선 등 5인, 2등 유공인은 김 기천·이 공주 등 2인, 3등 유공인은 이 재철·송 벽조·유 정천·송 규 등 4인, 4등 유공인은 박 사시화 등 11인(별록13), 5등 유공인은 박 세철 등 13인(별록14)으로 5등 이상 입등인이 도합 35인이요, 6등에서 12등 유공인이 278인이었다. 28일에는, 또한 대종사 주재 아래 예비 특신부 이상 승급자 68인에 대한 새 회상의 첫 승급 예식을 거행하니, 정식 법강항마부에 사후 승급으로 박 세철·서 동풍, 정식 특신부에 송 벽조 등 6인(별록15), 예비 특신부에 이 춘풍 등 60인(별록16)이었다. 제 1회 기념 총회 당년의 교세 개요를 보면, 교도 상황은, 영광·익산·서울·김제·부안·진안 등 각지를 통하여 남자 176명, 여자 262명으로 총 438명이었고, 전무출신은 20여명으로 영광·익산·서울 등지를 통하여 임원 혹은 산업부원으로 노력 중이었으며, 재산 상황은 익산 총부·영광 지부·신흥 출장소·부안 수양소·경성 출장소 등의 토지·건물·집기 등(3만3천1백9십원여)과, 상조조합에 출자금(5백여원)·저축금(2천여원) 등이 있었다.
제3장 교단체제(敎團體制)의 형성(形成)
1. 교화 기관지의 발행
제 1회 기념 총회(원기13년3월)를 마치고 제 2회에 접어 들면서 새 회상이 먼저 착수한 중요한 일은 교화 기관지의 발행이었다. 원기 13년(1928·戊辰) 5월에 월간(月刊) [월말통신(月末通信)]이 송 도성(硏究部書記) 주간(主幹)으로 창간되어 복사판으로 34호(원기15년 12월호)까지 발행하다가, 교서 편찬 등 사무 관계로 부득이 한 동안 중단되었으며, 원기 17년(1932·壬申) 4월에 복간, [월보(月報)]로 개제하여, 전 음광(硏究部長) 주간 아래 등사판으로 48호(원기18년 6월호) 까지 발행하다가, 출판법 관계로 적발되어 48호 전부를 일경(日警)에게 압수 당하고 폐간 되었다. 원기 18년(1933·癸酉) 9월, 총독부 당국의 정식 허가를 얻어, 월간 [회보(會報)](全飮光주간)를 창간, 등사판 발행을 계속하다가, 원기 19년(1934·甲戌) 12월호(會報13호)부터 이 공주(通信部長) 주간으로 인쇄판을 발행, 점차 부수가 증가되었으나, 25년(1940·庚辰) 제 2차 세계 대전이 급박해지면서 계간으로 바꾸었다가, 26년(1941·辛巳) 1월, 통권(通卷) 65호를 마지막으로 마침내 휴간하였다. [월말 통신(月末通信)]은 당시 몇 개소의 지방 교당에 법설 요지와 총부 전달 사항 및 교단 소식을 주로 보도하였고, [월보]와 등사판 [회보]는 거기에 의견 교환의 역할도 겸하였으며, 인쇄판 [회보]는 차차 교화와 문화 기능도 겸하게 되어, 일정(日政) 압제 아래 유일한 문화 활동의 명맥이 되었고, 법설 기재와 감각·감상·의견·처리·문목건 등의 제출이 많이 권장되어, 초기 교단의 정신적 유산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2. 초기 교서들의 발간
