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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3일 (목) 19:55 기준 최신판

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全文제1편 개벽(開闢)의 여명(黎明)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제3편 성업(聖業)의 결실(結實)

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全文

제1편 개벽(開闢)의 여명(黎明)

제1장 동방(東方)의 새 불토(佛土)

1. 서설

일찌기 정산 종사(鼎山宗師)는 새 회상의 창건사 서문에 쓰시기를 「역사는 세상의 거울이라 하였나니,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일의 흥망 성쇠가 다 이 역사에 나타나는 까닭이니라. 그러나, 역사를 보는 이가 다만 문자에 의지하여 지명(地名)이나 인명(人名)이나 연대(年代)만 보고 잘 기억하는 것으로 능히 역사의 진면(眞面)을 다 알았다고 할 수 없나니,반드시 그 때의 대세와, 그 주인공의 심경과, 그 법도(法度) 조직과, 그 실행 경로를 잘 해득하여야만 능히 역사의 진면을 볼 수 있고, 내외를 다 비치는 거울이 될 것이니라. 그런즉 우리 회상은 과연 어떠한 사명을 가졌으며, 시대는 과연 어떠한 시대이며, 대종사(大宗師)는 과연 어떠한 성인이시며, 법은 과연 어떠한 법이며, 실행 경로는 과연 어떻게 되었으며, 미래에는 과연 어떻게 결실될 것인가를 잘 연구하여야 할 것이니라」하시었다.

이에 따라, 이 교사는 먼저 동방의 새 불토인 한반도의 내력과, 선지자들의 자취와, 말세 말법의 현상을 대략 더듬고, 창건사에 의하여, 새 부처님 대종사의 출세기연(出世機緣)과, 성도 경로(成道經路)를 기술한 다음, 제생 의세의 크신 경륜 아래 첫 교화를 베푸시고 회상 건설을 정초(定礎)하시며, 새 교법을 초안하신 후, 새 회상의 창립을 공개하신 경로를 살폈다. 대종사께서 교법과 교제(敎制)를 정비하신 후 열반하시매, 정산 종사께서 시국의 만난(萬難)중에 법등(法燈)을 이어, 교단 체제를 형성 완비하시며, 보본 사업(報本事業)을 주재(主宰)하시며, 모든 목표사업 기관을 확립하시며, 교전의 편수, 삼동윤리의 선포 등으로 일원 세계 건설의 터전을 다지신 경과를 살피고, 정산 종사 열반 후 교헌에 따라 대산(大山)종법사를 추대하고, 대중이 합력하여, 교전 교서의 결집 발간, 법위 향상 운동, 종협 참여, 해외 포교, 제2차 보본 사업, 반백년 기념대회 등으로 결실의 성업에 정진한 개교 반백년 동안의 대체 과정(大體過程)을 살폈다. 우리는 이로써, 대종사께서 일찌기 예시 하신 사 오십 년 결실(四五十年結實)의 자취를 대관(大觀)하고, 사 오백 년 결복(四五百年結福) 향한 앞으로의 무궁한 전진에 반조하는 거울을 삼게 될 것이다.

2. 한민족과 한반도

하늘의 자손임을 믿는 인류의 한 갈래가 밝음의 근원을 찾아 동으로 동으로 옮겨 와서 극동의 한 반도에 정착하니 이것이 한민족이라 한다. 한민족은 대략 반만년 전에 이미 나라를 세우고, 아름다운 강산, 알맞은 기후와, 기름진 풍토, 넉넉한 물산에 의좋게 살면서 슬기로운 문화를 한반도에 이룩하여 왔다. 밝음을 숭배하고 예의를 숭상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한민족의 나라는, 이웃 나라들로 부터 예의 동방 군자국이라는 기림을 받았으며, 부당한 침략을 용감히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일찌기 한 번도 이웃을 침략하는 부당한 싸움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하나라는 뜻과 크다는 뜻을 겸하여 갖춘 「한」민족 가운데, 대대로 신령한 인물들이 이어 나왔지마는, 시대의 대운이 하나의 세계로 향하여 크게 열리는 새 세상 개벽의 여명에 도덕으로 천하를 한 집안 삼을 큰 주세 성자가 한민족 가운데서 출현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지도상의 한반도는 아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북으로 부터 남을 향하여 뻗어 내려, 양대륙이 좌우에서 감싸고 있으니, 이는 마치 세계의 추기(樞機)를 이룰 지형이며, 삼면 바다 일면 대륙에 연결된 그 위치는 세계의 문호가 됨직하다. 더구나 금강산은 천하의 명산이라, 대종사께서 「이 산은 장차 세계의 공원이 될 것이라. ···이 나라는 금강산으로 인하여 세계에 크게 드러나리라」하셨을 뿐더러, 일찍부터 금강산에 얽혀 온 불가(佛家)의 여러 인연 설화들은, 다 고요한 아침 나라 한반도가 장차 동방의 새 불토로 무궁한 영광을 길이 누릴 것을 예시하여 왔다.

3. 한반도의 종교

아득한 옛날 부터 한민족도 숱한 신앙을 가졌겠지마는, 역사의 첫 장을 넘기게 되는 때에는 이미 태양 숭배를 알맹이로 하는 민족적 종교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반도 고유의 신앙이다. 그 후 대륙과의 교통이 활발해 지면서 불교가 들어 오고, 유교·도교가 들어 와서, 서로 공존도 하고 배척도 하는 가운데, 각각 그 시대의 정신계를 지배하였고, 이웃 나라의 문화에 까지 적지 않은 이바지를 하였으며, 회회교도 전래된 흔적이 있으나 희미해 졌다.

근세에 이르러 개화의 물결을 타고 기독교가 서양에서 들어 왔으며,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개탄하고 무기력해진 유·불·선 삼교(儒佛仙三敎)의 총화를 이루어, 서교(西敎)에 대응하면서, 보국 안민(輔國安民) 광제 창생(廣濟蒼生) 하기를 주장하는 동학(東學)이 일어나고, 동학이 여러 가지 변모와 분파를 이루면서 특히 호남을 중심으로 펴지는 가운데 증산교(甑山敎)가 일어나, 동학과 쌍벽을 이룸으로써, 한반도에는 고유의 민간 신앙에 전래(傳來)의 비결들을 결부시켜 개벽의 대운을 기다리는 수 많은 신생 종파가 뒤를 이어 일어 났다.

4. 선지자들의 자취

서가모니 불께서 정법(正法).상법(像法).계법(季法)을 말씀하시고 여래 멸후 후 오백년을 말씀하시어, 삼시(三時) 또는 오시(五時)로 불법의 성쇠와 재흥(再興)을 예언하신 것이나, 미륵 보살을 당래 교주로 수기(授記)하신 것 등은 다 불문에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 중 특히 한반도에서, 금강산이 법기 도량(法起 道場)으로, 이 나라가 불국 연토(佛國緣土)로 믿어져 온 것은, 미륵불을 기다리는 신앙 행사가 다른 어느 지역에서 보다 성행하였던 사실과 더불어 주목할 일이다. 이는 실로 이 땅 불문의 선지자들이 한반도가 장차 새 불토로 될 것을 예견하고, 민중의 마음 속에 그 믿음을 뿌리 깊이 심어 준 것이다.

그 후, 한반도에는 유명 무명의 많은 선지자들이, 혹은 비결로, 혹은 도참(圖讖)으로, 혹은 가요로, 미래의 조선이 세계가 우러르는 거룩한 국토로 된다는 신념을 더욱 고취하였고, 원기 전(圓紀前) 50년 대(1860~1864)에 동학의 최 수운(崔水雲 名濟愚)은 후천의 개벽을 외치면서 「유도(儒道)·불도(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運)이 역시 다했던가. ···만고(萬古) 없는 무극 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 ···운수(運數) 있는 그 사람은 차차 차차 받아다가 차차 차차 가르치니 나 없어도 다행일세」라 하였으며, 원기 전 10년대(1900~1909)에 강 증산(姜甑山 名一淳)은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라」고 말하고, 「예수교도는 예수의 재강림을 기다리고, 불교도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동학 신도는 최 수운의 갱생을 기다리나니, 누구든지 한 사람만 나오면 각기 저의 스승이라 하여 따르리라」고 말하여, 이 땅에 새 세상의 주세 성자가 뒤이어 출세하여 새 세상의 큰 회상을 건설할 것임을 밝히 예언하였다.

5. 일대전환의 시대

대종사께서 이 세상에 오신 시대는 인류 역사상 일찌기 없었던 큰 격동의 시대요 일대 전환의 시대였다. 19세기 말엽부터 밖으로는 열강 여러 나라의 침략 주의가 기세를 올려, 마침내 세계 동란의 기운이 감돌았고, 급속한 과학 문명의 발달은 인류의 정신 세력이 그 주체를 잃게 하였다. 안으로 한국의 국정은 극도로 피폐되고, 외세의 침범으로 국가의 존망이 경각에 달려 있었으며, 수백년 내려 온 불합리한 차별 제도 아래서 수탈과 탄압에 시달린 민중은 도탄에 빠져 있는 가운데, 개화의 틈을 타서 재빠르게 밀려 든 서양의 물질 문명은 도덕의 타락과 사회의 혼란을 가중 시켜 말세의 위기를 더욱 실감하게 하였다.

당시의 일대 위기를, 후일, 대종사께서는 [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사람이 사용하여야 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 고해가 없으리요] 라고 개교의 동기 설명에 요약하여 개탄하시고, 「이제 부터는 묵은 세상을 새 세상으로 건설하게」 된다고 말씀하시었다.

6. 말법현상과 구주출세

당시 한반도의 종교계 또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니, 고유의 신앙과 유·불·선 삼교는, 혹은 무당들의 미신 무대로 화하고, 혹은 유교의 세력에 밀려 산중에 숨어 들었으며, 혹은 허례와 공론으로 형식만 남게 되고, 혹은 일 없는 이의 양생술로 그림자만 남았으며, 서교(西敎)는 숱한 박해를 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고, 동학은 갖은 경난(經難)끝에 숨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 밖의 여러 교파들은 혹세 무민으로 민심의 혼란에 부채질을 더할 따름이었다. 이에 따라, 민중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으로써, 새 성자에 의한 새 사상 새 종교를 더욱 기다리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구원 겁래의 크신 서원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신 것이다.

후일 정산 종사는 대종사의 성비(聖碑)에 쓰시기를 「대범, 천지에는 사시가 순환하고 일월이 대명(代明)하므로 만물이 그 생성의 도(道)를 얻게 되고, 세상에는 불불(佛佛)이 계세(繼世)하고 성성(聖聖)이 상전(相傳)하므로 중생이 그 제도(濟度)의 은(恩)을 입게 되나니, 이는 우주 자연의 정칙(定則)이다」 하시고, 「옛날 영산 회상이 열린 후, 정법과 상법을 지내고 계법 시대에 들어 와서, 바른 도가 행하지 못하고 삿된 법이 세상에 편만하며, 정신이 세력을 잃고 물질이 천하를 지배하여 생령의 고해가 날로 증심 하였나니, 이것이 곧 대종사께서 다시 이 세상에 출현하시게 된 기연이다」 라고 밝히시어, 대종사께서는 새 세상의 주세불로 이 땅에 다시 오시었고, 새 부처님께서 세우신 새 회상은 새 세상의 주세 회상임을 분명히 하여 주시었다.

제2장 소태산 대종사(少太山大宗師)

1. 대종사의 탄생과 유시

대종사의 성(姓)은 박(朴)씨요, 이름은 중빈(重彬)이시요, 호(號)는 소태산(少太山)이시니, 원기 전(圓紀前) 25년(1891·辛卯) 음 3월 27일에 한반도의 서남 해변, 전라 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全羅南道 靈光郡 白岫面 吉龍里) 영촌(永村)에서 탄생하시어, 이웃 마을 구호동(九號洞)에서 성장하시었다. 부친은 박 회경(法名晦傾 字成三)이시요, 모친은 유 정천(江陵劉氏 法名正天)이시며, 신라 시조왕 박 혁거세(新羅始祖王朴赫居世)의 후예이시다. 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이시니, 신라 밀성 대군(景明王長子密成大君)에 의하여 본(本)을 얻었고, 그 후,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에 세거(世居)하다가, 대종사의 7대조 때 영광군에 이거하였으며, 처음에는 군서면 마읍리에 거주하다가, 대종사 탄생 전 7년(1884·甲申) 길룡리로 이사하시었다. 부친은, 가난하여 학문은 없었으나, 천성이 명민하여 평생에 사람들의 경모함을 받았고, 모친은, 천성이 인후하여 이웃에서 항상 덕인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대종사는 그 3남이시었다.

대종사, 어려서 부터 기상이 늠름하시고 도량이 활달하시며, 모든 사물을 대함에 주의하는 천성이 있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함을 항상 범연히 아니하시며, 매양 어른들을 좇아 그 모든 언행에 묻기를 좋아 하시며, 남과의 약속에 한번 하기로 한 일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실행하시었다. 어리신 때에 마을 앞 개울 가에서 큰 뱀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그를 쫓으신 일과, 4세 때 부친과의 약속을 지켜 동학군 왔다는 경보로 부친을 크게 놀라게 하신 일과, 10세 때 한문 서당 선생과의 약속을 지켜 그 날 해 전에 화재(火災)로 그를 크게 놀라게 하신 일 등은, 대종사의 비범한 성격 일단을 보이는 일화들로서 당시 참견한 여러 사람은, 혹은 장차 큰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고 비방도 하고, 혹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찬탄도 하였다.

2. 대종사의 발심

대종사, 7세 되시던 해, 어느 날, 화창한 하늘에 한 점 구름이 없고, 사방 산천에 맑은 기운이 충만함을 보시다가, 문득 「저 하늘은 얼마나 높고 큰 것이며, 어찌하여 저렇게 깨끗하게 보이는고」 하는 의심이 일어 나고, 뒤를 이어 「저와 같이 깨끗한 하늘에서 우연히 바람이 일고 구름이 일어나니, 그 바람과 구름은 또한 어떻게 일어 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일어났다.

이러한 의심이 시작됨을 따라 모든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 나서, 9세 때 부터는 나를 생각한즉 내가 스스로 의심이 되고, 부모와 형제간을 생각한즉 부모와 형제간 되는 일이 의심이 되고, 물건을 생각한즉 물건이 또한 의심이 되고, 주야가 변천하는 것을 생각한즉 그것이 또한 의심이 되어, 이 의심 저 의심이 한 가지로 대종사를 답답하게 하였다.

그 후 10세 때 부터 부모의 명에 의하여 겉으로는 비록 한문 서당에 다니시었으나, 글 배우는 데에는 뜻이 적으시며, 의복·음식·유희 등에는 조금도 생각이 없으시고, 오직 이 수 많은 의심을 풀어 알고자 하는 한 생각으로 마음이 차 있었다.

3. 대종사의 구도

대종사, 한번 의심을 발하신 후로는 날이 갈수록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하시어, 밤 낮으로 오직 소원 성취의 길을 찾기에 노심(勞心)하시더니, 11세 때 마읍리 선산 묘제(先山墓祭)에 참례하셨다가, 산신을 먼저 제사하고 선조를 뒤에 제사함을 보시고 친족 중 한 사람에게 그 연유를 물어, 산신은 크게 신령하다 함을 들으시고는 나의 이 모든 의심을 산신에게 물으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어, 그 날 부터 내심(內心)에 산신을 만나기로 작정하시었다.

그 후로는, 매일 산중을 더듬어 산과(山果)를 거두시며, 혹 정한 음식을 보시면 그것을 가지고 마을 뒷산 「삼밭재」에 오르시어, 「마당바위」라는 바위 위에 제물을 진설하시고, 전후 사방을 향하여 종일토록 예배하시다가, 해 진 후에야 귀가하시기를 매일 과정으로 하시되, 혹은 그 곳에서 밤을 지내기도 하고, 혹은 비가 오고 눈이 와도 하루도 빠짐 없이 5년 간을 일관하시었으며, 처음에는 부모 모르게 그 일을 시작하시었으나, 마침내 모친께서 알으시고 그 정성에 감동하여 많은 후원을 하시었다.

대종사, 15세 때에 부모의 명에 의하여 면내 홍곡리의 규수 양 하운(濟州梁氏 法名夏雲)과 결혼하시고, 16세 되시던 정월, 환세 인사 차로 처가에 가셨다가, 마침 마을 사람이 고대 소설(朴太溥傳 趙雄傳등) 읽는 것을 들으시는 중, 그 소설의 주인공들이 천신 만고 끝에 도사(道士)를 만나 소원을 성취하는지라, 대종사의 심중에 큰 변동이 생기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고자 하던 산신은, 5년 간 한결 같이 정성을 들였으나 한 번도 보이지 않으니, 가히 믿을 수 없을 뿐 더러, 그 유무를 확실히 알 수도 없는 것인즉, 나도 이제 부터는 저 소설의 주인공 같이 도사 만나는데에 정성을 들인다면, 도사는 사람이라 반드시 없지도 아니하리라」 생각하시고, 전날의 결심을 도사 만날 결심으로 돌리시었다.

그 후로는 길에 이상한 사람이나 걸인이 있어도 그가 혹 도사나 아닌가 하여 청하여 시험해 보시며, 또한 어디에 이인(異人)이나 은사(隱士)가 있다고 하면 반드시 찾아 가 보시고, 혹은 청하여 같이 지내시며 시험해 보기도 하여, 그 후 6년 간 도사를 찾아 일천 정성을 다 들이시었다.

4. 대종사의 입정

대종사, 어려서 부터 글 공부와 살림에는 뜻이 없으시고, 오직 도(道) 구하는 데에만 뜻을 두시매, 부친께서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다가, 마침내 대종사의 정성에 감동되어 그 구도를 적극 후원하셨으며, 대종사께서 20세에 이르도록 도사 만날 소원도 이루지 못함을 보시고는 「마당바위」 부근에 수간의 초당을 지어 심공(心功)을 들이게도 하시더니, 원기 전 6년(1910·庚戊) 10월 마침내 별세하시었다. 이에 대종사께서는 생활과 구도의 후원을 일시에 잃게 되신 데다가, 이미 큰 형과 아우는 출계(出系) 분가하고, 중형은 일찍 별세한지라, 모친의 봉양과 권속의 부양을 다 대종사께서 책임지시게 되니, 뜻 없는 살림과 경험없는 고생에 그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시었다.

뿐만 아니라, 6년 동안 구하고 바라던 도사도, 수많은 사람을 접응하여 보시었으나, 바른 스승을 찾을 곳이 없게 되매, 22세 때 부터는 도사 만날 생각도 차차 단념하시고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한 생각만 점점 깊어져 갔다. 처음에는 생활에 대한 계교심도 혹 있었고, 고생이라는 느낌도 혹 있었으나, 세월이 갈수록 다른 생각은 다 잊으시고, 오직 그 한 생각으로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고 저녁에서 아침에 이르시며, 때로는 저절로 떠 오르는 주문(呪文)도 외우시고, 때로는 고창 연화봉(全北高敞郡心元面蓮花峰) 초당 등으로 장소를 옮기어 정신을 수습도 해 보시었으나, 25세 때 부터는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그 생각마저도 잊어버리게 되어, 점점 행하여도 행하는 줄을 모르고, 말하여도 말하는 줄을 모르며, 음식을 드시어도 드는 줄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 이사에 집은 두 번 다 무너지고, 생계는 막연하여 조석 공양이 어려운 데다가, 복중(腹中)에는 큰 적(癪)이 들고, 온 몸에는 종기가 가득하여, 가족들의 근심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 사람들은 다 폐인으로 인증하게 되었으며, 그 정신이 어느 때에는 혹 분별이 있는 듯 하다가 다시 혼돈하여 지고, 혹 기억이 나타나는 듯 하다가 다시 어두어 지니, 부인은 대종사의 정신 회복을 위하여 다년간 후원 별처(後園別處)에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5. 대종사의 대각

원기 원년(1916·丙辰) 음 3월 26일 이른 새벽에, 대종사, 묵연히 앉으셨더니, 우연히 정신이 쇄락해 지며, 전에 없던 새로운 기운이 있으므로, 이상히 여기시어 밖에 나와 사면을 살펴 보시니, 천기가 심히 청랑하고 별과 별이 교교(皎皎)하였다. 이에, 맑은 공기를 호흡하시며 뜰 앞을 두루 배회하시더니, 문득 이 생각 저 생각이 마음에 나타나, 그동안 지내 온 바가 모두 고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며, 고생을 면하기로 하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며, 날이 밝으면 우선 머리도 빗고 손톱도 자르고 세수도 하리라는 생각이 일어 났다. 날이 밝으매, 대종사, 먼저 청결하는 기구들을 찾으시는지라, 이를 본 가족들은 대종사의 의외 행동에 한 편 놀라고 한 편 기뻐하여 그 동작을 주시하였으니, 이것이 곧 대종사 출정(出定)의 초보이었다.

그 날 조반 후, 이웃에 사는 몇 몇 마을 사람이 동학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가지고 서로 언론(言論)하는 중, 특히 「오유영부 기명선약 기형태극 우형궁궁(吾有靈符其名仙藥其形太極又形弓弓)」이란 귀절로 논란함을 들으시매, 문득 그 뜻이 해석되는지라, 대종사 내심에 대단히 신기하게 여기시었다. 얼마 후, 또한 유학자 두 사람이 지나다가 뜰 앞에 잠간 쉬어 가는 중, 『주역』에 「대인 여천지합기덕 여일월합기명 여사시합기서 여귀신합기길흉(大人與天地合其德與日月合其明與四時合其序與鬼神合其吉凶)」이라는 귀절을 가지고 서로 언론함을 들으시매, 그 뜻이 또한 환히 해석 되시었다. 이에 더욱 이상히 여기시어 「이것이 아마 마음 밝아지는 증거가 아닌가」하시고, 전 날에 생각하시던 모든 의두를 차례로 연마해 보신즉, 모두 한 생각에 넘지 아니하여, 드디어 대각을 이루시었다.

대종사, 이에 말씀하시기를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하시었다. 이로부터 대종사의 심경은 날이 갈수록 명랑해 지고, 야위던 얼굴과 몸에 기혈이 충만하여, 그간의 모든 병증도 차차 저절로 회복되니, 보는 이들 누구나 정신이 황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종사의 생장하신 길룡리는 산중 궁촌으로, 견문이 심히 적었고, 대종사께서도 글 공부한 시일이 2년에 불과하였으므로, 그 동안 어떤 종교의 교의(敎義)와 역사를 듣고 배우신 바가 없었으나, 듣고 보신 바가 없이 스스로 원을 발하시고, 스스로 정성을 다하시고, 스스로 정(定)에 드시고, 스스로 대각을 성취하여, 필경은 천만 교법의 대소 본말을 일원의 이치로써 관통하시었으니, 이는 곧 영겁에 수도의 종성(種性)이 매(昧)하지 아니한 까닭이라 할 것이다.

제3장 제생의세(濟生醫世)의 경륜(經綸)

1. 교법의 연원

대종사, 대각을 이루신 후, 마음에 홀로 기쁘고 자신이 충만(心獨喜自負)하여, 그 경로를 생각하시되 「순서 알기가 어렵다」 하시고, 「강연히 말하자면 자력으로 구하는 중 사은의 도움이라」 하시었다.

대종사, 다시 생각하시기를 「동양에는 예로 부터 유·불·선 삼교(儒佛仙三敎)가 있고, 이 나라에도 근래에 몇 가지 새 종교가 일어났으며, 서양에도 몇 가지 종교가 있다 하나, 내가 지금까지 그 모든 교의(敎義)를 자상히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 이제 그 모든 교서를 한 번 참고하여, 나의 얻은 바에 대조하여 보리라」 하시고, 이웃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그 경전들을 약간 구하여 대략 열람하시었다. 당시 열람하신 경전은, 유교의 사서(四書)와 소학(小學), 불교의 금강경(金剛經)·선요(禪要)·불교대전(佛敎大全)·팔상록(八相錄)·선가(仙家)의 음부경(陰符經)·옥추경(玉樞經), 동학의 동경 대전(東經大全)·가사(歌詞), 기독교의 구약(舊約)·신약(新約) 등인 바, 그 중 특히 [금강경]은 꿈으로 그 이름을 알으셨다 한다.

대종사, 경전들을 열람하신 후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 바는 옛 성인들이 또한 먼저 알았도다」 하시고, 「모든 경전의 뜻이 대개 적절하여 별로 버릴 바가 적으나, 그 중에도 진리의 심천(深淺)이 없지 아니한 바, 그 근본적 진리를 밝히기로는 불법이 제일이라, 서가모니 불은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하시었다. 대종사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 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 본다면 모든 일이 은연 중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하시고, 「장차 회상을 열 때에도 불법으로 주체를 삼고, 모든 교법도 마땅한 바를 따라 응용하여, 완전 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고 내정하시었다.

2. 최초의 법어

대종사, 안으로 모든 교법을 참고하신 후, 다시 밖으로 시국을 살펴 보시어, 정신 도덕의 부활이 무엇보다 시급함을 느끼시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제창하시니, 이것이 곧 개교 표어이다. 대종사, 다시 시국에 대한 감상과, 그에 따른 새 세상 건설의 대책을 최초 법어로 발표하시니, 곧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의 진화상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이다.

「수신의 요법」은, 시대를 따라 학문을 준비하고, 수양 연구 취사를 놓지 아니하여야 새 세상의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요, 「제가의 요법」은 실업과 근검 저축, 교육과 의견 교환, 도덕과 정치 복종, 희망과 방법 참조를 주의 하여야 새 가정 새 국가를 이룩한다는 것이요, 「강자 약자의 진화상 요법」은, 강자는 자리이타로 약자를 진화시키며, 약자는 강자를 선도자로 삼아, 강약이 서로 진화하는 길로 나아가야 상극없는 새 세상을 이룩한다는 것이요,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은, 이상 지식을 가지고, 신용을 잃지 말며, 사리를 취하지 말고, 지행을 대조하여야 제생 의세의 경륜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3. 첫 제도의 방편과 구인제자

대종사, 표어와 법어를 발표하신 후,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이제 나의 안 바는 곧 도덕의 정체(正體)요, 나의 목적하는 바는 곧 새 회상을 이 세상에 창건하여 창생을 낙원으로 인도하자는 것이나, 내가 몇 달 전까지도 폐인으로 평을 받았고, 일찌기 어떤 도가에 출입하여 본 바가 없었으며, 현재의 민중은 실생활의 정법은 모르고 허위와 미신에만 정신이 돌아 가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하시고, 포교할 기회를 기다리시었다.

때 마침 증산 교파가 사방에 일어 나서 모든 인심을 충동 하던 중, 길룡리 부근에도 그 전파가 성한지라,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방편으로 여러 사람의 단결과 신앙을 얻은 후에 정도를 따라 차차 정법 교화를 하리라 결심하시고, 원기 원년(1916·丙辰) 7월 경, 친히 그 교파 선전원을 청하여 치성하는 절차를 물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특별한 정성으로 7일 치성을 지낸 후, 보통 생각으로는 가히 추상할 수 없는 말씀과 태도로 좌우 사람들의 정신을 황홀케 하시니, 몇 달 아니되어 이웃 각 처에서 믿고 따르는 사람이 40여명에 달하였다.

대종사, 40여명의 신자들과 서로 내왕한 지 4·5개월이 되었으나, 그들은 대개 일시적 허영심으로 모였고, 또한 그 동안 어떤 통제 있는 생활을 하여 본 바가 없는 이들이라, 그들을 일률 지도할 생각을 뒤로 미루시고, 그 해(원기원년·1916) 12월 경, 그 중에서 특별히 진실하고 신심 굳은 여덟 사람을 먼저 선택하시니, 곧 김 성섭(金成燮)·김 성구(金聖久)·박 한석(朴漢碩)·오 재겸(吳在謙)·이 인명(李仁明)·박 경문(朴京文)·유 성국(劉成國)·이 재풍(李載馮) 등이었으며, 그 후 송 도군(宋道君)을 맞으시니, 이들이 곧 새 회상의 첫 구인 제자이다.

9인 중 첫 제자는 김 성섭이니, 그는 본래 대종사의 가정과 교의(交誼)가 있어 친절함이 형제같은 중, 대종사의 입정 전후에 많은 보조가 있었고, 박 한석은 대종사의 친제(親弟)요, 유 성국은 외숙이요, 박 경문은 족질이며, 이 인명·김 성구·오 재겸은 모두 근동 지우(近洞知友)이고, 군서(郡西) 사람 이 재풍은 오 재겸의 인도로 처음 만났으며, 송 도군은 경북 성주 사람으로, 정법을 찾아 방황하다가 원기 3년(1918·戊午) 3월에 대종사께 귀의하였다.

4. 첫 조단과 훈련

대종사, 일찌기 공부인의 조단 방법을 강구하시어, 장차 시방 세계 모든 사람을 통치 교화할 법을 제정하시니, 그 요지는, 오직 한 스승의 가르침으로 원근 각처의 모든 사람을 고루 훈련하는 빠른 방법이었다. 그 대략을 말하자면, 9인으로 1단을 삼고, 단장 1인을 가(加)하여 9인의 공부와 사업을 지도 육성케하며, 9단이 구성되는 때에는 9단장으로 다시 1단을 삼고, 단장 1인을 가하여 9단장의 공부와 사업을 지도 육성케 하되, 이십팔수(二十八宿)(角亢氐房心尾箕斗牛女虛危室壁奎婁胃昴畢觜參井鬼柳星張翼軫)의 순서를 응용하여, 이상 단장도 계출(繼出)되는 대로 이와 같은 예로 다시 조직하여, 몇 억만의 많은 수라도 지도할 수 있으나 그 공력은 항상 9인에게만 들이면 되는 간이한 조직이었다. 또한 단의 종류도, 위에 수위단이 있고, 그 아래 모든 사람의 처지와 발원과 실행에 따라 전무출신 단·거진출진 단·보통 단 등으로 구분하기로 하시었다.

대종사, 이 방법에 의하여, 원기2년(1917·丁巳) 7월 26일에, 비로소 남자 수위단을 조직하시니, 단장에 대종사, 건방(乾方) 이 재풍, 감방(坎方) 이 인명, 간방(艮方) 김 성구, 진방(震方) 오 재겸, 손방(巽方) 박 경문, 이방(离方) 박 한석, 곤방(坤方) 유 성국, 태방(兌方) 김 성섭이었고, 중앙은 비워 두었다가 1년 후(원기3년·戊午7월) 송도군을 서임(叙任)하였다.

대종사, 최초의 단을 조직하신 후, 단원들의 신성이 날로 전진은 하나, 아직도 마음에 원하는 바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결이며, 난측한 신통 묘술이며, 수고 없이 속히 되는 것 등이요, 진리의 당체와 인도의 정의를 분석하는 공부는 원하지 아니함을 보시고, 종종 하늘에 제사하여 그 마음을 결속케 하시고, 친히 지도하실 말씀도 천제(天帝)의 말씀이라 하여 그 실행을 권면하시었다.

그 후, 차차 법을 정하여 매월 예회 보는 법을 지시하시니, 곧 삼순일(三旬日)(1일·11일·21일)로써 모이되, 신(信)을 어긴 이는 상당한 벌이 있게 하시고, 또는 『성계명시독(誠誡明示讀)』이라는 책을 두시사, 단원들의 10일 동안 지낸 바 마음을 청(靑)·홍(紅)·흑점(黑點)으로 조사하여, 그 신성 진퇴와 실행 여부를 대조케 하시니, 단원들은 한 편 두려워 하고 한 편 기뻐하여, 그 마음의 결합됨과 신성의 철저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5. 법의 대전과 창립 한도

원기 2년(1917·丁巳) 이래로, 대종사, 종종 김 성섭에게 붓을 잡으라 하시고, 친히 수 많은 문장과 시가 등을 읊어 내어 기록케 하시고, 편집하여 『법의대전(法義大全)』이라 이름하시었다. 『법의대전』의 내용은 그 뜻이 심히 신비하여, 보통 지견으로는 가히 다 헤아려 말할 수 없었으나, 그 대강은, 곧 도덕의 정맥이 끊어 졌다가 다시 난다는 것과, 세계의 대세가 역수가 지내면 순수가 온다는 것과, 새 회상을 건설하실 계획 등 이었다.

단원들은 [법의대전]을 재미 있게 읊고 노래 하여, 그 신심 고취에 큰 자료가 되었으나, 이는 한 때의 발심 조흥은 될지언정 많은 사람을 제도할 정식 교서는 아니라 하여, 후일 봉래산에서 새 교강(敎綱) 발표 후 거두어 불사르게 하심으로써, 서문 첫 절과 11귀의 한시가 구송(口誦)으로 전하여 대종경(大宗經·전망품2장)에 수록되었을 뿐, 세상에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백일소(白日嘯)·심적편(心迹篇)·감응편(感應篇) 등의 저술과, 봉래산에서 지으신 회성곡(回性曲)이 있었으나, 그도 다 불사르게 하심으로써 후세에 남지 못하였다.

원기 3년(1918·戊午) 10월에, 대종사, 새 회상의 창립 한도를 발표하시니, 앞으로 회상의 대수(代數)는 기원 연수(紀元年數)로 구분하되, 매대(每代)를 36년으로 하고, 창립 제일대(第一代) 36년은 이를 다시 3회(回)로 나누어, 제 1회 12년은 교단 창립의 정신적 경제적 기초를 세우고 창립의 인연을 만나는 기간으로, 제 2회 12년은 교법을 제정하고 교재를 편성하는 기간으로, 제 3회 12년은 법을 펼 인재를 양성 훈련하여 포교에 주력하는 기간으로 하며, 시창 기원은 대종사의 대각하신 해(1916·丙辰)로 기준 실시할 것도 아울러 발표하시었다.

제4장 회상 건설(會上建設)의 정초(定礎)

1. 저축 조합 운동

원기 2년(1917·丁巳) 8월에, 대종사, [저축 조합]을 창설하시고, 단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장차 시방 세계를 위하여 함께 큰 공부와 사업을 하기로 하면, 먼저 공부할 비용과 사업할 자금을 예비하여야 하고, 예비를 하기로 하면 어떠한 기관과 조약을 세워야 할 것이므로, 이제 회상 기성(期成)의 한 기관으로 저축 조합을 실시하여 앞 일을 준비하려 하노라」 하시었다.

이에 모든 단원이 술·담배를 끊어 그 대액(代額)을 저축하며, 의복·음식 등에 절약할 정도가 있으면 그 대액을 저축하며, 재래의 여러 명절 휴일을 줄여 특별 노동 수입을 저축하며, 각자 부인에게도 끼니마다 시미(匙米)(후일 報恩米)를 저축케 하며, 그 간 실행해 온 천제(天祭)도 폐지하여 그 소비 대액을 조합에 저축하기로 하고, 대종사, 친히 조합장이 되시어 그 실행을 장려하시니, 불과 몇 달에 저축된 금액이 상당한 액수(200여원)에 달하였다.

대종사, 조합원들에게 명하여, 그 동안의 저축금으로 숯을 사 두라 하시고, 한 편으로는 이웃 마을 부호 한 사람에게 빚(400원)을 얻으며, 대종사께서 그 간 준비해 두신 사재(400원)도 판출 제공하사 다 숯을 사 두게 하시니, 7·8개월 후 그 값이 일약 10배(倍)로 폭등하여 조합은 1년 안에 큰 자금을 이루게 되었다. 대종사의 사재는 대각 이후로 본 댁에 남아 있는 가구 등속을 매각 작전(賣却作錢)하여 운용 조성한 것이요, 빚은 당시 조합의 신용으로는 얻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대종사께서 명령하신 다음 날, 부호가 자진하여 빚을 주었다. 조합원들은 뜻 밖의 성공에 기뻐하는 동시에, 이것은 아마 하늘이 우리 사업을 도와 주심이라 하여, 더욱 신심과 용기를 얻게 되었고, 숯 무역은 제 1차 대전으로 숯 시세의 일대 변동을 당하여 그러한 이익을 보게 되었다.

2. 정관평 방언 공사

원기 3년(1918·戊午) 3월에, 대종사, 저축 조합의 저축금을 수합하신 후, 조합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어떠한 사업이나 가히 경영할 만한 약간의 기본금을 얻었으니, 이것으로 사업에 착수하여야 할 것인 바, 나의 심중에 일찌기 한 계획이 있으니, 그대들은 잘 생각해 보라」 하시고, 길룡리 앞 바닷물 내왕하는 간석지를 가리키시며 「이것은 모든 사람의 버려 둔 바라, 우리가 언(堰)을 막아 논을 만들면 몇 해 안에 완전한 논이 될 뿐 더러 적으나마 국가 사회의 생산에 한 도움도 될 것이다. 이러한 개척 사업부터 시작하여 처음부터 공익의 길로 나아감이 어떠하냐」 하시었다. 조합원들은 원래 신심이 독실한 중에 몇 번의 증험도 있었으므로, 대종사의 말씀에는 다른 사량 계교를 내지 아니하고 오직 절대 복종 하였다. 이에, 일제히 명을 받들어 오직 순일한 마음으로 지사 불변(至死不變)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다음날로 곧 방언 공사에 착수하였다.

조합원들이 공사에 착수하니, 근방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냉소하며, 혹은 장차 성공치 못할 것을 단언하여 장담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그 비평 조소에 조금도 끌리지 아니하고, 용기를 더욱 내며 뜻을 더욱 굳게 하여, 일심 합력으로 악전고투를 계속 하였다. 삼복 성염(三伏盛炎)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삭풍 한설에는 추위를 헤치면서, 한 편은 인부들을 독촉하고 한 편은 직접 흙짐을 져서, 조금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아니 하였다.

방언 공사는 이듬해인 원기 4년(1919·己未) 3월에 준공되니, 공사 기간은 만 1개년이요 간척 농토 면적은 2만6천여평(坪)이었다. 대종사, 피땀의 정성 어린 새 농장을 「정관평」이라 이름하시니, 이는 오직 대종사의 탁월하신 영도력과 9인 제자의 일심 합력으로써 영육 쌍전의 실지 표본을 보이시고, 새 회상 창립의 경제적 기초를 세우신 일대 작업이었다. 공사를 마친 후에도 조합원들의 노력과 고생은 쉬지 아니하였으니, 넉넉지 못한 힘으로 근근히 준공은 하였으나, 아직 굳어지지 않은 언(堰)의 뒷 일과 4·5년 간의 해독(海毒)으로 수 년간 작농에 손실을 보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여러 해를 두고 조합원 외에도 육신과 재력(財力)으로써 직접 간접으로 후원을 한 이가 적지 않았으니, 특별 후원자는 유 정천(劉正天)등 18인(별록1)이었다.

3. 첫 교당 건축과 공부 사업 병행

원기 3년(1918·戊午) 10월, 옥녀봉(玉女峰) 아래 도실(道室) 건축을 착수하여, 12월에 준공하니, 이것이 곧 새 회상의 첫 교당인 옥녀봉 구간 도실이다. 그 동안 조합원들이 모이는 장소가 일정치 못하여, 처음에는 이웃 마을 범현동(帆懸洞)의 재각(齋閣) 한 편을 빌려 썼고, 다음에는 강변 주점을 임시 방언 관리소로 정하였으나, 모두 비좁아 여러가지 행사에 불편이 많으므로, 이에, 비로소 도실을 건축한 것인 바, 조합원들이 한 편으로는 방언에 종사하고 한 편으로는 건축에 주력하여, 산에 올라 나무를 베고 땅을 녹여 흙을 이겨서, 풍설을 무릅쓰고 근근히 성조(成造)하였다. 대종사, 그 상량에 쓰시기를 「사원기일월 직춘추법려(梭圓機日月織春秋法呂)」라 하시고, 또 그 아래에 쓰시기를 「송수만목여춘립 계합천봉세우명(松收萬木餘春立 溪合千峰細雨鳴)」이라 하시었다.

첫 교당을 준공한 후, 대종사, 낮에는 방언 공사를 총감하시어 잠시도 쉬실 여유가 없고, 밤에는 또한 설법으로써 밤을 지내실 때가 많았다. 조합원들은 낮에 비록 그와 같이 힘겨운 노동을 하나, 밤마다 법설 듣는 재미가 진진하여 그 즐거운 마음과 활달한 태도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으며, 사업과 공부의 병진으로 지혜의 길도 점차 개척되어, 재래에 가졌던 허영의 마음이 차차 진실한 마음으로 전환되고, 미신의 생각이 차차 올바른 믿음으로 돌아 오며, 타력에만 의뢰하던 생각이 차차 자력을 찾게 되고, 공부의 정도도 또한 점점 진보되어, 정법 선포의 기연이 날로 가까와 졌다.

4. 구인 단원의 기도

원기 4년(1919·己未) 3월, 방언 공사를 마친 후, 대종사, 9인 단원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물질 문명은 그 세력이 날로 융성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은 날로 쇠약하여, 개인·가정·사회·국가가 모두 안정을 얻지 못하고, 창생의 도탄이 장차 한이 없게 될지니, 세상을 구할 뜻을 가진 우리로서 어찌 이를 범연히 생각하고 있으리요. 옛 성현들도 창생을 위하여 지성으로 천지에 기도 하여 천의(天意)를 감동시킨 일이 없지 않나니, 그대들도 이 때를 당하여, 전일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으로 모든 사람의 정신이 물질에 끌리지 아니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천지에 기도하여 천의에 감동이 있게 하여 볼지어다. 그대들의 마음은 곧 하늘의 마음이라, 마음이 한번 전일하여 조금도 사(私)가 없게 되면, 곧 천지로 더불어 그 덕을 합하여 모든 일이 다 그 마음을 따라 성공될 것이니, 그대들은 각자의 마음에 능히 천의를 감동시킬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각자의 몸에 또한 창생을 제도할 책임이 있음을 항상 명심하라」 하시니, 9인은 황송하고 기쁜 마음으로 일제히 지도하심을 청하였다.

이에, 3월 26일에 시작하여, 10일간 재계(齋戒)로써 매 삼륙일(每三六日)(6일·16일·26일)에 기도식을 거행하되, 치재(致齋) 방식은, 첫째 마음 정결을 위주하고, 계문(戒文)을 더욱 준수하며, 육신도 자주 목욕 재계하고, 기도 당일에는 오후 8시 안으로 일찌기 도실에 모여 대종사의 교시를 받은 후, 9시 경에 기도 장소로 출발하게 하였다. 기도는, 10시 부터 12시 정각 까지 하며, 기도를 마친 후 또한 일제히 도실에 돌아오되, 단원들이 각각 시계를 가져, 기도의 시작과 그침에 서로 시각이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장소는 각각 단원의 방위를 따라 정하되, 중앙봉으로 비롯하여 8방의 봉우리(峰巒)를 지정하고, 단기(團旗)인 팔괘기(八卦旗)를 기도 장소 주위에 세우게 하며, 기도식을 시작할 때에는 먼저 향촉과 청수를 진설하고 헌배와 심고를 올리며, 축문을 낭독한 다음 지정한 주문을 독송케 하였다.

5. 백지 혈인의 법인 성사

원기 4년(1919·己未) 7월 16일에, 대종사, 단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지금까지 기도해 온 정성은 심히 장한 바 있으나, 나의 증험하는 바로는 아직도 천의(天意)를 움직이는 데는 그 거리가 먼 듯하니, 이는 그대들의 마음 가운데 아직도 어떠한 사념(私念)이 남아 있는 연고라, 그대들이 사실로 인류 세계를 위한다고 할진대, 그대들의 몸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서 모든 창생이 도덕의 구원만 받는다면 조금도 여한 없이 그 일을 실행하겠는가」 하시니, 단원들이 일제히 「그러하겠읍니다」고 대답하였다.

대종사, 더욱 엄숙하신 어조로 「옛 말에 살신 성인이란 말도 있고, 또는 그를 실행하여 이적을 나툰 사람도 있었으니, 그대들이 만일 남음 없는 마음으로 대중을 위한다면 천지 신명이 어찌 그 정성에 감동치 아니하리요. 멀지 않은 장래에 대도 정법이 다시 세상에 출현되고 혼란한 인심이 점차 정돈되어 창생의 행복이 한 없을지니, 그리 된다면, 그대들은 곧 세상의 구주요, 그 음덕은 만세를 통하여 멸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런즉 그대들은 각자의 실정으로 대답해 보라」 하시니, 9인은 잠간 비장한 태도를 보이다가 곧 일제히 희생하기로 고백하였다. 대종사, 크게 칭찬하시며, 이에 10일간 치재를 더하게 하시어, 다음 기도일(7월26일)을 최후 희생일로 정하고, 그 날 기도 장소에 가서 일제히 자결 하기로 약속하였다.

7월 26일(음)에, 9인은 모두 만면(滿面)한 희색으로 시간 전에 일제히 도실에 모이는지라, 대종사, 찬탄함을 마지 아니하시었다. 밤 8시가 되매, 대종사, 청수를 도실 중앙에 진설케 하시고, 각자 가지고 온 단도를 청수상 위에 나열케 하신 후, 일제히 「사무여한」이라는 최후 증서를 써서 각각 백지장(白指章)을 찍어 상(床)위에 올리고, 결사(決死)의 뜻으로 엎드려 심고(伏地心告)하게 하시었다. 대종사, 증서를 살펴 보시니, 백지장들이 곧 혈인(血印)으로 변하였는지라, 이를 들어 단원들에게 보이시며 「이것은 그대들의 일심에서 나타난 증거라」 하시고, 곧 불살라 하늘에 고(燒火告天)하신 후 [바로 모든 행장을 차리어 기도 장소로 가라] 하시었다.