제 1회 기념 총회(원기13년3월) 이후 교단이 진행한 중요 사업의 또 하나는 초기 교서들의 편집 발간과 [회규]의 개정 시행이었다. 이미 간행된 첫 교서로 [취지규약서]와 [수양 연구 요론]이 있으나, 다 교리의 원강(元綱)이 두루 밝혀지지 못하였을 뿐더러, 제도 조직도 교세의 발전을 유감 없이 뒷받침하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원기 15년(1930·庚午)부터 대종사 몇 몇 제자(별록17)에게 그 동안 편편으로 제정 발표하신 교리 제도의 강령들을 정리 편집케 하신 후, 친감(親鑑)을 거쳐 이를 차례로 발간하시니, 원기 16년(1931·辛未) 7월에는 [불법연구회 통치조단 규약]이, 17년(1932·壬申) 4월에는 [보경 육대요령(寶經六大要領)]이 발간되었고, 19년(1934·甲戌) 5월에는 개정판 [불법연구회 회규]가, 그 해 12월에는 [보경 삼대요령(寶經三大要領)]이 발간 되었으며, 20년(1935·乙亥) 4월에는 과거 봉래산에서 초안하신 [조선불교 혁신론]이, 그 해 8월에는 [예전(禮典)]이 발간되었고, 21년(1936·丙子)에는 [회원수지(會員須知)]와 [불법연구회 약보]가, 24년(1939·己卯)에는 [불법연구회 근행법]이 각각 발간되었으며, 25년(1940·庚辰)에는 새 회가와 찬불가·찬송가 등이 제정 발표되어, 창립 제 2회 12년 간은 가위 초기 교서 편집 발간의 황금 시기를 이루었다. [통치 조단 규약]은, 총론에서 조단의 대지를 말하고, 총칙·남녀 구별의 조직·수위단의 조직과 선거 방식·각단의 조직·회의·상벌 등을 밝힌 후, 세칙으로 일기 조사법 등을 밝혔다. [육대요령]은 권두에 개교 표어·교리도·총론을 싣고, 제 1장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제 2장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제 3장 훈련편·제 4장 학력 고시편·제 5장 학위 등급편·제 6장 사업 고시편 등으로 편찬되어 있다. 개정판 [회규]는 다음 절에 설명할 바와 같고, [삼대요령]은 육대요령 가운데 제 3장 까지가 촬요 편찬된 바, 심고와 기도에 대한 설명이 제 1장 끝에 들어 있다. [조선불교 혁신론]은 총론에 혁신의 대요를 밝히고, 과거 조선 사회의 불법에 대한 견해·조선 승려의 실생활·세존의 지혜와 능력·외방의 불교를 조선의 불교로·소수인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분열된 교화 과목을 통일하기로·등상불 숭배를 불성 일원상(佛性一圓相)으로 등 7개 장(章)으로 편찬된 바, 일원상 신앙법과 일원상 조성법이 비로소 나타나 있다. [예전]은 총론에서 신정 의례의 대요를 밝히고, 제 1편 출생례·제 2편 성년례·제 3편 혼례·제 4편 상장례(喪葬禮)·제 5편 제례(祭禮)·제 6편 유공인 상장례(有功人喪葬禮)·제 7편 4기념례·제 8편 학위 승급례·제 9편 설법례 등으로 되어 있고, [회원수지]·[약보]·[근행법]등은 다른 모든 교서 중에서 발췌 편찬한 작은 책자들이다.
3. 각 조단의 정비와 새 회규의 시행
[단규]로 알려진 [불법연구회 통치조단 규약]이 발간된 것은 원기 16년(1931·辛未) 7월이었으나, 그 원칙과 세칙 초안을 대종사께서 친감 완정하신 것은 그 해 초였다. 2월에, 대종사 친히 각급 조단에 착수하시어, 그 동안 경우에 따라 남녀 합동으로 조직하였던 각급단을 다 남녀 구분으로 조직하시고, 남자 수위단원 중 실무 불능한 3명의 대리를 확정하시는 동시에, 여자 수위단 시보단을 내정하시며, 갑·을·병 3종의 예비 수위단을 각 1단씩 조직하시는 동시에, 산업·육영 두 창립단도 남녀를 구분하여 조직하시었다. 