대종사, 한참 후에 돌연히 큰 소리로 「내가 한 말 더 부탁할 바가 있으니 속히 도실로 돌아오라」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마음은 천지 신명이 이미 감응하였고 음부 공사가 이제 판결이 났으니, 우리의 성공은 이로 부터 비롯하였다. 이제 그대들의 몸은 곧 시방 세계에 바친 몸이니, 앞으로 모든 일을 진행할 때에 비록 천신 만고와 함지 사지를 당할지라도 오직 오늘의 이 마음을 변하지 말고, 또는 가정 애착과 오욕의 경계를 당할 때에도 오직 오늘 일만 생각한다면 거기에 끌리지 아니할 것인즉, 그 끌림 없는 순일한 생각으로 공부와 사업에 오로지 힘쓰라」 하시었다. 9인은 대종사의 말씀을 듣고 여러 가지 이해는 얻었으나, 흥분된 정신이 쉽게 진정되지 아니하였다.

11시가 지난 뒤, 대종사, 다시 일제히 중앙봉에 올라가 기도를 마치고 오라 하신 후, 돌아 온 단원들에게 법호(法號)와 법명(法名)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전 날 이름은 곧 세속의 이름이요 개인의 사사 이름이었던 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세계 공명(世界公名)인 새 이름을 주어 다시 살리는 바이니, 삼가 받들어 가져서 많은 창생을 제도하라」 하시니, 이것이 거룩한 백지 혈인(白指血印)의 법인 성사(法認聖事)였다. 9인의 법호 법명은 일산 이 재철(一山李載喆)·이산 이 순순(二山李旬旬)·삼산 김 기천(三山金幾千)·사산 오 창건(四山吳昌建)·오산 박 세철(五山朴世喆)·육산 박 동국(六山朴東局)·칠산 유 건(七山劉巾)·팔산 김 광선(八山 金光旋)·정산 송 규(鼎山宋奎)였다.

그 후로도 단원의 기도는 여전히 계속하여 모든 절차에 조금도 해이함이 없더니, 그 해 10월, 대종사의 명에 의하여 드디어 해재(解齋)하였다. 이 9인 기도와 법인 성사는 곧 무아 봉공의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고, 신성·단결·공심을 더욱 굳게 한 새 회상 건설의 일대 정신 작업이었다.

제5장 교법(敎法)의 초안(草案)

1. 불법에 대한 선언

원기 4년(1919·己未) 10월 6일에, 대종사 「저축조합」의 이름을 고쳐 「불법연구회 기성조합(佛法硏究會 期成組合)」이라 하시고, 모든 기록에도 일제히 불법의 명호(名號)를 쓰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우리가 배울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요 후진을 가르칠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니, 그대들은 먼저 이 불법의 대의(大義)를 연구해서 그 진리를 깨치는 데에 노력하라. 내가 진작 이 불법의 진리를 알았으나, 그대들의 정도가 아직 그 진리 분석에 못 미치는 바가 있고, 또는 불교가 이 나라에서 여러 백 년 동안 천대를 받아 온 끝이라, 누구를 막론하고 불교의 명칭을 가진 데에는 존경하는 뜻이 적게 된지라, 열리지 못한 인심에 시대의 존경을 받지 못할까 하여 짐짓 법(法)의 사정 진위(邪正眞僞)를 막론하고 오직 인심의 정도를 따라 순서없는 교화로 한갓 발심 신앙에만 주력하여 왔거니와, 이제 그 근본적 진리를 발견하고 참다운 공부를 성취하여 일체 중생의 혜복 두 길을 인도하기로 하면 이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야 할 것이며, 불교는 장차 이 나라의 주교(主敎)가 될 것이요, 또한 세계적 주교가 될 것이니라.

그러나, 미래의 불법은 재래와 같은 제도의 불법이 아니라, 사 농 공 상을 여의지 아니하고, 또는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불법이 될 것이며, 부처를 숭배하는 것도 한갓 국한된 불상에만 귀의하지 않고 우주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로 알게 되므로, 일과 공부가 따로 있지 아니하고, 세상 일을 잘하면 그것이 곧 불법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요, 불법 공부를 잘 하면 세상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또는 불공하는 법도 불공할 처소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공하는 이의 일과 원을 따라 그 불공하는 처소와 부처가 있게 되나니, 이리 된다면 법당과 부처가 없는 곳이 없게 되며, 부처의 은혜가 화피초목(化被草木) 뇌급만방(賴及萬方)하여 상상하지 못할 이상의 불국토가 되리라.

그대들이여! 시대가 비록 천만 번 순환하나 이 같은 기회 만나기가 어렵거늘 그대들은 다행히 만났으며, 허다한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드물거늘 그대들은 다행히 이 기회를 알아서 처음 회상의 창립주가 되었나니, 그대들은 오늘에 있어서 아직 증명하지 못할 나의 말일지라도 허무하다 생각하지 말고 모든 지도에 의하여 차차 진행하면 멀지 않은 장래에 가히 그 실지를 보게 되리라」 하시었다.

2. 봉래산 법회와 일원상 구상

대종사, 일찍부터 새 회상 창립의 준비를 위한 휴양처를 물색하시어, 원기 4년(1919·己未) 3월에 오 창건을 데리시고 전라북도 부안 봉래산(全羅北道 扶安郡 蓬萊山 本名邊山) 월명암(月明庵)에서 10여일 유하신 후 돌아 오시고, 7월 말에는 다시 송 규를 보내시어 미래의 근거를 정하게 하시더니, 10월에 이르러 조합의 뒷일을 여러 사람에게 각각 부탁하시고, 몇 해 동안 수양하실 계획 아래 월명암에 행차 하시었다. 대종사, 서해연변을 돌아 월명암에 오시니, 오랫동안 고대하던 송 규는 환희 용약하였고 백 학명(白鶴鳴) 주지도 반가이 영접하였다. 대종사의 입산 동기는, 다년간 복잡하던 정신을 휴양하시며, 회상 창립의 교리 제도를 초안하시고, 사방 인연을 연락하여 회상 공개를 준비하시며, 험난한 시국에 중인의 지목을 피하시기 위함이었다.

한 편 대종사, 이 해(1919·己未) 8월에 휴양처를 물색차, 김제 금산사에 가시어 잠시 머무는 동안, 거처 하시던 별채 문미(門楣)에 일원상을 그리신 바 있었으니, 이는 장차 새 교법의 종지(宗旨)인 일원상을 그림으로 그려 보신 첫 구상의 표현이었다. 대종사, 월명암에 계실 제, 전주 김제 등지에서 송적벽(宋赤壁) 등(별록2)이 달려와 모시기를 원하는 지라, 그 해(원기4년·1919) 12월,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 옆 몇 간 초당에 거처를 정하시고, 몇 몇 제자(별록3)로 더불어 간고한 살림을 하시면서 심신의 휴양에 주력하시었다. 그러나, 새 해(원기5년·1920)부터 영광·김제·전주 등지의 신자들이 은연 중 서로 소식을 통하여 그 심산 궁곡에 찾아 오는 사람이 차차 많아지는 지라, 대종사, 그들의 정성에 감응하시어, 매양 흔연 영접하시며 조석으로 설법하시니, 당시의 법설 요지는 대개 관심 입정(觀心入定)과 견성 성불하는 방법이었다.

3. 교강 선포와 첫 교서 초안

원기 5년(1920·庚申) 4월에, 대종사, 봉래산에서 새 회상의 교강을 발표하시니, 곧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三綱領)·팔조목(八條目)이었다. 사은은,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으로서, 그 피은(被恩) 보은(報恩) 배은(背恩)을 말씀한 것이요, 사요는 그 후 누차 연마하여 완정하신 바, 남녀 권리동일 지우 차별(智愚差別) 무자녀자 타자녀교양(無子女者他子女敎養) 공도헌신자 이부사지(公道獻身者以父事之)니, 이는 인생의 마땅히 행할 바 도로서 세상을 구원할 요법이 되고, 삼강령은, 정신 수양 사리 연구 작업 취사니, 이는 곧 공부인의 마땅히 밟을 도로서, 부처님의 말씀하신 계·정·혜를 단련하여 생령을 제도하는 요법이 되며, 팔조목(八條目)은 신(信) 분(忿) 의(疑) 성(誠)과 불신(不信) 탐욕(貪慾) 나(懶) 우(愚)니, 신·분·의·성 사조(條)로는 진행건(進行件)을 삼고, 불신·탐욕·나·우 사조로는 사연건(捨捐件)을 삼아, 삼강령 공부를 운용하는 요법이 되는 바, 그 강령이 간명하고 교의가 원만하여, 모든 신자로 하여금 조금도 미혹과 편벽에 끌리지 아니하고, 바로 대도(大道)에 들게 하는 새 회상의 기본 교리이다.

이 때에, 대종사, 또한 밖으로 승려들과 교제하사, 재래 사원의 모든 법도를 일일히 청취하시고, 안으로 제자들로 더불어 새 회상의 첫 교서 초안에 분망하시니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과 「수양 연구 요론(修養硏究要論)」 등이 차례로 초안되었다. 「혁신론」은 재래의 불교를 시대에 맞도록 하여 대중 교화를 하자는 것이요, 「수양 연구 요론」은 전문 수양의 방법과 각 항 연구 조목을 지정하여 공부인으로 하여금 수양과 연구의 실지경(實地經)을 밟게 하자는 경전이니, 「수양 연구 요론」은 원기 12년(1927·丁卯) 5월에, 「혁신론」은 원기 20년(1935·乙亥) 4월에 발간하여, 각각 상당한 동안 새 회상 초기 교서의 일부로 사용하였다.

원기 6년(1921·辛酉) 7월에, 김 남천(金南天)·송 적벽 등의 발의(發議)로 실상 초당(實相草堂) 윗 편에 몇 간 초당의 건축을 착공하여 그 해 9월에 준공하고 이름을 「석두암(石頭庵)」이라 하니, 이것이 곧 「봉래정사」이다. 대종사, 봉래 정사에서 새로 초안된 교강과 교서로 여러 사람의 근기에 따라 예비 훈련을 시험해 보시니, 그 성적이 매우 좋아 모든 신자의 정법에 대한 이해가 한 층 진보하였다.

4. 창립 인연들의 결속

대종사, 봉래산에서, 각지 신자가 불어남을 보시고, 다시 조단 교화(組團敎化)를 시험하기 위하여, 원기 6년(1921·辛酉) 6월에 영광 지방에 남자 1단을 조직하시고, 8월에 영광·김제·전주 등지를 합하여 남자 1단, 여자 1단을 조직하시었으나, 그 후 정원이 고르지 못하고 통치가 귀일치 못하므로 후일을 기다려 다시 실행하기로 하고 종전대로 직접 교화를 시행하시었다. 대종사의 그 동안 교화하신 순서를 대략 말하자면, 대각 직후에는 어떠한 법을 인용하든지 오직 발심으로써 교화의 주체를 삼으시었고, 원기 2년(1917·丁巳)부터 4년(1919·己未)까지는 신성 단결 공심으로 교화의 주체를 삼으시었고, 원기 5년(1920·庚申) 새 교강 선포 후로는 교강으로써 교화의 주체를 삼으시었다.

대종사, 입산 후 수년을 경과하여, 장차 정식 회상 열만한 기연이 성숙함을 보시고, 하산의 시기를 기다리시었다. 원기 7년(1922·壬戌) 9월에는 송 규를 진안(鎭安) 지방에 보내시어, 만덕산(萬德山) 미륵사(彌勒寺)에서 최 도화(崔道華)를 만나게 하시고, 그 해 12월, 오 창건·송 도성(宋道性)을 데리시고 친히 가시어, 최 도화·전 삼삼(田三三)·전 음광(全飮光)·노 덕송옥(盧德頌玉) 등을 만나신 후, 이듬 해(원기8년·1923) 3월에 봉래산에 돌아 오시어, 5월에 김제 서 동풍(徐東風)·서 중안(徐中安) 형제를 만나시었다.

이 밖에도, 원평(院坪) 구 남수(具南守)·이 만갑(李萬甲)·장 정수(張正守)·장 적조(張寂照) 등과, 전주 문 정규(文正奎)· 박 호장(朴戶張), 이리(裡理) 박 원석(朴元石) 등 초창의 주요 인연들을 차례로 만나시었고, 원기 9년(1924·甲子) 2월에는 정읍 내장사에서 송 만경(宋萬京)을 만나시었으며, 이어, 최 도화의 안내로 서울에 가시어, 박 사시화(朴四時華) 형제와 성 성원(成聖願)·이 동진화(李東震華)·김 삼매화(金三昧華)를 만나시고, 그 후 이 공주(李共珠) 등을 차례로 만나시었다.

5. 회상 공개의 준비

원기 8년(1923·癸亥) 6월에 서 중안이 부인 정세월(鄭世月)과 함께 다시 봉래 정사에 와서 사뢰기를 「이 곳은 길이 험난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장소가 협착하오니 마땅히 교통과 장소가 편리한 곳을 택하여, 모든 사람의 앞길을 널리 열어 주심이 시대의 급무일까 하나이다」 하며, 대종사의 하산(下山)을 지성으로 간청하였다. 대종사, 그의 말에 응하사 장차 정식 회상 열 계획을 함께 의논하시더니, 때마침 영광으로 부터 모친의 병보가 온지라, 겨울에 만날 것을 약속하시고, 급거 본댁에 가시어, 7월에 모친 상사(喪事)를 당하시었다. 이 때에 각지 신자들이 문상 차 영광에 많이 모이니, 옥녀봉 도실은 너무 비좁아 대중을 수용하기가 심히 불편하고, 또는 기지가 비습(卑濕)하여 영원한 교당 위치로는 적당치 아니하므로, 이에 교당의 이축을 발론하시어, 드디어 범현동 기슭에 새 터를 정하고 목조 초가 10간(間) 1동(棟)과 8간(間) 2동(棟)의 건축을 10월에 마치니, 이것이 곧 영산원(靈山院)의 첫 건설이었다.

11월에, 대종사, 이리(朴元石집)를 거쳐 전주로 가시어, 박 호장·이 청춘(李靑春) 등이 주선한 10여간(餘間)의 집을 임시 출장소로 정하시고, 회상 공개에 관한 취지 규약의 작성 인쇄와 제반 준비를 서 중안에게 일임하신 후 봉래산에 돌아 오시었다. 대종사, 그 동안의 취지와 경과를 백 학명 주지에게 말씀하시니, 그가 크게 동감하여, 자신의 새 임지인 내장사의 일부를 빌려 드릴 터인즉 거기에서 취지를 실현해 보시라고 제의하였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찰은 공유라, 어찌 한 두 사람의 생각대로 되리요마는, 될 수만 있다면 미래 불교계에 많은 서광(瑞光)이 될 것이라」 하시고, 우선 송 규 등 5인(별록4)을 내장사로 보내시었다.

원기 9년(1924·甲子) 2월에, 대종사, 이리 김제를 거쳐 내장사에 이르시니, 전 날의 의논은 승려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백 학명 주지는 크게 미안히 여기는지라, 대종사 여러 모로 그를 위안하신 후, 몇 몇 제자들을 데리고 서울에 가시어 서 중안이 주선한 집(唐珠洞)에 임시 출장소를 정하시고, 한 달 동안 머무시며 여러 인연들(본장4절 기술)을 얻으시었다.

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

제1장 새 회상(會上)의 공개(公開)

1. 불법연구회 창립 총회

원기 9년(1924·甲子) 3월에, 대종사, 서울에서 이리를 거쳐 전주(全飮光집)에 오시니 각 처에서 다수의 신자들이 모였다. 이에, 서중안 등 7인(별록5)이 발기인이 되어 [불법연구회] 창립 준비를 토의할 제, 대종사, 총부 기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리 부근은 토지도 광활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無産者)들의 생활과 각처 회원의 내왕에 편리할 듯 하니 그 곳으로 정함이 어떠하냐] 하심에, 일동이 그 말씀에 복종하였다. 또한 창립 총회 개최 장소는, 이리 부근 보광사(普光寺)로 예정하고 총부 건설지는 후일 실지 답사 후 확정하기로 하였다. 원기 9년 4월 29일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 총회를 열어 종래의 기성 조합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으로 새 회상을 내외에 공개하였다. 총회는, 영광·김제·익산·전주 지방에서 김 기천 등 14인(별록6)이 각각 그 지방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송 만경의 개회사로 개회하고, 서 중안이 임시 의장이 되어 창립 취지를 설명한 후, 규약 초안을 채택하였다. 규약에 따라, 총재로 대종사를 추대하고, 회장에 서 중안, 서기에 김 광선을 선정하였으며, 총부 본관 건설을 위하여 회원들에게 의연금을 수납하되 그 일을 회장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축사(시대일보鄭翰朝)와 회장의 답사가 있은 후 폐회하였다. 이 때 채택된 규약은, 총칙·임원·회의·회원의 권리 의무·가입 및 탈퇴·회계 및 기타 등 총 6장 22조로 되어 있는 바, 서무·교무·연구·상조조합·농업·식사·세탁의 7부를 두고, 총재 1인, 회장 1인, 부장 평의원 간사 각 약간인을 두며, 정기총회·임시총회·평의원회·월예회 등 4종의 회의를 두고, 유지는 입회금 연연금(年捐金) 의연금 농작 식리금 등으로 충용할 것을 규정하였다.

2. 총부 기지의 확정과 건설

창립 총회 후, 대종사, 각지 대표를 데리시고 이리 부근을 일일 순시하여 총부 건설의 기지를 택하시더니, 원기 9년(1924·甲子) 8월, 전라북도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全羅北道益山郡北一面新龍里 現裡里市新龍洞)에 그 터를 확정하시었다. 회장 서 중안이 기지(3천여평)대금과 건축비 일부(6백여원)를 의연하였고, 각처 회원으로부터 상당한 의연금(근8백원)이 수납되었다. 9월에 임시 요인회를 열고 총부 본관 건축을 결의한 후, 바로 공사에 착수하여, 엄동의 추위를 무릅쓰고 10여명의 전무출신과 특별 후원인들의 성심 노력으로, 11월에 비로소 목조 초가(木造草家) 2동(棟) 도합 17간(間)을 성조(成造)하니, 이것이 새 회상 총부 본관의 첫 건설이며 [불법연구회] 간판을 세상에 드러내는 처음이었다. 창립 총회 당년(원기9년·1924)의 교세는 영산(靈山) 신흥(新興) 김제(金堤) 전주(全州) 부안(扶安) 서울(京城) 진안(鎭安) 각지의 회원이 남자 60여명, 여자 70여명으로 도합 130여명이었고, 전무출신은 영광 익산을 통하여 김광선 등 13명(별록7)이었다. 부서의 조직은 인원과 사무의 미비로, 7부 중 서무부(부장吳昌建서기宋道性) 교무부(부장宋萬京) 상조조합부(서기全飮光)의 형식만 두어 사무를 취급하였고, 자산은 정관평 언답과 영산 신흥 부안 익산에 약간의 건물이 있을 뿐이었으며, 언답은 아직 해독(海毒)이 다 해소되지 않아 수익이 아주 적었다. 따라서 비록 회상의 체제는 성립되었으나, 총부의 운영과 전무출신들의 생활 방로는 심히 아득하였다.

3. 전무출신의 공동 생활

이 때 전무출신 김 광선 등은 이리(朴元石집)에 임시 주접(住接)하였으나, 적수공권으로 생활 방로가 심히 막연하던 중, 부근 송학리(松鶴里)에 척식회사 소유 토지 약간을 빌려 근근 작농한 결과, 약간의 추수를 얻어 공부의 자금을 삼게 되었으니, 이것이 새 회상 산업부의 효시이다. 그 후 재가 출가의 일심 합력으로 근근히 총부의 첫 건설은 마쳤으나, 그 유지와 생활 방로는 계속 막연하므로, 송 적벽 등이 발의하여 원기 9년(1924·甲子) 12월에 엿 제조업(製造業)을 시작하였다. 이에, 몇 사람이 주무(主務)가 되고, 모든 인원은 행상(行商)이 되어, 그 이익으로 1년간 호구(糊口)를 하게 되었으나, 이익도 박하고 외경 접촉이 심하여 공부에 방해될 우려도 있으므로, 이듬해(원기10·1925) 7월에 드디어 폐지하였다. 그 후의 생활 대책으로는 만석리(萬石里)에 척식회사 소유답 약간을 다시 빌려, 출장 작농으로 선비(禪費)를 마련하였으며, 총부 경비는 약간의 회금(會金) 수입과 임원들의 출역 농작 등으로 충당하였으니, 이는 곧 생활 종교의 체제를 세우기 시작한 작업이라 할 것이다. 당시 총부의 전무출신들은 평소 각자 가정에서 일찌기 한 번도 노동이나 행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처지였다. 폭염(暴炎)을 무릅쓰고 논과 밭에 작업하며 풍설을 무릅쓰고 거리와 마을을 배회할 때에 그 고생이 오죽하였으며, 대개는 엿밥으로 끼니를 대신하고 침구조차 부족한 누습한 방에서 종일 피곤한 몸을 쉬게 되었으니 그 간난함이 어떠하였으리요.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고생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새 회상 만난 기쁨으로 유일한 낙을 삼아서 모든 일에 조금도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석반 후에는 한 자리에 모여, 하루의 경과를 보고하고 감상과 처리건을 토론하며, 대종사께서는 간간히 법설로 대중의 공부를 지도해 주시니, 그 단란한 공동 생활은 이른 바 지상의 천국이었다.

4. 훈련법의 발표와 실시

원기 9년(1924·甲子) 5월에, 대종사, 진안 만덕산에 가시어, 한 달 동안 선(禪)(金光旋주관)을 나시며, 김대거(金大擧)를 만나시었고, 이듬해(원기10·1925) 3월에 새 교법을 지도 훈련하기 위하여 정기 훈련법과 상시 훈련법을 제정 발표하시었다. 정기 훈련은, 매년 정기로 공부를 훈련시키는 방법으로서, 동하 양기(冬夏兩期)의 선(禪)으로 하되, 하선은 음 5월 6일에 결제하여 8월 6일에 해제하고, 동선은 11월 6일에 결제하여 이듬해 2월 6일에 해제하며, 과정은, 염불(念佛) 좌선(坐禪) 경전(經典) 강연(講演) 회화(會話) 문목(問目) 성리(性理) 정기일기(定期日記) 주의(注意) 조행(操行) 수시 설교(隨時說敎) 등 11과로 정하였다. 상시 훈련은, 상시로 공부하는 방법으로서 [상시 응용 주의사항] 6조와 [공부인이 교무부에 와서 하는 책임] 6조(條)를 정하였고, 이 모든 조항을 실질적으로 대조 연습하기 위하여, 유무념 조사와 상시 일기 조사법을 정하였으며, 문자 서식에 능치 못한 사람을 위하여 태조사(太調査)법을 두어 유무념을 대조하게 하였다. 특히 일기 조사법은 매일 공부의 실행 여부만 조사 기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육신 물질 삼방면으로 혜시 혜수한 것도 대조 기재하며, 공부 사업 생활 삼방면의 의견 제출과 삼십 계문의 범과 유무도 대조 기재하되, 이 공부를 달로 검사하기 위하여 매월 단장 조사법을 정하고, 해로 검사하기 위하여 매년 교무부 보고법을 정하였으니, 그 방법이 심히 간명하고 맥락이 또한 서로 관통하여, 유무식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근기를 따라 바로 정법에 들게 하는 훈련의 강령이 되었다. 원기 10년(1925·乙丑) 5월 6일에, 대종사, 새 훈련법에 의하여 첫 정기 훈련을 실시하실 제, 총부 가옥이 아직 협착하므로 임시로 구내 개인 가옥(全飮光집) 일부를 빌려 교무 송 규의 지도 아래 10여명의 남녀 선원(禪員)이 하선 훈련을 받게 하시고, 11월에는 교무 이 춘풍(李春風)의 지도 아래 20여명의 남녀 선원이 동선 훈련을 받게 하시니, 이 양기(兩期)의 선(禪)이 새 회상 정기 훈련의 원시(元始)가 되었다. 이 정기 훈련은 일반 선원(禪員)의 공부를 단련하는 중요한 기간이 될 뿐 아니라, 초창기에 교무를 양성하는 유일한 방도로 활용되었으며, 훈련의 장소는 그 후 공회당을 신축하여, 간고한 가운데 선원 훈련의 명맥을 이어 나왔다.