한 편, 그 해(원기 16·1931) 3월 26일에는, 대종사, 제 2차 법위 승급자를 발표하시니, 예비 법마상전부에 송 도성·김 기천·전 음광·송 규·이 동진화·이 공주·송 벽조 등 7인이었고, 총지부를 망라하여 정식 특신부가 문 정규 등 54인(별록18), 예비 특신부가 양 하운 등 48인(별록19)이었다. 또한, 새 [회규] 제정에 앞서 이미 입법된 주요 법규는, 원기 12년(1927·丁卯) 2월에 신분 검사법, 14년(1929·己巳) 4월에 은부모 시자녀법, 16년(1931·辛未) 3월에 임원 등급 및 용금 제도, 18년(1933·癸酉)에 정남 정녀에 관한 종법사 명령과 간이 일기법 등이 있어 시행되었다. 그 중 특히 신분 검사법은, 당연 등급 각 조항과 부당 등급 각 조항을 자기가 검사하여, 선악의 근성과 죄복의 요소가 어느 정도에 있는가를 스스로 비판하며, 혜수·혜시와 대부·차용을 자기가 검사하여, 복록과 부채가 어느 정도에 있는가를 스스로 알게 하여, 기질 변화와 복록 저축을 스스로 촉진하고, 회상의 인재 선택에도 도움을 얻기 위한 법으로, 연중 1차씩 행하게 하시었고, 은부모 시자녀 법은 교도간에 특별한 은의로 공부 사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은부자 은모녀의 의를 맺는 것인 바, 이 법의 시행으로 이 무렵(원기14~15)에 대종사를 비롯한 회상 원로 요인들과 후진 청년들 사이에 은부자 은모녀의 결의가 상당히 많았다. 앞 절(본장 2절)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창립 총회(원기9년4월)에서 채택한 [회규]는 시대의 추이와 교세의 발전에 따라 그 개정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원기 18년(1933·癸酉)부터 대종사께서 송 규에게 명하여 [회규]의 개정 작업을 진행케 하시더니, 드디어 19년(1934·甲戌) 3월, 총대회의 찬성을 얻어, 그 동안 시행 해온 총재·회장 아래 7부제로 된 회규를 대폭 개정하여, 종법사·회장 아래 이원 십부제(二院十部制)를 골자로 하는 총 9장 29조의 원칙(原則)과 총 12장 75조의 세칙(細則)으로 된 새 회규를 제정 시행하게 되었다. 이는 실로 새 회상이 교단의 새 체제를 형성하게 된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총재라 칭하여 오던 회상의 최고 직위를 종법사라 하게 되었고, 그 아래, 회장과 2원(院) 10부(部)를 두어 회무를 분장하되, 교정원에 교무·연구·통신·감사 4부를 두어 공부계의 모든 사무를 총관하게 하고, 서정원에 서무·상조·산업·공익·육영·공급 6부를 두어 사업계의 모든 사무를 총관하게 하였으며, 총대회를 대의 기관으로 두고, 회원은 통상 회원·특별 회원 2종으로 하되, 의무를 지키지 않는 신도 제도를 두었으며, 지방에는 지부와 출장소를 두고, 중앙에 입법 위원회를 두어 규약의 실행 장려와 감시 독려를 하게 하였다. 이 때, 종법사에 대종사, 회장에 조 송광이 유임되고, 초대 교정원장에 송 규, 초대 서정원장에 이 재철이 선임되었으며, 원기 22년(1937·丁丑)에 3대 회장에 이 용광(李庸廣), 2대 교정원장에 송 도성이 선임되었다.