5. 첫 교서의 발간과 교당들의 설치

창립 총회 때에 서 중안의 주선으로 [취지 규약서]를 임시 인쇄하였으나 그 내용이 미비하여, 이듬해 부터 매년 2회의 정기 공부에 모든 교재(敎材)를 등서 학습(騰書學習)하던 바, 원기 12년(1927·丁卯) 3월에 이 공주의 주선으로 [불법연구회 규약] [수양 연구 요론] [상조조합 규약] 등 3종의 교서를 발간하니 새 회상의 첫 교서가 비로소 공부인들에게 보급되었다. 취지 규약서로 알려진 [불법연구회 규약]에는 회상의 유래와 취지 설명과 규약을 먼저 수록하고, 연구인 공부 순서라 하여 삼강령 팔조목 삼십 계문 솔성 요론 고락 법문 등과 재가 출가 공부인들의 훈련 방법을 수록한 다음, 14개 항의 각항 세칙을 수록하여, 새 회상 교리 제도의 개요를 알게 하였고, [수양 연구 요론]에는 정정요론 상하편과 연구의 강령·연구의 진행조건·연구의 사연 조건·각항 연구 문목·공부의 진행 순서 등 7편이 수록되어, 수양 공부와 연구 공부의 지침이 되게 하였으며, [상조조합 규약]은 조합의 총칙·저금 방식·지불 방식 등을 밝혀, 신자들의 생활 향상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한 편, 교당들의 설치 상황은, 원기 9년(1924·甲子)에 익산 총부가 건설됨으로써, 영산원은 영광 지부라 이름하여 초대 지부장에 김 기천, 초대 교무에 송 벽조가 임명되었고, 봉래산 석두암은 부안 수양소로 개칭되었다. 원기 11년(1926·丙寅) 7월에는 서울 이 동진화가 창신동에 목조 초가 2동을 희사하고, 이 공주 등(별록8)이 유지를 부담하며, 김 삼매화가 치산을 담당함으로써, 경성 출장소가 발족되어, 송 도성이 초대 교무로 파견되었다. 원기 12년(1927·丁卯) 3월에는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신흥(靈光郡畝良面新川里新興)에 신흥 출장소가 설치되니, 이는 회상 초기에 이 동안이 대종사께 귀의한 후, 원기 5년(1920·庚申) 3월에 이 완철 등 10여명(별록9)과 함께 공부 비용 장만을 목적하는 묘량 수신조합(畝良守信組合)을 조직하여, 길룡리 기성조합을 법받아 소비 절약과 근검 저축을 장려하더니, 이에 이르러 신흥 출장소로 개칭하고 모든 조합원이 입교하는 동시에 조합의 전재산을 교산에 편입하였고, 교화는 당분간 영광 지부(現靈山支部)에서 출장 지도 하였다.

제2장 새 제도(制度)의 마련

1. 상조조합과 산업·육영 창립단

원기 9년(1924·甲子), 창립 총회를 마치고, 대종사, 상조조합을 신설하여 종래의 기성조합 업무를 이어 받게 하시고, 각종 자금의 저축 제도를 마련하시니, 그 종류는, 총부 각부의 자산을 통일 저축하는 각부 자금, 회원의 유지 의무금 납입을 위한 의무 자금, 정기훈련의 선비(禪費) 조달을 위한 공부비 자금, 선조의 제사 기념을 위한 헌공 자금, 회원의 각종 사업을 위한 사업비 자금, 회원의 자녀 교육을 위한 교육비 자금, 회원의 생활을 위한 생활비 자금 등이었다. 이 각종 자금은, 토지 매입과 작농, 양잠 과원 축산 원예 등에 투자하는 한 편, 영세 생활자에게 저리 융자도 하여 증식하였으며, 처음에는 조합 본점을 총부에 두었으나, 그 업무량이 영광 지방에 많으므로, 원기 12년(1927·丁卯)에 본점을 영산에 두고 총부는 지점 형식으로 업무를 분담 운영하였다. 상조조합은 초기 회상의 금고역을 담당하였으며, 초창기 교단 경제의 발전에 큰 기반이 되었다. 한 편, 총부의 7부(部)중 하나로 예정된 농업부가 창립 총회 후에도 4·5인의 조합 작농으로 근근히 기초를 유지할 뿐 계속 미미 부진하더니, 원기 12년(1927·丁卯)에 송 만경의 제안으로 산업부 창립단을 조직하고, 오 창건 등 8인(별록10)의 발기인이 총지부 각단에 호소하여 영육 쌍전의 이념 구현을 위한 산업부 창립 자금의 확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 해에 송도성의 제안으로 육영부 창립단을 조직하고, 이 동안 등 7인(별록11)의 발기인이 총지부 각단에 호소하여 제생의세의 인재 양성을 위한 육영부 창립 자금의 확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발기인들을 비롯한 각처의 모든 단원은 혼연 일체가 되어, 이듬해(원기13·1928)에는 각각 기성창립연합단(農業部創立聯合團 人材養成創立聯合團)으로 발전, 두 기관의 창립을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한 바, 서울 단원들은 절용 절식 운동, 영광 단원들은 공동 작농, 익산 단원들은 공동 양잠, 각처 임원들은 근로 작업 등 특별한 활동으로 이에 합력하였다.

2. 공부·사업 고시법과 유공인 대우법

원기 10년(1925·乙丑) 8월에, 대종사, 학력 고시법을 발표하시니, 고시 과목은 수양 연구 취사의 3과(科)로 하고, 각 과목 안에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의 5개 반(班)을 두어, 공부인의 3과에 대한 실력을 개별 고시한 후, 그 실력에 따라 반별을 정하게 하시었다. 이어서 학위 등급법을 발표하시니, 공부인의 공부 등급으로 보통부 특신부 법마상전부 법강항마부 출가부 대각여래부 등 6급을 두고, 그 중간에 각 예비부를 두어 승급을 준비하게 하시며, 승급 조항의 조사 기간은 만 3개년씩으로 하고, 승급 때에는 승급 증서의 수여와 승급 의식의 거행으로 회상의 영광을 축하하게 하시었다. 대종사, 그 해(원기10·1925)에 또한 사업 고시법을 발표하시니, 고시 과목은 창립 요론 11개조(대종경교단품34)로써 하되, 매회 12년 기념 때에나, 유공인이 열반한 때에 그 조항으로써 축조 심사하여 회상 창립에 관한 모든 성적 등급을 정하게 하시었다. 사업 등급은 창립 제 1회(回)의 1등(4천원이상)을 기준하여, 2회는 그 배(倍)요, 3회는 또한 2회의 배로 정하고, 그 이하의 등수는 매등(每等)에 반액씩을 내려서 정하며, 성적 총계는 공부 등급을 환산한 액수와 사업 등급의 액수를 아울러 편성하되, 사업 성적은 정신 육신의 근로와 물질의 의연(義捐)과 특별 시상금을 총합하여 보게 하시고, 임원은 대소 계급을 막론하고 전무출신자로 실무를 잡게 하되, 그 성적을 사업액으로 계산하여 편입하게 하시었다. 원기 12년(1927·丁卯) 1월에, 대종사, 또한 새 회상의 유공인 대우법을 발표하시니, 그 유공 종별은 ①정남 정녀로 회상을 위하여 헌신 노력한 이, ②전무출신으로 회상을 위하여 헌신 노력한 이, ③재가 회원으로 회상을 위하여 공적이 있는 이, ④법강 항마부 이상에 승급한 자녀를 희사하여 희사위에 해당한 이 등 4종(種)으로 하고, 각각 성적의 등급과 경우를 따라, 노쇠한 때 봉양하는 법과, 열반한 때 상장(喪葬)하는 법과, 열반 후 기념하는 법 등을 정하시고, 또한 사당(祠堂)을 건설하여 영원히 후세의 추모를 받게 하는 규례를 정하시어, 일제히 시행하게 하시었다.

3. 의례 제도의 개혁과 4기념례

대종사, 당시의 예법이 너무나 번거하여 사람들의 생활에 많은 구속을 주고, 경제 방면에도 공연한 허비를 내어, 사회의 발전에 장해가 있음을 개탄하시어, 원기 11년(1926·丙寅) 2월에 신정 의례를 발표하시었다. ①출생의 예로는 입태 전후에 산모와 가권이 주의하는 법과, 산아 명명하고 출생 표기 세우는 법과, 축의 등을 저축하여 교육비에 충용하는 법 등을 정하시고, ②성년의 예로는 성년식 거행하는 법과, 성인으로 대우하는 법을 정하시고, ③혼인의 예로는 혼인 소개소 두는 법과, 약혼하는 법과, 새 식순에 의하여 결혼하는 법과, 절약된 금액으로 공익 사업 하는 법 등을 정하시었다. ④상장(喪葬)의 예로는 간략한 복표로 최고 49일 착복하는 법과, 새 식순에 의하여 출상(出喪)하는 법과, 절약된 금액으로 공익 사업 하는 법과, 풍수 명당설을 타파하고 공원 묘각(廟閣) 건설하는 법 등을 정하시고, ⑤제사의 예로는 장차 자녀와 은법 자녀가 동일한 기념주 되는 법과, 새 식순으로 기념하는 법과, 절약된 금액으로 공익 사업하는 법 등을 정하시어, 이해 있는 이들 부터 먼저 실행하라 하시었다. 이 해(원기11·1926)에, 대종사, 또한 새 회상의 4기념 예법(四紀念禮法)을 발표하시니, ①공동 생일 기념은, 회상의 생일과 교도들의 공동 생일을 한 날로 합동 기념하자는 것이요, ②명절 기념은 재래의 수 많은 명절들을 한 날로 교당에서 합동 기념하자는 것이요, ③공동 선조 기념은 부모 이상 선대의 모든 제사를 한 날로 공동 기념하자는 것이요, ④환세 기념은 새 해를 교당에서 공동 기념하자는 것인 바, 이 모든 법을 실행함으로써 절약된 금액으로 공익 사업을 하는 동시에 각자의 생활에도 도움을 얻자는 것으로, 이해 있는 이들 부터 먼저 실행하라 하시었다. 신정 예법을 발표하신 후, 출생의 예는 진안 노 덕송옥의 손자(金榮奉)와 대종사의 3남(朴光振) 출생 때에, 혼인의 예는 영광 김 광선의 장남(金洪哲)과 김 태상옥(金泰尙玉)의 장녀(李普應華) 결혼 때와, 송 벽조의 차남(宋道性)과 대종사의 장녀(朴吉善) 결혼 때에, 상장의 예는 김제 서 동풍의 열반 때에, 제사의 예는 전 음광의 부친 제사 때에 각각 먼저 단행하였으며, 4기념 예법 또한 모든 인심이 아직도 번문 욕례(繁文縟禮)와 미신 풍속에 깊이 쩌려 있는 때, 각 교당 신자들이 서로 앞장서서 이를 먼저 실행함으로써, 새 세상 건설 대업에 다 같이 거룩한 선행자가 되었다.

4. 제 1대 제 1회 기념 총회

원기 13년(1928·戊辰) 3월 26일은 제 1대 제 1회 기념일에 정기 총회를 겸한 날이었다. 총회 준비를 위하여 연초부터 송 규 등 5인(별록12)이 창립 12년 간의 사업 보고서와 각 교도의 공부 사업 성적을 사정 편성하였고, 당일 총회는 송 만경의 개회사로 시작하여, 12년간의 사업 보고·역사 보고를 마친 후, 2대 회장에 조 송광(曺頌廣)을 선정하고, 각급 임원을 선임하였으며, 산업부 창립단과 육영부 창립단의 상황 보고 후 폐회 하였다. 27일 오전에는 사업 각등 유공인과 10년 이상 전무출신자 등 각항 유공인들의 기념 촬영을 하고, 오후에는 대종사 주재 아래 제 1회 사업 성적표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대종사께서는 [선진 후진이 서로 공덕을 알아 업어서라도 받들고 영접하여, 교운이 한 없이 융창하고 그대들의 공덕도 한 없이 유전되게 하라]는 간곡한 부촉을 하시었다. 제 1회 1등 유공인은 이 청춘·이 동진화·서 중안·전 삼삼·김 광선 등 5인, 2등 유공인은 김 기천·이 공주 등 2인, 3등 유공인은 이 재철·송 벽조·유 정천·송 규 등 4인, 4등 유공인은 박 사시화 등 11인(별록13), 5등 유공인은 박 세철 등 13인(별록14)으로 5등 이상 입등인이 도합 35인이요, 6등에서 12등 유공인이 278인이었다. 28일에는, 또한 대종사 주재 아래 예비 특신부 이상 승급자 68인에 대한 새 회상의 첫 승급 예식을 거행하니, 정식 법강항마부에 사후 승급으로 박 세철·서 동풍, 정식 특신부에 송 벽조 등 6인(별록15), 예비 특신부에 이 춘풍 등 60인(별록16)이었다. 제 1회 기념 총회 당년의 교세 개요를 보면, 교도 상황은, 영광·익산·서울·김제·부안·진안 등 각지를 통하여 남자 176명, 여자 262명으로 총 438명이었고, 전무출신은 20여명으로 영광·익산·서울 등지를 통하여 임원 혹은 산업부원으로 노력 중이었으며, 재산 상황은 익산 총부·영광 지부·신흥 출장소·부안 수양소·경성 출장소 등의 토지·건물·집기 등(3만3천1백9십원여)과, 상조조합에 출자금(5백여원)·저축금(2천여원) 등이 있었다.

제3장 교단체제(敎團體制)의 형성(形成)

1. 교화 기관지의 발행

제 1회 기념 총회(원기13년3월)를 마치고 제 2회에 접어 들면서 새 회상이 먼저 착수한 중요한 일은 교화 기관지의 발행이었다. 원기 13년(1928·戊辰) 5월에 월간(月刊) [월말통신(月末通信)]이 송 도성(硏究部書記) 주간(主幹)으로 창간되어 복사판으로 34호(원기15년 12월호)까지 발행하다가, 교서 편찬 등 사무 관계로 부득이 한 동안 중단되었으며, 원기 17년(1932·壬申) 4월에 복간, [월보(月報)]로 개제하여, 전 음광(硏究部長) 주간 아래 등사판으로 48호(원기18년 6월호) 까지 발행하다가, 출판법 관계로 적발되어 48호 전부를 일경(日警)에게 압수 당하고 폐간 되었다. 원기 18년(1933·癸酉) 9월, 총독부 당국의 정식 허가를 얻어, 월간 [회보(會報)](全飮光주간)를 창간, 등사판 발행을 계속하다가, 원기 19년(1934·甲戌) 12월호(會報13호)부터 이 공주(通信部長) 주간으로 인쇄판을 발행, 점차 부수가 증가되었으나, 25년(1940·庚辰) 제 2차 세계 대전이 급박해지면서 계간으로 바꾸었다가, 26년(1941·辛巳) 1월, 통권(通卷) 65호를 마지막으로 마침내 휴간하였다. [월말 통신(月末通信)]은 당시 몇 개소의 지방 교당에 법설 요지와 총부 전달 사항 및 교단 소식을 주로 보도하였고, [월보]와 등사판 [회보]는 거기에 의견 교환의 역할도 겸하였으며, 인쇄판 [회보]는 차차 교화와 문화 기능도 겸하게 되어, 일정(日政) 압제 아래 유일한 문화 활동의 명맥이 되었고, 법설 기재와 감각·감상·의견·처리·문목건 등의 제출이 많이 권장되어, 초기 교단의 정신적 유산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2. 초기 교서들의 발간

제 1회 기념 총회(원기13년3월) 이후 교단이 진행한 중요 사업의 또 하나는 초기 교서들의 편집 발간과 [회규]의 개정 시행이었다. 이미 간행된 첫 교서로 [취지규약서]와 [수양 연구 요론]이 있으나, 다 교리의 원강(元綱)이 두루 밝혀지지 못하였을 뿐더러, 제도 조직도 교세의 발전을 유감 없이 뒷받침하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원기 15년(1930·庚午)부터 대종사 몇 몇 제자(별록17)에게 그 동안 편편으로 제정 발표하신 교리 제도의 강령들을 정리 편집케 하신 후, 친감(親鑑)을 거쳐 이를 차례로 발간하시니, 원기 16년(1931·辛未) 7월에는 [불법연구회 통치조단 규약]이, 17년(1932·壬申) 4월에는 [보경 육대요령(寶經六大要領)]이 발간되었고, 19년(1934·甲戌) 5월에는 개정판 [불법연구회 회규]가, 그 해 12월에는 [보경 삼대요령(寶經三大要領)]이 발간 되었으며, 20년(1935·乙亥) 4월에는 과거 봉래산에서 초안하신 [조선불교 혁신론]이, 그 해 8월에는 [예전(禮典)]이 발간되었고, 21년(1936·丙子)에는 [회원수지(會員須知)]와 [불법연구회 약보]가, 24년(1939·己卯)에는 [불법연구회 근행법]이 각각 발간되었으며, 25년(1940·庚辰)에는 새 회가와 찬불가·찬송가 등이 제정 발표되어, 창립 제 2회 12년 간은 가위 초기 교서 편집 발간의 황금 시기를 이루었다. [통치 조단 규약]은, 총론에서 조단의 대지를 말하고, 총칙·남녀 구별의 조직·수위단의 조직과 선거 방식·각단의 조직·회의·상벌 등을 밝힌 후, 세칙으로 일기 조사법 등을 밝혔다. [육대요령]은 권두에 개교 표어·교리도·총론을 싣고, 제 1장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제 2장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제 3장 훈련편·제 4장 학력 고시편·제 5장 학위 등급편·제 6장 사업 고시편 등으로 편찬되어 있다. 개정판 [회규]는 다음 절에 설명할 바와 같고, [삼대요령]은 육대요령 가운데 제 3장 까지가 촬요 편찬된 바, 심고와 기도에 대한 설명이 제 1장 끝에 들어 있다. [조선불교 혁신론]은 총론에 혁신의 대요를 밝히고, 과거 조선 사회의 불법에 대한 견해·조선 승려의 실생활·세존의 지혜와 능력·외방의 불교를 조선의 불교로·소수인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분열된 교화 과목을 통일하기로·등상불 숭배를 불성 일원상(佛性一圓相)으로 등 7개 장(章)으로 편찬된 바, 일원상 신앙법과 일원상 조성법이 비로소 나타나 있다. [예전]은 총론에서 신정 의례의 대요를 밝히고, 제 1편 출생례·제 2편 성년례·제 3편 혼례·제 4편 상장례(喪葬禮)·제 5편 제례(祭禮)·제 6편 유공인 상장례(有功人喪葬禮)·제 7편 4기념례·제 8편 학위 승급례·제 9편 설법례 등으로 되어 있고, [회원수지]·[약보]·[근행법]등은 다른 모든 교서 중에서 발췌 편찬한 작은 책자들이다.

3. 각 조단의 정비와 새 회규의 시행

[단규]로 알려진 [불법연구회 통치조단 규약]이 발간된 것은 원기 16년(1931·辛未) 7월이었으나, 그 원칙과 세칙 초안을 대종사께서 친감 완정하신 것은 그 해 초였다. 2월에, 대종사 친히 각급 조단에 착수하시어, 그 동안 경우에 따라 남녀 합동으로 조직하였던 각급단을 다 남녀 구분으로 조직하시고, 남자 수위단원 중 실무 불능한 3명의 대리를 확정하시는 동시에, 여자 수위단 시보단을 내정하시며, 갑·을·병 3종의 예비 수위단을 각 1단씩 조직하시는 동시에, 산업·육영 두 창립단도 남녀를 구분하여 조직하시었다. 한 편, 그 해(원기 16·1931) 3월 26일에는, 대종사, 제 2차 법위 승급자를 발표하시니, 예비 법마상전부에 송 도성·김 기천·전 음광·송 규·이 동진화·이 공주·송 벽조 등 7인이었고, 총지부를 망라하여 정식 특신부가 문 정규 등 54인(별록18), 예비 특신부가 양 하운 등 48인(별록19)이었다. 또한, 새 [회규] 제정에 앞서 이미 입법된 주요 법규는, 원기 12년(1927·丁卯) 2월에 신분 검사법, 14년(1929·己巳) 4월에 은부모 시자녀법, 16년(1931·辛未) 3월에 임원 등급 및 용금 제도, 18년(1933·癸酉)에 정남 정녀에 관한 종법사 명령과 간이 일기법 등이 있어 시행되었다. 그 중 특히 신분 검사법은, 당연 등급 각 조항과 부당 등급 각 조항을 자기가 검사하여, 선악의 근성과 죄복의 요소가 어느 정도에 있는가를 스스로 비판하며, 혜수·혜시와 대부·차용을 자기가 검사하여, 복록과 부채가 어느 정도에 있는가를 스스로 알게 하여, 기질 변화와 복록 저축을 스스로 촉진하고, 회상의 인재 선택에도 도움을 얻기 위한 법으로, 연중 1차씩 행하게 하시었고, 은부모 시자녀 법은 교도간에 특별한 은의로 공부 사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은부자 은모녀의 의를 맺는 것인 바, 이 법의 시행으로 이 무렵(원기14~15)에 대종사를 비롯한 회상 원로 요인들과 후진 청년들 사이에 은부자 은모녀의 결의가 상당히 많았다. 앞 절(본장 2절)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창립 총회(원기9년4월)에서 채택한 [회규]는 시대의 추이와 교세의 발전에 따라 그 개정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원기 18년(1933·癸酉)부터 대종사께서 송 규에게 명하여 [회규]의 개정 작업을 진행케 하시더니, 드디어 19년(1934·甲戌) 3월, 총대회의 찬성을 얻어, 그 동안 시행 해온 총재·회장 아래 7부제로 된 회규를 대폭 개정하여, 종법사·회장 아래 이원 십부제(二院十部制)를 골자로 하는 총 9장 29조의 원칙(原則)과 총 12장 75조의 세칙(細則)으로 된 새 회규를 제정 시행하게 되었다. 이는 실로 새 회상이 교단의 새 체제를 형성하게 된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총재라 칭하여 오던 회상의 최고 직위를 종법사라 하게 되었고, 그 아래, 회장과 2원(院) 10부(部)를 두어 회무를 분장하되, 교정원에 교무·연구·통신·감사 4부를 두어 공부계의 모든 사무를 총관하게 하고, 서정원에 서무·상조·산업·공익·육영·공급 6부를 두어 사업계의 모든 사무를 총관하게 하였으며, 총대회를 대의 기관으로 두고, 회원은 통상 회원·특별 회원 2종으로 하되, 의무를 지키지 않는 신도 제도를 두었으며, 지방에는 지부와 출장소를 두고, 중앙에 입법 위원회를 두어 규약의 실행 장려와 감시 독려를 하게 하였다. 이 때, 종법사에 대종사, 회장에 조 송광이 유임되고, 초대 교정원장에 송 규, 초대 서정원장에 이 재철이 선임되었으며, 원기 22년(1937·丁丑)에 3대 회장에 이 용광(李庸廣), 2대 교정원장에 송 도성이 선임되었다.

4. 일원상 봉안과 교무의 훈련

원기 20년(1935·乙亥) 4월에 익산 총부 대각전이 준공되고, 그 정면 불단에 심불 일원상(心佛一圓相)이 정식으로 봉안되니, 이는 새 회상이 신앙의 체계를 확립하여 종교의 체제를 완전히 갖춘 또 하나의 중대한 사실이었다. 대종사 대각 직후 일원 대도의 제일성을 발하시고, 원기(圓機)·일원(一圓) 등의 어귀(語句) 사용과 함께 일원상을 그려 보신 바도 있었으며, 교법을 제정하실 때, 사은 곧 일원(四恩卽一圓)의 신앙법을 꾸준히 구상은 해 오시었으나, 이에 이르러 비로소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확정 시행하신 것이다. 이어서 이듬해(원기21·1936) 9월에 초량 교당, 12월에 영산 대각전과 신흥 교당, 그 이듬해(원기22·1937) 3월에 용신 교당과 원평 교당을 신축하면서 다 일제히 불단을 마련하고 일원상을 봉안하였으며, 뒤이어, 모든 교당도 일제히 불단을 신설하여 일원상을 봉안하게 하시는 동시에, 혹은 설법 혹은 법문으로 일원의 종지를 더욱 천명해 오시다가, 원기 23년(1938·戊寅) 11월 동선에는 심불 일원상 봉안법을 정식으로 제정하여 선포하시고, [심불 일원상 내역급 서원문]을 친제 발표하시었다. 이리하여 일원상은 새 회상의 최고 종지로서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이 되었으며, 그 봉안은 교당 뿐 아니라 교도 가정에도 적극 권장하여, 원기 25년도(1940·庚辰)의 각지 심불 봉안 실시 상황을 보면, 13개 지방을 통하여 180가정이 일원상을 봉안하였다. 한편, 원기 23년(1938·戊寅) 11월 21일에는 새 회상 처음으로 교무 강습회(교감柳虛一)를 개최하고 각 지방 교무를 총부에 소집하여, 대종사 친히 설법하시는 아래 40일간의 교리 훈련을 실시하시니, 이것이 새 회상 교무 훈련의 효시가 되었다. 창립 후 지부 교당이 늘어남을 따라 교무의 수효도 점차 불어났으나, 당시의 교무들은 일정한 훈련 기간을 거침이 없이 일선 교화에 나서게 되었으므로 통일적 교화를 실시하는데 아쉬움이 적지 않던 바, 이에 이르러 교리가 새롭게 이해되고, 모든 법도가 고루 단련되어 통제 있는 대중 교화에 새로운 기틀을 잡게 되었다. 또한, 교도는 매인 아래 9인 이상을 인도하여 입교하게 하자는 연원 의무 실행을 적극 권장하기 위하여, 원기 21년도(1936·丙子)에는 교무부에 연원부를 비치하고 일반 회원의 포교 활동을 장려한 바, 원기 23년도(1938·戊寅) 말에는 최고 이행자 박 사시화(364명)를 비롯하여 각 지방의 연원 의무 이행자 수가 96명에 달하였다.

5. 산업부의 발전과 산업 기관 창설

원기 12년(1927·丁卯)에 발족한 산업부 창립단은 꾸준히 기금 조성에 노력하여 오다가, 원기 13년(1928·戊辰) 10월에 박 대완(朴大完)의 의견을 받아 들여 총부앞(現大覺殿貞和院間)에 복숭아 과수원을 시작하여 좋은 성과를 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진안 만덕산에 4천 여주의 감 과수원, 황등(益山郡黃登面)에 2천 4백주와 총부 뒤 알봉(謁峰)에 7백주의 밤 과수원, 총부 부근(現圓光大學敷地一部)에 1천 여주와 영산 교당 앞에 1천 여주의 복숭아 과수원, 신흥 교당 부근 이흥(驪興)에 2천 여주의 종합 과수원이 창설되었고, 21년(1936·丙子)에는 산업부의 가옥을 독립 신축하고, 각종 묘목·약초·야채의 재배와 양계·양돈·양토(養兎) 등을 병행하여 큰 성과를 보게 되었다. 또한 22년(1937·丁丑) 9월에는 산업부의 양계를 대폭 확장하여 총 18간(間)의 계사(鷄舍)를 신축하였고, 생산된 계란은 멀리 만주에 까지 대량 수출하여 새 회상 산업 활동의 기세를 올렸다. 한 편, 원기 19년(1934·甲戌) 8월에는 이리에 보화당 한약방을 합자 회사 형식으로 창설하니, 이것이 후일 새 회상 수익 기관의 으뜸을 이루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이는 대종사께서 앞으로 교단 자선 병원(慈善病院이름濟衆院)의 설립 기금과 교화 교육 사업의 기금을 마련하실 뜻으로 설립하신 것인 바, 그 동안 신정 예법의 실행에 의하여 저축된 총지부 일반 교도의 공익금(公益金1만원)을 총 투자하였으며, 대표 이사 이 재철(庶政院長겸임)과 첫 실무 임원(이사 李東安 의사 朴理碩)이 그 발전의 기반을 다졌다. 또한, 원기 25년(1940·庚辰) 2월에는 삼례수계리(三禮岫溪里)에 임야 7만평을 사들여 삼례 과수원을 창설하니, 자본금은 각 지부 출장소의 유지비 자금(維持費資金7천여원)을 수합 투자하였으며, 초대 감독에 이 동안(産業部長겸임)이 발령되고, 첫 실무 임원(주무 金碩奎 기사 丁一持)이 파견되어 황도(黃桃)를 주로 하는 종합 과수원을 시작하였다. 삼례 과수원은 그 후 삼창과원(三昌果園)·수계 농원(岫溪農園)·은산재단 수계농원 등으로 개칭되면서 주로 새 회상 기본 인재 양성의 산업 도량으로 발전하였다.

6. 제 2회의 교세와 사회 여론

원기 25년(1940·庚辰) 4월은 창립 제 1대 제 2회의 결산 총회기에 해당하였으나, 시국 관계로 기념 행사는 일체 갖지 못하고 정례 총회에 지방 회원의 교리 강연회를 처음 겸행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당년도 말 사업 보고에 의하면 교도 수는 특별 회원 871명, 통상 회원 5,083명, 합계 5,954명이었고, 전무출신은 80여명이었으며, 교당 수는 제 1회(원기13년3월) 이전에 설립된 영산·익산·서울·신흥과, 원기 14년(1929·己巳)에 마령, 15년에 좌포·원평, 16년에 하단, 19년에 남부민, 20년(1935·乙亥)에 전주·대판(日本 大阪), 21년에 관촌·초량, 22년에 대마·신하·용신·개성, 23년에 남원·이리, 24년에 운봉·화해 등 교당이 차례로 설립되어 도합 21개소가 되었고, 당년(원기25·1940)에 대덕·호곡 등 교당이 신설되었다. 그 중 특히 일본 대판에 교당이 설립되어 초대 교무 박 대완이 부임한 일은 새 회상 해외 포교의 효시이며, 원기 22년(1937·丁丑)에 신 영기(申永基)는 총부 사무실을 희사하고, 25년(1940·庚辰)에 몇 몇 특지가(별록20)는 총부 도서실을 마련, 총부의 면모를 향상시켰다. 한 편, 새 회상 공개 이후, 일반 사회의 여론은 한결 같이 우호적이고 고무적이었다. 그 중 중요한 몇 가지를 들면, 원기 13년(1928·戊辰) 11월 25일자 동아일보가 [세상 풍진 벗어나서 담호반(淡湖畔)의 이상적 생활, 정신 수양·사리 연구·작업 취사의 강령하에 움직이는 4백 회원, 익산 불법연구회의 특별한 시설]이라는 제목으로 새 회상 탐방 기사를 낸 후, 19년(1934·甲戌) 5월 28일자 일본의 대판 조일신문이 [불교의 진리에 입각, 근검 역행을 실천, 동지 5백이 공동 생활을 하는 반도의 새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새 회상을 소개하였다. 20년(1935·乙亥) 7월에 조선 총독부가 발간한 조사자료 제 42집에는 [본회는 대체로 미신을 타파하고 자연의 원리에 바탕하여, 민중의 근면을 장려한 바 있어 종교적 진흥회로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평하고, 그 자료 [전선 교별 영향표]에는 [계몽상 좋은 영향 있다. 근로 정신을 양성하고, 일면, 실지 작업으로써 일반에게 범(範)을 보인다]고 되어 있다. 원기 21년(1936·丙子)에는 민족 지도자 안 도산(島山安昌浩)이 총부에 내방하여 찬양과 격려(대종경실시품45)를 아끼지 않았고, 22년(1937·丁丑)에 조광 6월호가 인식 부족한 비방 기사를 실었다가 다음 호에 찬양 기사를 낸 후, 그 달부터 매일신보·조선일보·중앙일보와, 26년(1941·辛巳)에 경성일보 등이 각각 수일 간에 연재 기사로 새 회상의 심전 계발 운동·종교 혁신 운동·문자 보급 운동·종교 생활화 운동을 대대적으로 찬양 보도하여, 창립기 새회상의 발전을 알뜰히 격려하고 그 참 면목을 일반 사회에 널리 인식 시켰다.

제4장 끼쳐주신 법등(法燈)

1. 시국의 긴박과 계획의 보류

원기 25년(1940·庚辰) 4월로 새 회상은 창립 제 1대 제 3회를 맞았으나, 때는 이미 중일 전쟁이 고비에 올라, 일경의 주목과 간섭은 날로 심하고, 대종사 또한 스스로 오래 머무르시기 어려움을 짐작하시어, 그 동안 뜻해 오신 몇 가지 계획 사업을 추진 해 보시었으나, 일정의 방해로 다 좌절되는 가운데, 갈수록 조심스러운 나날을 지내시게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일정 당국은 우리의 예회 순서에 이른바 국민 의례를 강제 편입시키고, 모든 의식 수입은 국방 헌금하도록 강요하였으며, 형사를 파견하여 대종사와 교단을 감시하고, 가지 가지 구실로 여러 차례 간부를 구속하였으며, 그 동안 써 내려 온 회상의 시창 연호 사용을 금지하고, 회보 발행의 중지를 불가피하게 하였으며, 26년(1941·辛巳) 12월에 소위 대동아 전쟁이 일어나자, 이듬 해 3월에는 임시 보안령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결사 존속계(結社存續屆)를 제출케 한 후 교당의 신설에 은연 중 제약을 가하고, 불교 연맹이라는 일인 승려 주동 단체에 참가시켜 시국 행사에 자주 동원케 하였으며, 동하 선기와 예회 횟수를 감축시켜 일어 보급과 근로 작업에 동원시키고, 더러는 교당을 그들의 소위 연성 도장(鍊成道場)으로 임의 사용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대종사께서는 의연(毅然)하신 태도로 그들을 대처하시고 소극적인 협력으로 그들을 무마하시다가, 25년(1940·庚辰) 1월에는 교역자 양성 전수 학원으로 유일 학원 설립의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시일만 천연하다가 이듬해에 좌절되었고, 27년(1942·壬午) 4월에는 탁아소 겸 보육원으로 자육원(慈育園) 설립을 청원하였으나, 그것도 좌절되었으며, 이미 설립된 산업 기관들도 시국이 날로 긴박해 짐을 따라 거의가 답보 또는 중단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당시 일정 당국은 친일적 단체를 제외하고는 대소를 막론하고 한인 단체의 존립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일본이 본시 불교국이라 불법을 두대하는 회상을 공공연히 탄압하지는 못하고, 사전 검열 사후 보고라는 엄격한 규제 밑에 새 회상의 일동 일정을 샅샅이 감시 제약하였다. 이에, 대종사께서는 모든 신규 계획 사업을 다 보류하시고, 그 동안 몇 몇 중진 제자(宋道性등)의 개인 명의로 등기되어 있던 교산들을 27년(1942·壬午) 5월에 공증 증명케 하시었으며, 그 해 10월 부터는 강연히 기회를 지어 각지 교당을 최후로 순회하시어, 교도들의 신성과 결속을 다져 주시었다.

2. 최종 회규의 시행과 전법 게송

이원 십부제(二院十部制)를 골자로 하는 새 회규를 시행한 후 만 7년만인 원기 27년(1942·壬午) 4월 26일에, 종법사와 회무총장 아래 5부(部)를 두는, 불법연구회 시대 최후의 회규가 채택 시행되었다. 원기 26년(1941·辛巳)부터 박 장식(朴將植)에게 명하여 기초케 하신 이 회규는 총 12장 250조로 되어 있는 바, [하시(何時)든지 그 임무를 대행 할 자격자가 있을 때 교체]하기로 되어 있던 종법사의 임기를 6년제로 규정하고, 회장과 양원장 대신 회무총장 1인을 두며, 종전의 10부를 총무·교무·서무·공익·산업 5부로 줄이고, 총부 중요 직원으로 원의(院議)를 조직하여 총부 사무의 원활을 기하며, 지방에는 수반 지부를 두어 관내 교당을 통할하게 하고, 총지부 중요 직원으로 본지부 연합회를 조직하여, 종법사 선거, 수위단원 선거 등을 하게 하며, 임기 6년인 남녀 각 9인의 수위단원과 단장 1인으로 수위단회를 조직하여, 종법사를 보좌하는 최고 기관으로 하였고,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의 제도를 상세히 규정한 것 등이 특색으로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초대 회무총장은 대종사께서 겸대하셨고, 새 인물로 5부장(별록21)이 임명되어, 사무 체제는 간소화 되었으나, 시국이 더욱 긴박해 짐에 따라 새 체제는 충분한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 무렵 부터 대종사께서는 열반의 시기가 임박함을 짐작하신 듯, 그 동안 진행 중이던 정전(正典)의 편수를 자주 재촉하시고, 26년(1941·辛巳) 1월 28일에는 선원 대중에게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는 게송과, 동정간 불리선 법(動靜間不離禪法)을 함께 내리시며 [옛 도인들은 대개 임종 당시에 바쁘게 전법 게송을 전하였으나, 나는 미리 그대들에게 이를 전하여 주며, 또는 몇 사람에게만 비밀히 전하였으나, 나는 이와 같이 여러 사람에게 고루 전하여 주노라. 그러나, 법을 오롯히 받고 못받는 것은 그대들 각자의 공부에 있나니, 각기 정진하여 후일에 유감이 없게 하라] 하시었다. 대종사, 그 후 부터는 예회·야회·선(禪) 시간 등 모든 법회에서 생사 인과에 대한 법설들을 주로 많이 하시고, 자주 제자들에게 부촉 하시기를 [내가 이제는 깊은 곳으로 수양을 가려 하노니, 내가 만일 없더라도 마음을 더욱 추어 잡으라]하시고, 하루는 송 규에게 [내가 여기에 오래 머무르기 어렵겠노라]하시며, [자력으로 대중을 거느려도 보라]고 부촉하시었다. 또한 28년(1943·癸未) 1월에는 새로 정한 표어(處處佛像事事佛供無時禪無處禪)들과 교리도를 발표하시며 [내 교법의 진수가 여기에 들어 있건마는 나의 참 뜻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꼬]하시며 [큰 결정을 세워서 외길로 나아가야 성공이 있으리라]하시고, [스승이 법을 새로 내는 일이나 제자들이 그 법을 받아서 후래 대중에게 전하는 일이나 또 후래 대중이 그 법을 반가이 받들어 실행하는 일이 삼위 일체 되는 일이라 그 공덕도 또한 다름이 없나니라] 하시었다.

3. [불교정전]의 편수 발간

원기 25년(1940·庚辰) 9월부터 대종사께서는 교리에 능숙한 몇 몇 제자(별록22)에게 명하시어 그 동안의 모든 초기 교서들을 통일 수정케 하시고, 27년(1942·壬午)부터는 그 편찬을 자주 재촉하시며, 감정(鑑定)의 붓을 들으시매 시간이 밤중에 미치는 때가 잦으시더니, 드디어 성편(成編)되매, 바로 인쇄에 부치라 하시고 [때가 급하여 이제 만전(萬全)을 다하지는 못하였으나, 나의 일생 포부와 경륜이 그 대요는 이 한 권에 거의 표현되어 있나니, 삼가 받아 가져서, 말로 배우고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이 법이 후세만대에 길이 전하게 하라. 앞으로 세계 사람들이 이 법을 알아 보고 크게 감격하며 봉대할 사람이 수가 없으리라] 하시었다. 그러나, [불교정전]은, 일정 당국의 출판 불허로 발간이 지연되다가, 불교시보 사장 김태흡(金泰洽)의 명의로 허가를 얻어, 28년(1943·癸未) 3월에야 인쇄에 회부, 대종사 열반 후인 그 해 8월 비로소 발행 되었다. 이 [불교정전]이 후일 [원불교 교전]이 발간되기까지 19년 동안 새 회상의 유일한 통일 교서였다. [불교정전]의 편차는, 권두에 일원상과 사대 강령·표어·교리도·설립 동기·서 등이 있고, 전 3권 중 권 1에는 제 1편 개선론 제 2편 교의 제 3편 수행으로 새 회상의 원경(元經)이, 권 2에는 금강경·반야 심경·사십 이장경·죄복 보응경·현자 오복덕경·업보 차별경 등 6편의 불경이, 권 3에는 수심결·목우 십도송·휴휴암 좌선문·의두 요목 등 4편의 조론(祖論)이 편입되어 있었다. 원경인 권 1의 세차(細次)를 보면, 제 1편 개선론은 총 11장으로 종전의 혁신론 내용이 거의 그대로 수정 편입되었고, 제 2편 교의(敎義)에는 사대 강령·일원상·게송·사은·사요·삼학·팔조·삼대력·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 관계 등 9개 장이 편입되었으며, 제 3편 수행에는 일상 수행의 요법·공부의 요도 정기 훈련 과목급 해석·공부의 요도 상시 훈련 과목급 해석·일기법·염불법·좌선법·무시선법·계문·솔성 요론·최초 법어·참회문·고락에 대한 법문·병든 가정과 그 치료법·영육 쌍전문·법위 등급과 그 해의(解義) 등 15개 장이 편입되어 있었다. 이 중 새로 보이는 장(章)들로는 권두의 표어, 권 1의 사대강령·일원상·게송·염불법·좌선법·무시선법·참회문·병든 가정과 그 치료법·영육 쌍전문 등이고, 교리도가 수행·신앙 양문(兩門)으로 바뀌었으며, 심불 일원상이 법신불 일원상으로, 사요가 자력 양성 지자 본위 타자녀 교육 공도자 숭배로, 삼강령 팔조목이 삼학 팔조로, 법위의 6부(簿)가 3급(級) 3위(位)로 되는 동시에, 권2·권3이 전적(全的)으로 새로 편입되어 불법과의 연원 관계가 더욱 뚜렷해 졌고, 최초 판에만 있던 양대은(兩大恩)(교의3장)은 출판 허가 과정에서 편입되었다가 해방 후 삭제되었다.

4. 대종사의 열반과 정산 종법사 추대

원기 28년(1943·癸未) 6월 1일, 대종사께서 열반하시었다. 이 해 5월 16일, 총부 예회에서 설법하시기를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고, 범부가 깨쳐 부처가 되며, 제자가 배워 스승이 되는 것이니, 그대들도 어서어서 참다운 실력을 얻어 그대들 후진의 스승이 되며, 제생 의세의 큰 사업에 각기 큰 선도자들이 되라. 육신의 생사는 불보살이나 범부 중생이 다 같은 것이니, 그대들은 또한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으며, 공왕 공래가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생사가 일이 크고 무상은 신속하니 가히 범연하지 못할 바이니라] 하시고, 그 날 오후 위석(委席)하시어, 15일 후인 이 날 오후 두시 반 거연히 열반하시니, 세수(世壽) 53세요 개법(開法) 28년 이었다. 모든 제자의 애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일반 사회의 차탄(嗟嘆)하는 소리 연하여 마지 아니 하였으며, 허공 법계와 삼라 만상이 다 같이 슬퍼하는 기상을 보이었다. 6월 6일 오전 10시, 총부 대각전에서 경향 각지의 수천 대중과 불교 연맹 이리 7종(宗) 승려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한 영결식을 거행하고, 이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7월 19일 종재식을 마치고 이리시외(金江里)묘지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대중이 다 창황 망조한 가운데 초종 장례는 김 태흡이 주례하였고, 종재에는 총독부 고관들의 존경을 받던 일본 명승 상야 순영(上野舜潁)이 참석하여 설법 중 흐느낌을 금치 못하였다. 대종사의 장례 행사를 마치고, 6월 7일, 수위단회에서는, 초창기 이래 수위단 중앙단원이던 정산(鼎山) 송 규 법사를 후계 종법사로 추대하고, 6월 8일에 새 종법사 취임식을 총부 대각전에서 거행하였다. 정산 종법사는 원기 전 16년(1900·庚子) 음 8월 4일에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慶尙北道星州郡草田面韶成洞)에서 구산 송 벽조(久山宋碧照)와 준타원 이운외(準陀圓李雲外)의 3남매 중 장자로 나시었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총명하고 국량이 호대하며, 기상이 화청하여 신성한 풍이 보였으며, 8세부터 가문의 전통에 따라 유서(儒書)를 대강 통독하시었으나, 거기에는 재미를 얻지 못하고, 과거 성현들의 사적을 즐겨 읽으며 [나도 장차 천하의 큰 공부로 천하의 큰 사업을 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어 보리라]고 스스로 발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혹은 이인 은자를 찾아 강호와 산곡을 순력도 하고, 한 칸 초당에 두문 정좌(杜門靜坐)하여 심공을 계속도 하시다가, 종종의 이적이 스스로 나타나 이웃을 놀라게 한 일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의 발원은 날로 깊어져, 17세 때, 전라도로 건너와, 여러 교파를 차례로 역방하시다가, 정읍 화해리(井邑花海里金海運집)에 우거 중 대종사의 친영을 받아, 원기 3년(1918·戊午) 7월에 대종사께 오시고, 약관 19세로 수위단 중앙위에 서임(叙任)되시며, 법인 성사를 8인 동지와 함께 혈인의 이적으로 성취하시었다. 그 후, 봉래산에서 대종사를 모시고 5년 동안 새 교법의 초안을 보좌하시고, 원기 9년(1924·甲子)부터는 익산 총부 건설에 모든 동지와 수고를 함께 하시며, 12년 동안 교재 연구와 인재 양성에 주로 당무하시었다. 원기 21년(1936·丙子)부터 6년 간은 영산에서 성지 사업과 후진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시며 [창건사]를 초안하시고, 원기 27년(1942·壬午)부터는 다시 총부에서 [정전] 편찬을 도우시며, 교정 전반에 보필의 역을 다하시다가, 대종사의 열반에 따라 후계 종법사로 추대 되시었다.