4. 일원상 봉안과 교무의 훈련
원기 20년(1935·乙亥) 4월에 익산 총부 대각전이 준공되고, 그 정면 불단에 심불 일원상(心佛一圓相)이 정식으로 봉안되니, 이는 새 회상이 신앙의 체계를 확립하여 종교의 체제를 완전히 갖춘 또 하나의 중대한 사실이었다. 대종사 대각 직후 일원 대도의 제일성을 발하시고, 원기(圓機)·일원(一圓) 등의 어귀(語句) 사용과 함께 일원상을 그려 보신 바도 있었으며, 교법을 제정하실 때, 사은 곧 일원(四恩卽一圓)의 신앙법을 꾸준히 구상은 해 오시었으나, 이에 이르러 비로소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확정 시행하신 것이다. 이어서 이듬해(원기21·1936) 9월에 초량 교당, 12월에 영산 대각전과 신흥 교당, 그 이듬해(원기22·1937) 3월에 용신 교당과 원평 교당을 신축하면서 다 일제히 불단을 마련하고 일원상을 봉안하였으며, 뒤이어, 모든 교당도 일제히 불단을 신설하여 일원상을 봉안하게 하시는 동시에, 혹은 설법 혹은 법문으로 일원의 종지를 더욱 천명해 오시다가, 원기 23년(1938·戊寅) 11월 동선에는 심불 일원상 봉안법을 정식으로 제정하여 선포하시고, [심불 일원상 내역급 서원문]을 친제 발표하시었다. 이리하여 일원상은 새 회상의 최고 종지로서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이 되었으며, 그 봉안은 교당 뿐 아니라 교도 가정에도 적극 권장하여, 원기 25년도(1940·庚辰)의 각지 심불 봉안 실시 상황을 보면, 13개 지방을 통하여 180가정이 일원상을 봉안하였다. 한편, 원기 23년(1938·戊寅) 11월 21일에는 새 회상 처음으로 교무 강습회(교감柳虛一)를 개최하고 각 지방 교무를 총부에 소집하여, 대종사 친히 설법하시는 아래 40일간의 교리 훈련을 실시하시니, 이것이 새 회상 교무 훈련의 효시가 되었다. 창립 후 지부 교당이 늘어남을 따라 교무의 수효도 점차 불어났으나, 당시의 교무들은 일정한 훈련 기간을 거침이 없이 일선 교화에 나서게 되었으므로 통일적 교화를 실시하는데 아쉬움이 적지 않던 바, 이에 이르러 교리가 새롭게 이해되고, 모든 법도가 고루 단련되어 통제 있는 대중 교화에 새로운 기틀을 잡게 되었다. 또한, 교도는 매인 아래 9인 이상을 인도하여 입교하게 하자는 연원 의무 실행을 적극 권장하기 위하여, 원기 21년도(1936·丙子)에는 교무부에 연원부를 비치하고 일반 회원의 포교 활동을 장려한 바, 원기 23년도(1938·戊寅) 말에는 최고 이행자 박 사시화(364명)를 비롯하여 각 지방의 연원 의무 이행자 수가 96명에 달하였다.
5. 산업부의 발전과 산업 기관 창설
원기 12년(1927·丁卯)에 발족한 산업부 창립단은 꾸준히 기금 조성에 노력하여 오다가, 원기 13년(1928·戊辰) 10월에 박 대완(朴大完)의 의견을 받아 들여 총부앞(現大覺殿貞和院間)에 복숭아 과수원을 시작하여 좋은 성과를 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진안 만덕산에 4천 여주의 감 과수원, 황등(益山郡黃登面)에 2천 4백주와 총부 뒤 알봉(謁峰)에 7백주의 밤 과수원, 총부 부근(現圓光大學敷地一部)에 1천 여주와 영산 교당 앞에 1천 여주의 복숭아 과수원, 신흥 교당 부근 이흥(驪興)에 2천 여주의 종합 과수원이 창설되었고, 21년(1936·丙子)에는 산업부의 가옥을 독립 신축하고, 각종 묘목·약초·야채의 재배와 양계·양돈·양토(養兎) 등을 병행하여 큰 성과를 보게 되었다. 또한 22년(1937·丁丑) 9월에는 산업부의 양계를 대폭 확장하여 총 18간(間)의 계사(鷄舍)를 신축하였고, 생산된 계란은 멀리 만주에 까지 대량 수출하여 새 회상 산업 활동의 기세를 올렸다. 한 편, 원기 19년(1934·甲戌) 8월에는 이리에 보화당 한약방을 합자 회사 형식으로 창설하니, 이것이 후일 새 회상 수익 기관의 으뜸을 이루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이는 대종사께서 앞으로 교단 자선 병원(慈善病院이름濟衆院)의 설립 기금과 교화 교육 사업의 기금을 마련하실 뜻으로 설립하신 것인 바, 그 동안 신정 예법의 실행에 의하여 저축된 총지부 일반 교도의 공익금(公益金1만원)을 총 투자하였으며, 대표 이사 이 재철(庶政院長겸임)과 첫 실무 임원(이사 李東安 의사 朴理碩)이 그 발전의 기반을 다졌다. 또한, 원기 25년(1940·庚辰) 2월에는 삼례수계리(三禮岫溪里)에 임야 7만평을 사들여 삼례 과수원을 창설하니, 자본금은 각 지부 출장소의 유지비 자금(維持費資金7천여원)을 수합 투자하였으며, 초대 감독에 이 동안(産業部長겸임)이 발령되고, 첫 실무 임원(주무 金碩奎 기사 丁一持)이 파견되어 황도(黃桃)를 주로 하는 종합 과수원을 시작하였다. 삼례 과수원은 그 후 삼창과원(三昌果園)·수계 농원(岫溪農園)·은산재단 수계농원 등으로 개칭되면서 주로 새 회상 기본 인재 양성의 산업 도량으로 발전하였다.