제5장 교단체제(體制)의 완비(完備)

1. 일정의 탄압과 해방

정산 종법사 취임 후 당면한 첫 난관은 패전의 빛이 날로 짙어져 가는 일정 당국의 노골적인 탄압과 수탈에 대처하는 일이었다. 일경은 대종사께서 열반하시면 내분으로 교단이 자멸할 것을 은근히 기대하였으나, 일사 불란한 계승 전진을 보고는 탄압과 수탈을 가중하였다. 총부를 비롯한 각 교당의 범종이 헌납이라는 미명 아래 강제 공출되고, 모든 법회는 집회계를 제출하여 임석 경관의 설교 감청(監聽)을 받아야 했으며, 국방 헌금과 근로 동원이 가중됨은 물론, 산업부의 농작물은 강제 공출되어 총부 대중의 식량 사정이 절박해 졌고, 징병 징용 훈련 등으로 남자 청년 임원들은 집단 생활이 어렵게 되어, 산업대라는 이름으로 각지에 분산되고, 여자 청년 임원들도 정신대를 면하기 위하여 사무 요원을 제하고는 공장 혹은 병원에 분산 취업하였다. 원기 30년(1945·乙酉)부터 그들은 교화단 조직을 위험시하여 이를 금지 하였고, 필경에는 군부를 앞장 세워 소위 불교의 황도화(皇道化)라는 마지막 계획에 새 회상을 끌어들여 [정전]과 [회규]까지 그들의 국체 국책에 맞도록 개편 시행 할 것을 강요하고 나섰다. 이에, 정산 종법사는 일찍부터 대종사를 존경하던 박문사(博文寺)의 상야 순영 등 몇 사람에게 부탁하여 그 예봉을 서서히 무마하는 한 편, 지방 순회를 빙자하여 부산에서 시일을 천연하시다가, 8·15 해방을 맞아 그 위경을 면하고, 희망이 양양한 교단 발전사의 새 장(章)을 기록하게 되었다.

2. 전재 동포 구호와 건국 사업

고대하던 해방은 맞았으나, 과도기의 무질서와 혼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운데, 전재 동포들은 만주에서 일본에서 물밀듯이 돌아 왔다. 건국 사업에 협력하는 첫 길은 귀환 전재 동포의 구호라고 생각하신 정산 종법사는 원의(院議)의 찬동을 얻어, 원기 30년(1945·乙酉) 9월 4일 이리 역전과, 9월 10일 서울 역전에 [귀환 전재 동포 구호소]를 설치하게 하여, 서울에서는 6개월 반 동안, 이리에서는 13개월 반 동안,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어 방황하는 전재 동포들에게 식사 의복의 공급과 숙소 안내, 응급 치료와 분만 보조 및 사망자 치상(治喪) 등으로 자비의 손길을 뻗치게 하시었다. 구호 사업은, 총부 간부 일부와 청년 임원들이 동원되어 주로 지휘에 당하고, 20 여개 지방의 교도들이 자진 동원하여 1주일씩 교대로 노력한 바, 그 알뜰한 활동은 당시 모든 구호 단체의 사표가 되었고, 일반 사회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부산에서도 3개월, 전주에서도 5개월 동안 부(府) 당국의 구호 사업에 재가 출가의 많은 인원이 동원하여 적극 협력하였다. 당년도 사업보고에 의하면 4개 지구의 구호소에서 구호 받은 동포수가 80 여만명, 구호에 동원된 교도 수가 5백 여명, 교도 동원 연 일수(延日數)가 1만 3천 여일, 동원 대신 노임 제공과, 동원에 따른 제반 비용이 상당액(약 1백2십만원)에 달하였다. 이 때 서울 구호소에서는 [허영의 생활을 안분의 생활로, 원망의 생활을 감사의 생활로!] 등 교강(敎綱)의 정신으로 작성한 전단(傳單) 수 십만매(枚)를 구호 받는 동포들에게 돌렸고, 귀환 학병들을 위한 사상 강연회를 주최하였으며, 한남동 정각사(漢南洞正覺寺)에 수 많은 전재 고아를 수용, 서울 보화원(초대원장黃淨信行)을 발족시킴으로써 새 회상 자선 사업 기관의 효시를 이루었고, 수위단 중앙 단원 송 도성은 구호 중 전염병으로 마침내 순직하였다. 한 편으로는, 종전의 총부 야학원을 개방하여 구내 아동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이듬해(원기31·1946) 1월, 교무 강습회에 한글 학회 강사를 초청하여 교육을 받아, 전국 교당에서 일제히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한 바, 수강생이 도합 4천여명에 달하였다. 또한, 총부 서울 간에 연락할 사항이 빈번해 짐에 따라 정각사에 총부 출장소(초대소장金大擧)를 병설하여 대외 교섭, 방송 교화, 서울 교구의 지도 등에 당하게 하였으며, 한 편으로는 서울 용산의 용광사(龍光寺), 부산 서정(釜山西町)의 신사, 이리 동산동의 신사 터 등 귀속 재산을 불하 받아, 서울 지부·경남 지부·이리 지부로 각각 발전시켰다. 이 때(1945년10월)에 정산 종법사는 [건국론]을 지어, 시국에 대한 소감을 밝히시니, 그 요지는 정신으로써 근본을 삼고, 정치와 교육으로써 줄기를 삼고, 국방 건설 경제로써 가지와 잎을 삼고, 진화의 도로써 그 결과를 얻어서, 영원한 세상에 뿌리 깊은 국력을 잘 배양하자는 것이었다.

3. 유일학림의 개설

해방 이듬 해인 원기 31년(1946·丙戌) 5월1일, 전문적 교역자 양성 기관으로 총부 구내에 유일 학림(학장朴將植학감朴光田)이 개설되었다. 일찍부터 대종사께서 교단 인재 양성 전문 기관의 설립을 뜻하시어, 총부에 선원(禪院)과 영산에 학원(學院)을 두어 오시었다. 그러나 교역자 양성의 구실을 다하지는 못하므로, 원기 25년(1940·庚辰)에 [유일학원]을 총부 구내에 설립코자 각방 노력하시었으나, 일정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셨던 바, 이에 이르러 그 유지의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유일 학림은 수업 연한 각 3년인 중등부와 전문부의 2부 편제로 발족하여, 정전을 비롯한 교학(敎學) 과목과 불교학을 비롯한 교양 과목들을 아울러 학습하게 하였는데, 중등부 남녀 46명, 전문부 남녀 34명이 제1기로 입학하였고, 그 중 교단 공비생이 31명이었다. 정산 종법사는 개학식에 훈시 하시기를 [그대들은 먼저 유일(唯一)의 참 뜻을 알아 유일한 목적과 유일한 행동과 유일한 성과를 얻으라. 유일한 목적이란 곧 제생 의세요 유일한 행동이란 곧 무아 봉공이요 유일한 성과란 곧 일원세계(一圓世界)의 건설이니, 지금은 비록 좁은 교실에 학인의 수효도 많지 못하나, 장차 수없는 도인들이 여기에서 쏟아져 나와 넉넉히 세계를 제도하게 되리라] 하시었다. 이 유일 학림이 모체가 되어 중등부는 후일 원광 남녀 중고등 학교로, 전문부는 원광 대학교로 각각 발전하였다.

4. [원불교] 선포와 교헌 반포

해방이 되자 총부에서는 교명을 [원불교]라 내정하여 교헌을 새로 기초하며, 재단 법인 등록 절차도 밟아, 원기 32년(1947·丁亥) 1월16일 [재단법인 원불교](이사장柳虛一)의 등록 인가가 나옴으로써 그 해 4월 총회에 공식으로 교명의 결정을 보고하였고, 1년 동안 교헌을 더 손질하여 이듬 해인 33년(1948·戊子) 4월 26일 총대회(總代會)에서 [원불교 교헌]의 정식 통과를 보는 동시에, 27일 총부 대각전에서 교명 선포식을 가져, 새 회상은 [원불교]라는 정식 교명을 천하에 공시하였다. 정산 종법사는 [원(圓)은 곧 만법의 근원인 동시에 또한 만법의 실재인지라, 모든 교법이 원(圓) 외에는 다시 한 법도 없는 것이며, 불(佛)은 곧 깨닫는다는 말이요 마음이라는 뜻이니, 원(圓)의 진리가 아무리 원만하여 만법을 다 포함하였다 할지라도 깨닫는 마음이 없으면 이는 다만 빈 이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圓) 불(佛) 두 글자는 원래 둘이 아닌 진리로서 서로 떠나지 못할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교명의 뜻을 설명하시었다. 한 편, 총 2편 24장 225조로 된 [원불교 교헌]의 반포는 새 회상이 정식 교명과 함께 교단의 새 체제를 정립하여, 명(名)과 실(實)이 함께 하나의 새 종교로 거듭 출발하게 된 획기적인 사실이었다. [원불교 교헌]은 제 1편 교정(敎政)이 총 15장 138조로서 교명을 원불교, 본존을 일원상, 본경을 불교정전, 대표를 종법사로 규정하는 동시에, 교단 최고 결의 기관으로 중앙 교의회와 최고 집행 기관으로 중앙 총부를 두되, 중앙 총부에 교정원과 감찰원을 두며, 교정원에 교무·서무·산업·재무 4부와, 감찰원에 감사·사서 2부를 두게 되어 있으며, 종법사의 최고 자문 기관으로 수위단회를 규정하였다. 제2편 교제(敎制)에는 전무출신·거진출진·희사위·공부 등위·사업 등급·법계·연원·은족·부칙 등 9개 장이 있는 바, [교조 소태산 대종사로 위시하여 법계를 계산한다]는 것과 [법계는 연수로써 계산하되 매대수를 36년으로 한다]는 것과 [영모전을 건설한다]는 것과 [영모전 향례는 연중 2차씩 거행한다]는 것 등이 규정되어 있다. 또한 새 교헌에 의한 제 1회 중앙 교의회는 종법사와 수위단원은 제1대 기념 총회 연도(원기 38년 4월)까지 유임케 하기로 하고, 초대 교정원장에 유 허일(柳虛一) 초대 감찰원장에 오 창건을 선임하였으며, 중앙 교의회 의장은 당연직으로 교정원장이 겸임하였다.

5. 수위단회의 기능화

불법연구회의 최종 [회규]가 수위단회를 종법사 보좌 기관으로 하고 1개 항의 의결 사항만을 규정한데 대해 [원불교 교헌]은 수위단회를 [종법사의 최고 자문에 응하는 기관]으로 하고 5개 항의 의결 사항을 규정하여 법적으로 수위단회의 기능을 확대하였으며, 사실상 이로 부터 수위단회는 이단치교의 중심이 되기 시작하였다. 초창기 남자 수위단의 첫 조직과 법인 성사의 성취 사실은 이미 기술하였거니와, 원기 11년(1926·丙寅)에 박 세철의 열반으로 이 동안이 입단하고, 이 순순·박 동국·유 건의 대리로 송 도성·전 음광·조 갑종이 내정되었다가 16년(1931·辛未) 2월에 정식 입단하였으며, 그 해 3월에 여자 수위단 시보단이 처음 조직되었으나, 기도 행사 중 뒤로 미루었다. 원기 20년(1935·乙亥)에 김 기천의 열반으로 유 허일, 24년에 김 광선의 열반으로 박 대완, 26년에 이 동안의 열반으로 서 대원(徐大圓), 28년 4월 개편 조단으로 이 완철이 입단하는 동시에, 여자 수위단이 대종사에 의하여 새로 내정되었다. 여자 수위단은, 단장 대종사, 건방(乾方) 일타원 박 사시화(一陀圓朴四時華대리金永信), 감방(坎方) 이타원 장 적조(二陀圓張寂照대리曺專權), 간방(艮方) 삼타원 최 도화(三陀圓崔道華대리曺一貫), 진방(震方) 사타원 이 원화(四陀圓李願華대리徐大仁), 손방(巽方) 오타원 이 청춘(五陀圓李靑春대리吳宗泰), 이방(离方) 육타원 이 동진화(六陀圓李東震華), 곤방(坤方) 칠타원 정 세월(七陀圓鄭世月), 태방(兌方) 팔타원 황 정신행(八陀圓黃淨信行), 중앙(中央) 구타원 이 공주(九陀圓李共珠)였다. 그 해(원기28·1943) 6월, 대종사 열반 후 개편 조단으로 송 혜환, 29년, 이 재철 열반으로 김 대거가 입단하였으며, 30년(1945·乙酉) 1월25일, 여자 수위단이 실무단으로 발족함에 이르러, 5인의 대리 단원이 정식 입단하고, [남녀 정수위단]이 비로소 [회규]에 따라 실무 체제를 갖추었다. 그 후 31년 4월에 남자 수위단 제 8차 보결 조단이 있었고, 38년(1953·癸巳) 4월에 창립 제 2대를 맞아 첫 총선거로 상당수 남녀 단원의 개편이 이루어 졌다. 39년(1954·甲午) 4월에 정산 종법사는 수위단회와 교무 연합회에 내리신 유시로 [수위단회의 위신과 직능을 더욱 강화하여 교단 통치의 핵심체를 삼으라] 하시었고, 이 뜻은 44년(1959·己亥)의 교헌 개정에 충분히 반영되었다. 54년(1969·己酉) 5월에는 그 동안 총무부가 겸행해 온 수위단회 사무처를 독립 발족(초대처장金允中)하여 분과제와 전문위원제를 실시함으로써 수위단회는 명(名)과 실(實) 함께 교단 최고의 의결 통치 기관이 되었으며, 창립 제2대에 들어서서 반백년 기념대회 연도까지 4차의 총선거와 남녀 각 3차의 보결 조단이 있었다.

6. [원광] 창간과 6·25 경난

월간 [회보]가 휴간 된지 9년만인 원기 34년(1949·己丑) 4월에 원광사가 발족되고, 그 해 7월에 월간 [원광](주간李恩錫편집李空田)이 창간 됨으로써 교단의 교화 기관지가 다시 나오게 되었다. 정산 종법사는 창간호 권두에 [일원지광 편조시방(一圓之光遍照十方)]이라 휘호(揮毫)하시고, [무엇이나 진실한 일은 아무리 없애려 하여도 필경은 있어지는 것이요, 거짓된 일은 아무리 있으려 하여도 필경은 없어지고 마나니라]는 요언을 실으시었다. [원광]은 5호를 내고 6·25 동란으로 중단되었다가, 37년(1952·壬辰) 4월에 보화당(이사宋慧煥)과 이리 고등선원(교감李雲捲)이 합력하여 복간 하였으며, 40년(1955·乙未) 3월에 다시 총부로 옮긴 후, 42년(1957·丁酉) 2월에 교도(부산金白蓮)의 후원으로 자영(自營) 인쇄 시설을 갖추고, 교단 출판 업무의 일부까지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원기 35년(1950·庚寅)에 6·25동란이 일어나, 호남 지구가 위태롭게 되자 총부도 모든 사무를 쉬고 상주 대중의 지방 분산을 개시하였다. 7월19일 공산군이 이리 익산 지구에 침입, 호남 주둔군 본부를 총부에 두게 되매, 부득이 총부 구내의 모든 건물과 시설을 내어 주고, 몇몇 남은 임원(별록23)이 총부 외곽에서 정산 종법사를 모시고 폭격 아래 작업으로 총부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9월 29일, 연합군이 이리 익산 지구를 수복하자 생기를 겨우 회복하여, 지리 멸렬된 문서 주택 등을 수습하는 한 편, 사무 태세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10월 4일에는, 정산 종법사의 명에 의하여, 각지 교당에 공한을 발송, ①감정이나 복수의 행동에 흐름이 없이 일원(一圓)의 진리에 입각한 원만의 행을 쌓도록 철저 지도할 것, ②전화를 입은 교도 가정에는 빠짐없이 위문하고, 희생자에게는 공동 천도재를 교당에서 거행할 것, ③위험이 없는 교당에서는 예회 야회를 다시 여행(勵行)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당시, 경난이 자심하였던 예로는, 서울 보화원의 완전 소실과, 영광 지방 각 교당의 장기 수난 중, 특히 영산원의 완전 소개와, 개성·춘천 교당의 일시 소개 등이었으며, 희생자는 전무출신 3명, 재가 요인 5명이 있을 뿐이었다.

제3편 성업(聖業)의 결실(結實)

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全文제1편 개벽(開闢)의 여명(黎明)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제3편 성업(聖業)의 결실(結實)

제1장 성업봉찬(聖業奉贊)사업

1. 대종사 성탑의 봉건과 봉찬사업 준비

원기 34년(1949·己丑) 4월 25일, 총부 구내 영모원(永慕園) 송림 안에 대종사 성탑을 봉건하고, 성탑에 성해 입탑식(聖骸入塔式)을 거행 함으로써 대종사 성업 봉찬 보본 사업이 그 막을 올렸다. 그 동안 각지 교도의 알뜰한 성금을 모아, 황등산 화강석으로 조성한 대종사 성탑은, 연화를 양각(陽刻)한 기단(基壇)위에 연화대석을 받치고, 원석(圓石)을 올려, 그 안에 성해(聖骸)를 봉안한 후 5층의 탑신과 개석(蓋石)을 쌓아, 그해 10월에 준공한 바, 이로써 대종사 열반 후 6년만에 성해가 성탑에 모셔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성탑을 중심한 영모원 일대가 길이 보본 숭모의 성역으로 화하였다. 다음 날 열린 중앙 교의회에서는 [대종사주 성업 봉찬회]가 조직되었고, 이듬 해(원기35·1950)의 중앙 교의회에서는 [창립 제 3회 1대 기념사업 준비 위원회](위원장 李共珠)가 구성 되었으나, 6·25동란으로 준비가 부진하여, 그 해 10월의 임시 중앙 교의회에서 기념 총회를 1년 연기하기로 하고, 성업 봉찬회와 기념 준비 위원회를 [3회 성업 봉찬회]로 종합 발족 하는 동시에, 위원장 이 공주 주관 아래 교단의 연혁 편찬과 대종사 성비 봉건을 준비하는 한 편, 제 1대 전체 교도의 사업 성적 총 결산 사무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 때 감찰원(원장 李雲捲)에서는 전체 교도의 법위 사정 사무를 아울러 시작하니, 이는, 원기 16년(1931·辛未) 3월에 대종사께서 제 2차 법위 사정을 실시하신 후 만 20년 만에 시행되는 제 3차 법위 사정 작업이었다. 한 편, 원기 33년(1948·戊子)에는 오 창건의 발기와 감역으로 봉래정사 석두암을 중수하여 제법 성지의 면목을 일신케 하였으나, 불행히 6·25동란 중 소실 되었으며, 성탑을 준공한 그 해(원기34년·1949)에는 [불교정전]의 부분 개쇄(部分改刷)를 행하여, 대종사의 본의에 유감 되었던 점을 1차로 없이 하였다.

2. 제 1대 성업 봉찬 대회

원기 38년(1953·癸巳) 4월 26일에 제 1대 성업봉찬 대회가 열렸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원정 기일(元定期日)을 1년 연기하였으나 새 회상이 창립 제 1대를 공적으로 마감하는 동시에, 제 2대를 맞게 되는 뜻 깊은 기념 일이었다. 이날 오전 10시, 새로 다듬은 원광대학 광장의 대회장에는 수 많은 축하 인사와 5천 여명의 남녀 교도가 운집한 가운데 수위단 중앙단원 유 허일의 대회사로 대회가 개회되고, 종법사의 치사와 봉찬회장 이 공주의 기념사에 이어, 제 1대 전체 교도의 공부 사업 원성적 내역 발표와 성적표 수여가 있은 후, 중앙 정계 인사들의 축사에 이어, 원불교 만세 삼창으로 폐회 되었다. 이 날 오후에는 김 영신·조 전권에 대한 첫 연화장 수여식이 있었으며, 다음날의 중앙 교의회에서는 정산 종법사를 연임 추대하고, 첫 총선거로 수위단이 개편되었으며, 교정원장에 김 대거, 감찰원장에 이 공주를 선임하여, 제 2대 교단의 첫 운영을 맡겼다. 또한 새 회상은 당년 부터 시창 연호를 원기로 기록하기로 하고, 새 대향 예법을 실행하며, 대종사 성비를 봉건함으로써, 동란 중 경제 공황 속에 재가 출가가 정성을 모은 제 1차 대종사 성업 봉찬 사업의 막을 내렸다. 제 1대 전체 교도의 공부 사업 원성적 내역은, 준 5등 이상 입등자 1,754명 중, 전무출신 입등자 258명, 거진출진 입등자 1,496명인 바, 전무출신은 준 특등 8명, 정 1등 17명, 준 1등 20명, 정 2등 6명, 준 2등 40명, 정 3등 28명, 준 3등 48명, 정 4등 31명, 준 4등 31명, 정 5등 10명, 준 5등 13명, 확정 보류자 6명이요, 거진 출진은 준 특등 1명, 정 1등 3명, 준 1등 6명, 정 2등 8명, 준 2등 16명, 정 3등 23명, 준 3등 78명, 정 4등 51명, 준 4등 179명, 정 5등 211명, 준 5등 881명, 특별 추증자 39명이었다. 전무출신 준 특등자는 이 공주·송 도성·김 광선·김 기천·이 동안·이 동진화·오 창건·이 재철이요, 거진출진 준 특등자는 황정신행 이었으며, 법위 정사(正師) 이상자는 원정사(圓正師) 송 도성, 정사(正師) 김 광선·김 기천·이 동안·오 창건·이 재철·박 세철·이 인의화(李仁義華)·서 동풍 이었다. 총 결산 후, 정산 종법사는 [공부의 등위와 사업의 등급에 공정을 기하고자 애를 썼으나, 어찌 그 숨은 공부와 숨은 공로가 다 드러나기를 바랄 수 있으리요. 그런즉 우리는, 참다운 사정(査定)은 호리도 틀림 없는 진리에 맡기고 이번에 나타난 등급으로는 앞 날의 적공에 더욱 분발할 대중만 삼는다면, 이 분들이 참으로 알뜰한 우리 동지요, 참으로 등급 높은 공인(功人)이니, 후일, 영모전에서 등위보다 실적이 넉넉한 선령은 제사 받기가 떳떳하지마는, 실적이 혹 등위만 못한 선령은 헛 대접 받기가 얼마나 부끄러우리요] 하시었다.

3. 제 1대의 교세

창립 제 1대의 총 교도수는, 의무 교도 32,244명, 일반 신도 290,196명, 합계 322,440명으로 되어 있으며, 전무출신은 260여명이고, 교당은 익산·이리·남선·수계·삼례·영산·신흥·대마·도양·광주·봉동·왕촌·서울·개성·춘천·마령·전주·좌포·관촌·중길·임실·장수·당리·경남·초량·용암·진영·다대·금산·용신·신태인·화해·정읍·승부·남원·운봉·호곡·금평·오수·군산 등 40개 교당에, 함열·덕룡·산서·목동·인월·창평·순창·목포·마산·부안 등 준지소(准支所)를 합하여 50개 교당으로 되어 있는 바, 여기에 열거되지는 아니하였으나, 원기 26년(1941·辛巳)에 장 적조가 만주 목단강에 교당 설립을 모색, 박 대완 교무를 파송까지 하였다가 일정의 탄압으로 철수한 일은 국외 포교 제2차의 사실 이었다. 또한, 기관은, 교육기관이 원광 대학, 원광 중고등학교, 도양의 원광 중학원 등 3개, 자선 기관이 서울 보화원, 익산 보화원, 신룡 양로원, 전주 양로원, 기타 등 7개, 산업기관이 삼창 공사, 보화당 약방, 유일 정미소, 삼창 과원, 이흥 과원, 영산 과원, 금산 과원 등 7개소였고, 출판 기관인 원광사를 합하여 모두 18개 기관이었다.

4. 새 [예전]의 편성과 보본 행사

정산 종법사는 일찍부터 일반 예의 교육의 긴급함과 발전 교단의 의례 보완이 절실히 필요함을 통감하여, 원기 36년(1951·辛卯) 9월에 새 [예전] 전 3편을 탈고하고, 이듬 해(원기37·1952) 7월에 이를 임시판으로 발간하시었다. 새 [예전]은, 제 1편 조신의 예, 제 2편 가정의 예, 제 3편 교회의 예로 되어 있는데, 종전의 [예전]에 비하여, 조신의 예 총 19장이 새로 편입되었고, 가정의 예에 회갑·천도재가 증보 되었으며, 교회의 예에 봉불·법회·득도·은법 결의·대사·봉고·특별기도·축하·영모전·영모원·대향·교의 등이 새로 편입되고, 그 밖의 예도 많이 개편되었다. 그 중, 조신의 예는 개인의 몸 가지는 통례로서 모든 사람이 예의 근본을 닦게 하는 요법이 되고, 영모전 대향 예법은 기념 일과 기념 묘우(廟宇)를 통일하여 대종사 이하 역대 열위 선령께 공동 향례를 받들도록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원기 38년(1953·癸巳) 6월 1일, 교단 일제히 하향(夏享)을 거행함으로써, 새 회상은 새 대향 예법을 실행하기 시작하였고, 그 날 오후 영모원에 봉건한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비를 제막하였다. 정산 종법사 지으신 비문은, 새 회상이 새 세상의 주세 회상임과 대종사께서 새 시대의 주세 성자이심을 처음으로 금석(金石)에 각하여 천하에 고한 것으로서, 그 끝절에 [대종사는 일찌기 광겁 종성(曠劫種聖)으로 궁촌 변지에 생장하시어, 학문의 수습(修習)이 없었으나 문리를 스스로 알으시고, 사장의 지도가 없었으나 대도를 자각하시었으며, 판탕(板蕩)한 시국을 당하였으나 사업을 주저하지 아니하시고, 완강한 중생을 대할지라도 제도의 만능이 구비하시었으며, 기상은 태산교악 같으시나 춘풍 화기의 자비가 겸전하시고, 처사(處事)는 뇌뢰 낙락(磊磊落落)하시나 세세 곡절의 진정을 통해 주시며, 옛 법을 개조하시나 대의(大義)는 더욱 세우시고 시대의 병을 바루시나 완고에는 그치지 않게 하시며, 만법을 하나에 총섭하시나 분별은 오히려 역력히 밝히시고, 하나를 만법에 시용(施用)하시나 본체는 항상 여여히 드러내사, 안으로는 무상묘의(無上妙義)의 원리에 근거하시고, 밖으로는 사사 물물의 지류(支流)까지 통하시어 일원 대도의 바른 법을 시방 삼세에 한 없이 열으시었으니, 이른 바 백억 화신의 여래시요 집군성이대성(集群聖而大成)이시라]고 새겨 있다. 한 편, 새 회상은, 원기 40년(1955·乙未) 7월에 원광지가 발기한 혈인 기념일 행사를 41년(1956·丙申)부터 거교적 행사로 시행하여, 후일 사대 경축의 하나인 법인절로 지정하였고, 그 해(원기 41·1956) 8월에는 영모전 묘위법을 일부 개정하여, 종사 위 위패를 대종사 위 정면 중단에 설위하고, 그 좌편에 대봉도 위, 그 우편에 대호법 위를 설위하기로 한 후, 42년(1957·丁酉) 4월 대회에서 주산 송 도성에게 종사 위, 팔산 김 광선과 구타원 이 공주에게 대봉도 위, 팔타원 황 정신행에게 대호법 위를 드리는 새 회상의 첫 법훈 증여식을 거행하였다. 정산 종법사는 치사에서 [나는 이 네 분 원훈(元勳)이 초창기 우리 회상에 공헌한 공부 사업 두 방면의 위대한 법훈(法勳)을 모든 대중과 더불어 높이 찬양하는 동시에, 재가 출가의 남녀 동지들이 여기에 마음을 다시 새로이 하여, 앞으로 우리 회상에 수 많은 종사와 수 많은 대봉도와 수 많은 대호법이 끊임 없이 배출되기를 믿고 바란다]고 하시었다.

5. 정관평 재방언과 성지 사업

정관평 첫 방언 공사 후 30여년이 경과함을 따라, 언(堰)은 대대적인 보수를 요하게 되었고, 이를 확장 재방언하게 될 경우 국가 부흥 계획의 일부 원조를 받을 것이 확실하게 되어, 원기 40년(1955·乙未) 8월에는 정산 종법사를 총재, 송 혜환을 위원장, 김 홍철을 실무 부위원장으로 하는 영광 정관평 재방언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고, 이듬 해 4월에 그 착공식을 거행하였다. 공사는, 각지 교당 봉공대의 봉공 작업과, 작업에 참가 못하는 교도들의 노임 대전(勞賃代錢)으로 기초 작업을 마친 후, 정부의 보조를 받아, 방조제 및 방수제, 2개소의 배수 갑문, 저수 호안 및 배수 암거 등 다양한 모든 공사를 44년도(1959·己亥)에 완공하여, 27,000여평의 새 농토와 그에 따른 완전 수리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새 언의 축조로 농토 안에 들어가게 된 구언(舊堰)은 보존 기념하기로 하였으며, 총공사비(3,000여만원) 중 7할은 정부 보조에 힘입었다. 한 편, 동란 중 황폐된 영산 성지의 복구 운동이 성지에서 요양 중이던 김 대거에 의하여 발기되어, 원기 43년(1958·戊戌)부터 대종사 성탄지와 대각 성지 일대가 매입 되었고, 재방언 공사가 끝난 44년(1959·己亥)부터 성지의 개척 사업이 더욱 활발해 져서, 성탄지와 구간 도실 일대의 토지 임야, 삼밭재 일대의 임야를 매입하는 동시에, 성지 순례 도로의 확대 보수 공사를 추진하였다. 45년(1960·庚子) 1월에는 교정위원회에서 [영산성지 개척공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우선 주요 지점의 녹화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반백년 기념 사업회가 발족되면서 성지 장엄을 그 사업 종목에 넣어, 대각 성지 주변 임야의 매입, 영산 대각전의 수축 등 성역의 확대 보수에 힘쓰게 되었다.

제2장 목표사업기관(目標事業機關)의 확립

1. 삼대 목표사업과 재단 기업의 시련

대종사,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사업 목표는 교화·교육·자선의 세 가지니, 앞으로 이를 늘 병진하여야 우리의 사업에 결함이 없으리라] 하시고, 이 3대 목표의 사업 기관을 고루 시설해 보시려고 노력하시었으나, 험난한 시국 관계로 그 뜻을 다 펴지 못하고 떠나시었다. 해방 후, [원불교 교헌]은 [본교는, 유치원·학교·수양원·요양원·병원·양로원·고아원 등을 수의(隨宜) 설치한다]고 하고, [유치원· 학교는 일반 교육기관으로, 수양원·요양원은 본교 유공인의 수양과 요양기관으로, 병원·양로원·고아원은 일반 자선기관으로 한다]고 규정하여, 교단은 이 3대목표 사업 기관의 균형 있는 확립을 지향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동안 교단의 유지와 사업을 뒷 받침해온 산업 기관은 주로 농원과 과원이었고, 교산 또한 정관평을 비롯, 대부분이 농토와 임야로 되어 있었다. 해방 후 법인으로 등록된 새 회상 재단의 농지 중 직접 경작하지 않던 논 20여만 평과 밭 8만 여평이 원기 35년(1950·庚寅)에 실시된 농지 개혁법에 의하여 전부 정부에 매상 되었다. 그에 따라, 교단은 해당 농지에 대한 문교재단 보상금(地價證券:正租 2,771石4斗整)을 상공업 병진 기업체로 전환 운영할 것을 결의하고, 삼례 과원에서 다량 생산되는 통조림 제조용 황도가 그 방면에 수급되지 못함을 전용(轉用) 하여, 과정 양조(果精釀造)를 주 종목으로 하는 대기업체 하나를 창설하기로 하고, 36년(1951·辛卯) 8월, 이리에 있는 귀속 재산을 사들여 재단 기업체 삼창 공사(三昌公社)를 창립하였다. 삼창이란 3대 사업을 창성케 하자는 뜻이었고, 재단의 지가 증권이 거의 다 투자되었으며, 삼례 과원을 직속 기관으로 까지 하였으나, 삼창 공사는 시국의 격동으로 인한 경제 불안, 편법에만 따른 부적당한 기업종목, 관리의 경험 부족 등으로 운영 3년 여에 기대했던 결과를 보지 못하고 끝나, 그 후 여러 해 동안 총부 경제가 큰 시련을 겪게 되었고, 42년(1957·丁酉) 11월에 총부 유지대책 위원회를 발족시켜, 이듬해 5월에야 총부 유지답(7,000여평)을 겨우 장만하게 되었다.

2. 교육 사업 진흥과 원광학원군

유일학림 개설 후 5년 동안 새 회상은 간고한 가운데서도 학림 중등부를 중학교로, 학림 전문부를 대학교로 승격 육성코자 꾸준히 활동하여, 원기 36년(1951·辛卯) 6월, 이리에 원광 중학교의 설립 인가를, 그 해 9월, 총부 동편에 원광 대학의 설립 인가를 얻어, 학장 박 장식을 초대 중학교장으로, 학감 박 광전(朴光田)을 초대 대학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새 회상의 교육 사업은, 초기의 영산 학원·총부 학원 및 총부를 비롯한 각처의 야학원 사업과, 해방 후의 국문 강습소 및 학림 교육을 거쳐, 이제 회상의 개교 정신과 국가의 교육 이념을 조화한 본격적 교육사업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원광학원 군(圓光學園群)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원광 대학은 당초 교학과(敎學科) 단과의 초급 대학으로 총부 구내에서 출발, 원기 37년(1952·壬辰) 7월에 제 1대 성업 봉찬 사업의 일환으로 교지(校地) 확보와 교사(校舍)의 첫 건축에 착수하여, 38년(1953·癸巳) 1월에 교학(敎學)·국문학(國文學) 2과의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3월에 제1 본관을 준공하고, 39년(1954·甲午)에 도서관을 신축하여 총부 도서실 장서(藏書) 전부를 이양 받은 후, 해마다 학과 증설과 교사 증축을 거듭하다가, 52년(1967·丁未)에 대학원을 설립하고, 56년(1971·辛亥) 12월에 종합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원광 대학교는 대학 교육으로 국가 사회에 공헌함은 물론, 원불교학과로 새 회상 교역자를 많이 양성 하였으며, 부설 원불교학 연구회와 종교 문제 연구소는 새 회상의 교학 수립 및 타종교와의 비교 연구에, 해외 포교 연구소는 새 회상의 해외 포교 준비에 상당히 공헌하였다. 원광 중학교는 원기 37년(1952·壬辰) 10월에 교지를 확보하고, 39년(1954·甲午) 2월에 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 해 4월에 제 1 본관, 40년(1955·乙未) 5월에 제2 본관을 준공하고, 그 해 9월과 41년(1956·丙申) 9월에 증축 공사, 42년(1957·丁酉) 4월에 여자 중학생 분리 운영, 50년(1965·乙巳) 6월에 제 3 본관 신축 착수, 51년(1966·丙午) 4월에 2대 교장 정 광훈(丁光薰)이 임명되었다. 원광 여자 중고등학교는 원기 41년(1956·丙申) 4월에 원광대학 부속 여자 고등학원(원장 朴將植)으로 발족, 익산 보화원 강당에서 수업하다가 42년(1957·丁酉) 4월에 원광 중학교 일부를 빌려 여자 중학생을 흡수, 45년(1960·庚子) 2월에 여자 중학교와 여자 상업 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초대 교장에 정 성숙(丁盛熟)이 임명되었고, 법은 재단을 비롯, 각 교당의 후원으로 47년(1962·壬寅) 7월에 교지·교사를 확보하여 독립하였다. 원광 남녀 중고등학교 또한 일반 교육으로 국가 사회에 공헌은 물론, 적지 않은 전무출신 지원자를 배출하여 교단 인재 양성에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원기 37년(1952·壬辰)에 도양지부 부설로 발족한 원광 중학원은 그 후 도양 고등 공민학교·해룡 농업 기술학교로 발전, 마침내 반백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해룡 중학교의 기초가 되어, 성지 근화(聖地近化)에 이바지가 되었고, 원기 20년대(年代) 이래 꾸준히 계속해 온 총부 야학원을 계승하여 익산 보화원 원내 교육기관으로 40년(1955·乙未)에 발족한 원광 고등 공민학교도 총부 근화와 인재 배출에 상당히 공헌하였다.

3. 삼대 선원(三大禪院) 개설과 장학 사업

원기 40년(1955·乙未) 1월, 교무 연합회에서 중앙 직할 3대 선원 설립이 공고되었다. 이는, 원기 38년(1953·癸巳) 6월에 설립된 이리 고등선원을 동산선원으로, 그 동안의 총부 선원을 중앙 선원으로, 영산 학원을 영산 선원으로 각각 발전시키되, 이 3대 선원을 중앙 직할 선원으로 하여 장차 새 회상 교역자 양성의 본거를 삼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산 선원은 고등선원 교감 이 운권을 초대 원장으로 발령, 그 해 3월에 제 1회 수료생을 내고, 그 후 조 전권·안 이정(安理正)이 원장의 대(代)를 이어, 매년 수선(修禪)을 계속, 원광 대학 교학과와 함께 새 회상 교역자 배출의 쌍벽을 이루었다. 중앙 선원은 동산 선원장(李雲捲)을 초대 원장으로 겸임 발령하여 종전 제도로 지내오다가, 42년(1957·丁酉)에 이 완철을 전임(專任) 원장으로 발령하여, 그 해 11월 6일 첫 결제식을 가졌다. 그러나, 어려워진 교단 경제 아래 자체의 유지 토대가 확립되지 못하여, 휴원·재개원을 거듭하다가, 한 동안 동산 선원과 병합 운영도 하고, 54년(1969·己酉)부터는 총부 구내 상주선원(常住禪院)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그 후 중앙 훈련원으로 발전하였다. 영산 선원은 전재 복구와 재방언 등 관계로 쉽게 발족을 보지 못하다가 47년(1962·壬寅)에 우선 영산지부에서 학원 제도 형식을 복구하였고, 49년(1964·甲辰) 3월에 초대 원장 안 이정을 임명, 중등·고등 2부 편제의 초등 선원으로 개원하여 정관평 작농도 겸한 선농 일치 교육을 실시, 54년(1969·己酉)에 2대 원장 오 종태가 단일 편제로 상급 선원 진학의 길을 계속 열어 주어, 교역자 육성에 기여하였다. 한 편, 원기 42년(1957·丁酉) 4월에 원불교 장학회가 발족하였다. 회상 초기부터 꾸준히 염원되어 온 교단 인재 양성의 꿈은, 원기 12년(1927·丁卯)에 육영부 창립단 활동이 시작되고, 19년(1934·甲戌)의 새 회규는 십부 중 육영부를 두어 기금 육성을 전담케 하였으나, 시국 관계로 소기의 재단이 이루어 지지않자, 27년(1942·壬午), 부서에서 제외되었다가, 그 후 학교와 선원들의 교역자 양성 작업이 차차 진전되자, 이에 이르러 장학회를 발족하고, 이어, 교헌 개정(원기44·1959)으로 육영부(부장·徐大仁)를 부활시켜 육영 장학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게 하였다. 정산 종법사는 장학회 치사에서 [초(楚)나라는 오직 어진 이를 보배 삼았다 하거니와, 우리는 오직 철저한 신심과 알뜰한 공심 가진 혈성 동지들을 기르고 또 길러서 우리의 무궁한 사업에 실다운 보배를 삼고 자산을 삼자] 하시었다. 또한, 43년(1958·戊戌)에 목포 김 현관(金玄觀)은 육영 사업을 발원, 연차 계획으로 수계 농원에 상당 규모의 인삼 재배를 실시하여, 46년(1961·辛丑) 5월에 은산 육영재단을 설립하였고, 그 해 10월에 원불교 육영재단 정관을 제정, 11월 부터 거교적인 장학회원 모집 운동을 일으키어, 상당한 재단이 형성되자, 47년(1962·壬寅) 5월에 육영재단 이사회(이사장·文東賢)를 구성하여 교단 만년 대계인 육영 장학을 계속 뒷받침하게 하였다.

4. 자선 사업 개척과 요양 사업

대종사 재세시부터 그토록 염원하시던 새 회상의 자선 사업은, 해방 직후에 전재 동포 구호로 그 막을 열었고, 그 해(1945·乙酉) 11월, 서울 보화원을 한남동에 설립함으로써 첫 결실을 보았으며, 36년(1951·辛卯) 1월, 1·4후퇴 때 총부로 피난 온 서울 보화원 원아 일부를 수용한 익산 보화원(초대원장·宋慧煥)이 발족되고, 38년(1953·癸巳) 5월에 이리시로 부터 인수한 이리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부터 새 회상의 무의탁자 보호 사업은 그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한 편, 양로 사업도 34년(1949·己丑) 4월 부터 총부 일부에 그 설립을 모색해 오다가 37년(1952·壬辰) 3월에 당국의 인가를 얻어, 총부에 신룡 양로원(초대원장·宋慧煥)을 설립하여, 41년(1956·丙申) 7월, 원사(院舍) 신축과 함께 중앙 수양원으로 개칭하고 이사하였으며, 때를 같이 하여 설립된 전주 양로원과 48년(1963·癸卯) 4월에 설립된 동래 수양원도 무의탁 노인들의 보호 사업과 회상 유공 노인들의 수양에 상당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또한, 전무출신 요양기관 겸 자선병원을 설립하기 위하여 원기 35년(1950·庚寅) 3월에는 보화당 자금으로 금산 과원을 인수, 금산 요양원(초대원장·李東震華)을 설립하여 38년(1953·癸巳)에 총부로 이전, 39년(1954·甲午) 4월에 중앙 요양원(원장·宋慧煥)으로 발전하였으며, 40년(1955·乙未) 5월, 북일면 진료소를 겸한 원사(院舍)를 신축하고, 42년(1957·丁酉) 10월에는 동화병원 설립 인가와 함께 정부의 보조를 받아 44년(1959·乙亥) 10월 총 건평 220평의 2층 병원을 완공 하였으나, 그 후 인사난과 운영난으로 이전·휴원·재개원을 거듭하다가, 법은 재단(法恩財團)과 제휴하여 설립 목적 달성에 부심하게 되었다.

제3장 일원세계(一圓世界)의 터전

1. 사종 의무 여행(勵行)과 교헌 개정

원기 40년(1955·乙未) 4월26일, 개교 40년 축하식에서 교도 4종 의무 강조 기간의 설정이 선포되었다. 4종 의무란 조석 심고·보은미·연원 지도·법규 준수 등 네 가지로서, 이를 거교적으로 강조 실행하여 교세의 내실과 확장을 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39년(1954·甲午)에는 연원 지도 강조 연간을 실시하고, 정례 포교 방송을 시작하였으며, 그동안 교당 별로 자치 운영해 오던 학생회 조직을 교무부에서 주도하는 동시에, 40년(1955·乙未) 1월에는 새 [예전] 반포 후 처음으로 합동 성년식을 거행하는 등 교화 활동에 박차를 가해 온 교정원(원장·金大擧)이, 이에 이르러 종합적 교화 발전책으로 4종 의무 강조 기간을 선포한 것이다. 이 운동은 각 교당의 열렬한 호응을 얻어, 42년(1957·丁酉) 4월 대회에서는 교화상(敎化賞)에 11개교당, 연원상 개인 특상에 24명, 교화단 상에 11개 단이 포상되었으며, 44년(1959·己亥)부터는 교화 계획안의 수립, 보은 사상 강조 연간의 설정, 특별 강송(講誦) 정진의 달 설정 등으로 교화의 내실을 더욱 다졌다. 한 편, 그 해(원기 44·1959) 4월25일, 중앙 교의회에서 교헌 개정안이 통과 되었다. 그 동안 총 2편 24장 225조이던 교헌이 총 11장 81조로 대폭 축양 되었으며, 따로 제정된 교정원 조직법과 감찰원 조직법도 이 때 아울러 채택되었다. 개정 교헌은 40년(1955·乙未) 6월에 박 장식 등 5인(별록24)의 교헌 연구위원이 교헌의 거강적 재기초(擧綱的再起草)와 중앙 직제의 개편, 교정 위원회의 신설, 기타 사항 등에 관하여 숙의를 거듭한 끝에 성안한 것으로, 첫 교헌 제 2편 교제(敎制)는 그 강령만 조문화 하고, 세목은 다 교규로 미룬 것이 두드러진 특색으로 되어 있다. 교헌 개정 다음 날, 정산 종법사는 3차 연임 취임식 설법에서 [교세의 발전이 늘 새로워, 국가와 사회에서 우리의 존재를 점차로 두루 인식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장차 세계 포교의 모든 터전이 차차 성숙되어 가고 있다]고 말씀하고, [우리는 대세계 주의자가 되자]고 강조하시었다. 개정 교헌은 5년 후(원기 49·1964) 다시 개정되니, 총 11장 86조가 10장 90조로 되고, [정전을 본경(本經)으로]가 [교전을 본경으로]로 되었으며, 협의 기관 형태이던 교정 위원회가 실질적으로 중앙교의회에 앞서는 교정 의결 기관이 된 반면에, 종법사 권한 규정 3개 조에 [수위단회의 의결을 거쳐]가 삽입되었으며, 종법사 자문위원, 법무실, 수위단회 사무처, 중앙 교의회 사무처 등이 신설되고, 법훈(法勳) 제도와 원성적 제도 등이 조문화 되었다.