6. 제 2회의 교세와 사회 여론
원기 25년(1940·庚辰) 4월은 창립 제 1대 제 2회의 결산 총회기에 해당하였으나, 시국 관계로 기념 행사는 일체 갖지 못하고 정례 총회에 지방 회원의 교리 강연회를 처음 겸행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당년도 말 사업 보고에 의하면 교도 수는 특별 회원 871명, 통상 회원 5,083명, 합계 5,954명이었고, 전무출신은 80여명이었으며, 교당 수는 제 1회(원기13년3월) 이전에 설립된 영산·익산·서울·신흥과, 원기 14년(1929·己巳)에 마령, 15년에 좌포·원평, 16년에 하단, 19년에 남부민, 20년(1935·乙亥)에 전주·대판(日本 大阪), 21년에 관촌·초량, 22년에 대마·신하·용신·개성, 23년에 남원·이리, 24년에 운봉·화해 등 교당이 차례로 설립되어 도합 21개소가 되었고, 당년(원기25·1940)에 대덕·호곡 등 교당이 신설되었다. 그 중 특히 일본 대판에 교당이 설립되어 초대 교무 박 대완이 부임한 일은 새 회상 해외 포교의 효시이며, 원기 22년(1937·丁丑)에 신 영기(申永基)는 총부 사무실을 희사하고, 25년(1940·庚辰)에 몇 몇 특지가(별록20)는 총부 도서실을 마련, 총부의 면모를 향상시켰다. 한 편, 새 회상 공개 이후, 일반 사회의 여론은 한결 같이 우호적이고 고무적이었다. 그 중 중요한 몇 가지를 들면, 원기 13년(1928·戊辰) 11월 25일자 동아일보가 [세상 풍진 벗어나서 담호반(淡湖畔)의 이상적 생활, 정신 수양·사리 연구·작업 취사의 강령하에 움직이는 4백 회원, 익산 불법연구회의 특별한 시설]이라는 제목으로 새 회상 탐방 기사를 낸 후, 19년(1934·甲戌) 5월 28일자 일본의 대판 조일신문이 [불교의 진리에 입각, 근검 역행을 실천, 동지 5백이 공동 생활을 하는 반도의 새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새 회상을 소개하였다. 20년(1935·乙亥) 7월에 조선 총독부가 발간한 조사자료 제 42집에는 [본회는 대체로 미신을 타파하고 자연의 원리에 바탕하여, 민중의 근면을 장려한 바 있어 종교적 진흥회로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평하고, 그 자료 [전선 교별 영향표]에는 [계몽상 좋은 영향 있다. 근로 정신을 양성하고, 일면, 실지 작업으로써 일반에게 범(範)을 보인다]고 되어 있다. 원기 21년(1936·丙子)에는 민족 지도자 안 도산(島山安昌浩)이 총부에 내방하여 찬양과 격려(대종경실시품45)를 아끼지 않았고, 22년(1937·丁丑)에 조광 6월호가 인식 부족한 비방 기사를 실었다가 다음 호에 찬양 기사를 낸 후, 그 달부터 매일신보·조선일보·중앙일보와, 26년(1941·辛巳)에 경성일보 등이 각각 수일 간에 연재 기사로 새 회상의 심전 계발 운동·종교 혁신 운동·문자 보급 운동·종교 생활화 운동을 대대적으로 찬양 보도하여, 창립기 새회상의 발전을 알뜰히 격려하고 그 참 면목을 일반 사회에 널리 인식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