2. 도운융창 대기도와 해외 포교 모색

원기 40년(1955·乙未) 1월27일 부터 정산 종법사의 유시로 세계 평화 및 도운 융창 정례 대기도회가 교단 일제히 시작되었다. 새 회상은, 구인 기도 당시 부터 세계 인류의 행복과 도운의 융창을 기도해 왔으며, 그 동안 계속하여 매월 1일의 정례 기도로 세계 평화를 기원해 왔던 바, 이 때 세계 불교도 대회에서 앞으로 모든 불교도가 매월 만월일(滿月日)을 기하여 세계 평화 대기도회를 가지기로 한다는 소식에 접하고 [우리도 이에 더욱 기운을 합하며 일원(一圓)으로써 상응케 하기 위하여] 이달 부터 매월 만월일에 세계 모든 불교도들과 함께 대기도회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례 대기도회는 41년(1956·丙申) 5월 14일까지 17개월 동안 실시 되었는데, 이는 새 회상이 해외 포교의 모색을 앞 두고 먼저 그 기운을 합하는 큰 행사였으며, 이에 참가한 교도 수는 연(延) 10만 여명에 달하였다. 원기 40년(1955·乙未) 1월에 새 회상은 원광 대학장 박광전을 구미(歐美)에 보내어 종교·문화·교육 등 각 분야를 시찰하는 동시에, 해외 포교의 기연을 모색토록 하였고, 그 해의 교무 연합회에서는 교수(敎樹)로 보리수, 교화(敎花)로 연화를 지정하였으며, 원광 대학은 교학 연구회를 발족시켰다. 43년(1958·戊戌) 10월에는 아시아 재단 특별 고문이며 미국의 불교학자인 [리챠-드 A·가-드] 박사가 총부에 내방하여 [한국 불교의 전망]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고, 그 해 11월 태국에서 열린 세계 불교도 대회에 박 광전을 교단 대표로 파견하였으며, 45년(1960·庚子) 11월에는 해외 포교 연구회(회장·朴光田)를 발족, 정화사(正化社)의 교서 번역 업무를 위임하였고, 이를 원광 대학 부설 해외 포교 연구소(소장·全八根)로 개편, 47년(1962·壬寅)부터 영문 포교지 [원부디즘]을 발간하게 하였다.

3. [대종경]편수와 [정전]재편

원기 41년(1956·丙申) 5월, 수위단회 의결로 대종경 편수 위원회가 정산 종법사를 총재, 수위단 남녀 중앙단원(金大擧 李共珠)을 지도위원, 수위단원 전원(별록25)을 자문위원으로 하고, 전문 편수위원(李空田)을 임명하여 발족 되었다. 대종경 편수의 논의는 대종사 열반 직후 부터 발론되었고, 그 과업이 제 1대 성업 봉찬회에 위임도 되었으나 진전을 보지 못한 바, 이에 이르러, 대종사 재세 당시에 이미 수필(受筆) 공표된 법설들과 대종사 열반 후 송 도성 등(별록26) 친시 제자(親侍弟子)들에 의하여 편편이 기록된 법설들이 공식적으로 수집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대종경 편수 위원회는 발족 후 1년 반 동안 자료의 대체 수집을 마친 다음, 42년(1957·丁酉) 10월부터 편수 장소를 남원 산동(山東) 교당에 정하고 그간 수집한 모든 자료의 축약 분품(縮約分品) 작업을 반년 동안에 대강 매듭지었다. 이에, 당시 장수(長水) 교당에서 요양 중이시던 정산 종법사는 수위단회의 협찬을 얻어, 원기 43년(1958·戊戌) 5월에 교전 교서 편수 발간 기관으로 정화사를 발족시켰다. 진전하는 교세에 부응하여 대종경 뿐 아니라 각종 교서의 편찬을 조속 추진하며, 그 번역과 출판의 소임을 담당할 정화사는, 대종경 편수 위원회의 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위에, 편찬·번역·연구·경제의 각 위원을 두어 각 항 업무를 분담하였고, 사무장에 이 공전이 임명되어 우선 대종경의 편수를 계속, 그 해 7월 부터 초안의 자문과 재편수 및 감수 작업을 진행 하였다. 한 편, 원기 45년(1960·庚子) 1월, 수위단회에서 [정전의 자귀 수정과 그 재간의 추진]이 의결됨으로써 정화사는 대종경의 편수와 정전의 재편을 아울러 진행하게 되었다. 대종사 열반 전년에 서둘러 성편(成編)되고, 일정 압제의 고비에 어렵게 발간된 [불교정전]은, 대종사께서 설법하신 바(대종경 부촉품 3장)와 같이 때가 급하여 그 만전(萬全)을 다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기 34년(1949·己丑)에 일부 개쇄(一部改刷)로 수정된 부분 외에, 대종사의 본의가 한 지역이나 한 교파에 국한된 듯 해석될 부분들을 대종사의 본의대로 바로 잡고, 명칭도 [정전]으로 환원하며, 편차도 대종경과 연관하여 다시 가다듬되, 그 일은 종법사 친재 아래 정화사를 통하여 행하시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편수 작업을 진행하는 도중, 정산 종법사의 환후가 점차 침중해 지시어, 46년(1961·辛丑) 12월 25일에는 최후의 특별 유시로 김 대거·이 공주·이 완철·박 광전·이 운권·박 장식에게 교전 교서의 감수가 위촉되고, 담당 위원에게 편수의 조속 추진이 촉구되었다.

4. 삼동 윤리 선포와 법은 재단 설립

원기 46년(1961·辛丑) 4월26일에는 개교 46년 축하식과 정산 종법사 회갑 경축식을 총 지부 각 교당에서 일제히 겸행하였다. 이날 오전, 총부에서는 [일체 허례는 이를 생략하고 간소한 의식에만 그치라] 하신 사전 부촉을 받들어 간소한 식만을 거행하였으며, 정산 종법사는 기념 법문으로 [우리가 장차 하나의 세계를 이룩할 기본 강령이 되는 삼동 윤리의 대지를 설명하여, 동지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본래 서원을 다시 새로이 하고자 한다] 하시고, 삼동 윤리를 공식으로 선포하시었다. 정산 종법사 말씀하시기를 [삼동 윤리의 첫째 강령은 동원 도리(同源道理)니, 곧 모든 종교와 교회가 그 근본은 다 같은 한 근원의 도리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 화합하자는 것이요, 그 둘째 강령은 동기 연계(同氣連契)니, 곧 모든 인종과 생령이 근본은 다 같은 한 기운으로 연계(連契)된 동포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 화합하자는 것이요, 그 세째 강령은 동척 사업(同拓事業)이니, 곧 모든 사업과 주장이 다 같이 세상을 개척하는 데에 힘이 되는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 화합하자는 것]이라고 하시었다. 이 해(원기 46·1961) 5월, 정산 종법사의 원력 사업으로 전무출신 요양 재단인 법은 재단이 설립되고, 그 운영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정산 종법사는 회갑식에 앞서 당부하시기를 [나는 지금 병중에 여러 동지들의 알뜰한 정성을 받고 있으나, 각처에서 혈심 노력하다가 병약한 전무출신 동지들에게는 아직 이에 대한 교중(敎中)의 재원(財源)이 서 있지 못하여, 때로 내 마음이 아프고, 불안하니, 기어히 정의(情誼)를 표하고자 하는 동지들은 전무출신 요양 대책의 재단 하나를 세우는 일로 나의 회갑을 기념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시었다. 재가 출가의 동지들은 이 뜻을 받들어 회갑 당일 총지부 각 교당에서 축하 성금을 모아 재단을 이룩하고, 정관을 제정하여 운영 위원회를 발족시킨 것이다. 그 후, 법은 재단은 52년(1967·丁未) 7월에 후원회인 법은회(회장 邊衆船)가 발족되어 54년(1969·己酉)까지 기금 증자 운동을 전개, 재단의 많은 확장을 보게 되었으며, 이 재단의 운용으로 수 많은 전무출신 요양자가 계속 법은을 입게 되었다.

제4장 결실성업(結實聖業)의 전진(前進)

1. 정산 종법사 열반과 대산(大山)종법사 추대

원기 47년(1962·壬寅) 1월 24일, 정산 종법사께서 열반하시었다. 대종사의 뒤를 이어 3차 연임을 거듭하신 19년 동안, 일정 압제의 고비와, 건국 초기의 혼란과, 교단 경제의 간난 가운데, 교단 체제를 완비하고, 성업 봉찬 사업을 주도하시며, 목표 사업 기관들을 확립하고, 일원 세계 건설의 터전을 다지신 정산 종법사는, 만년에는 요양을 겸행하면서, 정력을 기울여 이 해 1월까지 교전 편수를 친감하시다가, 22일, 대중에게 삼동윤리를 거듭 설하시고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는 송(頌)을 남기신 후, 24일 열반에 드시니, 세수는 63세요 법랍은 45년이었다. 이에, 교정원장(李完喆)이 종법사의 권한을 대행하여 긴급 수위단회와 간부 연석 회의를 열고, 그 법위를 정식 대각여래위로 추존하는 동시에 장의 위원회(위원장·朴光田)를 구성하여, 28일 오전, 원광 대학 광장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이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성해(聖骸)를 총부에 모시고, 총지부 일제히 봉도식과 초종 재식을 엄수하였다. 장례를 마치고, 1월31일 수위단회에서는 당시 수위단의 남자 중앙 단원인 대산 김 대거 법사를 후계 종법사로 선거하고, 2월23일 중앙 교의회의 절차를 거쳐, 새 종법사 추대식을 총부 대각전에서 거행하였다. 대산 종법사는, 원기 전 2년(1914·甲寅) 음 3월16일에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全羅北道鎭安郡聖壽面佐浦里)에서 연산 김인오(連山金仁悟)와 봉타원 안 경신(奉陀圓安敬信)의 5남매중 장남으로 나시었다. 어려서 부터 기상이 늠름하고 성격이 대범하여 대인(大人)의 풍이 보였으며, 11세 때 조모를 따라 만덕산에서 대종사께 귀의하고, 16세에 출가하여, 3년간 총부에서 학원 생활 중 대종사와 은부자의 의(義)를 맺었으며, 그 후 7년간 서무·상조·공익·육영·교무 각 부의 서기를 차례로 역임하면서 5년간 대종사의 시봉을 겸행하였다. 원기 22년(1937·丁丑)부터 서무부장·교무부장·감사부장·총부 교감 겸 예감 등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며, 원기 28년(1943·癸未), 수위단원에 보선되고, 31년(1946·丙戌)에는 총부 서울 출장소장에 피임, 해방 직후 다난한 교단 발전에 3년간 공헌하였다. 그 후로는 원평·총부·진영·다대 등지에서 요양하면서 대종경 자료를 정리하다가 37년(1952·壬辰)에는 수위단 중앙에 피선, 대산(大山) 법호를 받고, 교정원장에 피임되었으며, 44년(1959·己亥)에는 중앙 선원장에 피임되었으나 영산에서 요양하면서 정관평 재방언과 성지 사업의 기초를 세웠다. 46년(1961·辛丑)부터 하섬·신도 등지에서 교재를 연마 중, 정산 종법사 특별 유시로 정화사 감수위원에 위촉되었고, 정산 종법사의 열반에 따라 후계 종법사로 추대 되시었다. 한 편, 이 때 중앙 총부 각 부면의 인사 개편으로, 수위단 남자 중앙 단원에 박 광전이 선정되고, 교정원장에 박 장식, 감찰원장에 이 완철, 중앙 교의회 의장에 문 동현이 각각 선임되었다.

2. [교전] 발간과 교서 결집

원기 47년(1962·壬寅) 2월, 수위단회에서는 정화사의 제안을 채택하여, 그 동안 [불교정전] 권일(卷一)이던 [정전]과 새로 편수한 [대종경]을 합간하여 [원불교 교전]으로 발행할 것을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재편수된 교전 초안은 감수 감정의 절차와 수위단회의 봉찬을 거쳐 인쇄에 회부, 이 해(원기47·1962) 9월 26일 드디어 발간 되었다. 이로써 새 회상은 만대의 본경을 완정하였으며, 10월 7일, 총부 대각전에서는 교전 간행 봉고 및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대산 종법사는 설법에서 [우리 교전은 앞으로 천여래 만보살을 배출하여, 무변 중생이 다 함께 제도를 받으며, 일체 생령의 혜복 문로를 열어 줄 전만고 후만고에 희유한 대법보]라고 말씀하고, [우리 동지들은 시방 삼계 육도 사생과 함께 이 교전의 발간을 환희 경축하는 동시에, 이 공부 이 사업에 더욱 힘써서 이 법은이 무량 세계 무량 중생에게 고루 미치도록 전하자]고 하였으며, 때 마침 개최 중이던 교무선은 6일간의 교전 일독회로써 선 과정을 해제하였다. 한 편 정화사는, 국내 각계와 해외 각계에 신간 교전을 널리 증정하여 새 회상의 원음을 시방에 전파하였고, 그 후 [거룩한 50년대 결집으로 결실하자]는 표어 아래, 정산 종사께서 내정해 두신 편수 방침을 토대로 새 회상의 교서들을 차례로 결집 발간하였다. 원기 50년(1965·乙巳) 12월에는 연원 고경으로 [불조요경]을 발간하였다. 이는 일찌기 대종사께서 [불교정전] 권2·권3에 편입하신 바 있는 금강경 등 오경(五經)과 수심결 등 삼론(三論)을 개역(改譯) 발간한 것이다. 53년(1968·戊申) 3월에는 그 동안 수정 보완을 거듭해 온 새 [예전]과 총 126곡을 담은 [성가]를 동시에 발간하고, 성가 발간 기념 발표회를 총부 대각전에서 성대히 열었다. 57년(1972·壬子) 1월, 제1부 세전·제2부 법어로 된 [정산 종사 법어]를 발간한 정화사는, 새 회상 개교 반백년의 결실 과정을 거울할 이 [원불교 교사]와, 새 회상 백년대를 대중할 [원불교 교헌]을 편정 발간하고 그 과업을 마칠 것이다.

3. 교화 삼대목표 추진과 법위 향상운동

원기 48년(1963·癸卯)부터, 개교 반백년 기념 대회를 앞 두고, 새 회상은 사 오십 년 결실을 알차게 실현하기 위하여, 교화 3대 목표를 설정, 이를 거교적으로 추진하였다. 교화 3대 목표는, 연원 달기·교화단 불리기·연원교당 만들기인 바, 연원 달기란, 9인 이상의 연원을 가지라는 것이 대종사 교화의 일대 정신이시니, 우선 한 사람이 한 사람 이상의 연원을 달자는 것이요, 교화단 불리기란, 이단치교의 법을 더욱 진흥시켜, 모든 교도가 4종 의무를 잘 이행케 하며, 우선 한 단에서 새로 한 단 이상을 불리자는 것이요, 연원 교당 만들기란, 각 교당에서 연원 교당을 이룩하여, 나라나 세계에 일원 대도가 편만하도록, 우선 한 교당에서 한 교당 이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 3대 목표를 연차 계획으로 실시하고 통계 시상한 바, 첫 연도부터 매년 성과가 올라, 56년(1971·辛亥)까지 86,014명의 교도, 1,687개의 교화단, 108개소의 교당이 불어, 반백년 결실대회를 앞 두고 교세 확장에 한 전기를 지었다. 한 편, 원기 49년(1964·甲辰) 10월에 수위단회는, 삼산 김 기천에게 종사 위, 도산 이 동안·사산 오 창건·일산 이 재철·공산 송 혜환·육타원 이 동진화 등에게 대봉도 위를 드리기로 하고, 이듬 해 10월에는 응산 이 완철에게 대봉도 위를 드리니, 이는 새 회상의 제 2차 법훈 증여였다. 또한, 대산 종법사는 반백년 결실의 참다운 내실을 위하여 전 교도의 법위 향상 운동을 제창, 수위단회의 협찬을 얻어, 50년(1965·乙巳) 11월부터 5개월 동안, 전 교도의 법위 예비 사정을 실시한 바, 준 정사(准正師) 이상은 보류하고, 교정(敎正) 124명, 준 교정(准敎正) 470명, 교선(敎選) 1,638명, 준 교선(准敎選) 2,824명, 도합 5,056명으로 나타났다. 그 후, 법위 향상의 준비 행사로, 특별 기도·가정 봉불·교리 연마·교리 실천·본인 사정·교구 사정 등을 거쳐, 55년(1960·庚戌) 3월, 수위단회에서 법위 사정 실시 요강을 채택하고, 각 지구별 담당 위원을 선정하여 면밀 사정한 후, 3월 20일 수위단회 심사와 종법사 감정으로 개교 반백년도 전 교도의 법위를 확정하니, 정사(正師)부터 이상은 보류하고, 준 정사 22명, 교정 503명, 준 교정 826명, 교선 3,167명, 준 교선 5,326명으로, 60만 교도 중 준 교선 이상 준 정사까지의 법위자 총 수가 9,844명이었다. 이에 뒤이어 55년(1970·庚戌) 9월에는, 교도의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연마와 신앙 수행의 촉진으로 교단적 공부 풍토를 더욱 조성하기 위하여 교도의 교리 연마 실력 평가를 실시하였고, 교역자의 교화단 조직을 시도하였다.

4. 고시 제도 실시와 기관 단체 정비

원기 46년(1961·辛丑)에 포교사 자격 고시 규정이 제정되고, 49년(1964·甲辰) 4월에 교역자 고시 규정으로 개정된 교역자 고시 제도가 49년도 부터 실시 되었다. 첫 고시 위원회(위원장·朴將植)는 여러 차례 회합을 거듭한 끝에 50년(1965·乙巳) 2월 4일 부터 3일간 시행한 첫 고시로 24명의 합격자를 내었다. 고시는, 수양·연구·취사의 3과(科)로 하되, 수양과는 염불 좌선 등에 대한 성의의 평가로, 연구과는 정전 대종경 불조요경 예전 교헌 교사 등에 대한 이해와 강연 정기 일기 등의 실력 점수로, 취사과는 주의 조행 등에 대한 평가로 채점하여, 3과의 종합 점수로 합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 후 매년 시행된 고시에 의하여, 반백년 기념 총회 년도(원기56·1971)까지 도합 218명이 새 교역자의 자격을 공인 받았다. 원기 40년(1955·乙未) 4월에 전무출신 친목 단체로 수덕회가 창립된 후, 44년(1959·己亥)에는 전무출신 권장인들의 친목 수양 단체로 정토회가 발족되었으며, 45년(1960·庚子)에는 학생회 연합회가 창립되고, 47년(1962·壬寅)에는 교우회 연합회가 결성되었으며, 48년(1963·癸卯)에는 중앙 청년회가 결성되고, 자선기관 연합회가 발족하였으며, 교학과생 하계 봉사 활동이 시작되고, 12월에는 어린이회 교재 시안(敎務部案)이 작성되었으며, 49년(1964·甲辰)부터는 유년회가 강습회를 시작하였고, 55년(1970·庚戌)에는 영광 지구에서 성지개발 협의회가 발족하였다. 또한, 49년(1964·甲辰) 3월28일자로 종교 재단 원불교에서 학원 재단 원광학원이 분립되었고, 54년(1969·己酉) 5월에는 교화 재단의 발족이 시도되었으며, 55년(1970·庚戌) 3월에는 영산 출장소(소장·李中和)가 영산 선원과 영산 지부에서 분리 운영되기 시작하였고, 56년(1971·辛亥) 1월에는 원불교 신용조합(이사장·宋圓徹)이 설립되었다. 한 편, 41년(1956·丙申) 5월에는 신생활 운동안을 현상 모집하여 새 생활 운동의 전개를 시도하였고, 그 해 7월에는 교역자들의 생활 개선 방안을 위한 연구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47년(1962·壬寅) 12월에는 이흥 과원을 매각하여 총부 유지답을 확장하였고, 48년(1963·癸卯) 2월에는 황등 율원(黃登栗園)을 매각하여 원광사 시설을 확장하였다. 또한 50년(1965·乙巳) 4월에는 익산 보화원이 이리 보육원(원장·趙甲種)에 통합되고 51년(1966·丙午) 11월 부터는 자선의 달(주관事業部)이 실시되었으며, 52년(1967·丁未) 7월에는 서울 보화원이 수도원의 방침에 따라 홍제원 분원에 흡수되는 등 40년대와 50년대 초반에는 각 기관 단체의 설립 정비 폐합 등이 성행하였다.

5. 종협 참여와 해외 포교 진출

원기 50년(1965·乙巳) 4월에 총부 서울 사무소(소장·李雲捲)를 다시 열었다. 이는 50년대에 접어 든 새 회상이 국내에서 그 결실을 더욱 촉진하기 위한 한 조치였다. 드디어 그 해 6월,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주최한 한국 6대 종교인의 대화에 황 정신행 등 3인(별록27)이 교단 대표로 참석하여, 불교·유교·천주교·기독교·천도교 등 국내에 공존하는 대표적 종교 지도자들과 2일간의 대화를 가짐으로써 그 해 12월에 한국 종교인 협회가 창립되었고, 새 회상이 그 6개 창립 종교 중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그 때에 서울 사무소는 월간지 [종교계](주간李恩錫)를 창간하고, 사무소 안에 종협 사무소를 두게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종협 활동의 중심이 되는 듯 하였으며, 자금난 등 사정으로 통권 7호에 휴간은 되었으나, [종교계]지에 제기된 새 회상 논의 등은 새 회상의 위치를 천명하는 데 한 계기를 지었다. 51년(1966·丙午) 2월에는 새 회상의 교무를 군종으로 파견할 대정부 교섭을 시작하였으며, 그 해 10월 15일에는 종협 제 3차 연구 모임인 원불교 이해의 모임을 총부에서 개최, 이웃 종교인들에게 새 회상을 많이 인식시켰고, 그 후 계속 종협 활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55년(1970·庚戌) 2월에는 교정원장(朴將植)이, 56년(1971·辛亥) 12월에는 중앙 교의회 의장(文東賢)이 각각 그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한 편, 교단의 종협 활동에 발맞추어 51년(1966·丙午) 5월 부터 원광 대학 교학 연구회에서는 대학생 종교제를 발기하여 여러 해 동안 정례 행사화 하였으며, 52년(1967·丁未) 11월에는 청년회 대표가 7대 종교 청년 대표자 간담회에 참석하여 종협 강화책을 제의하였고, 55년(1970·庚戌) 10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세계 불교 지도자 대회에, 56년(1971·辛亥) 7월에는 부산에서 열린 한일 불교 친선 [세미나]에 박 장식 등 다수 대표가 참석하여 국제적 종협 활동에도 합력하기 시작하였다. 또 한, 원기 40년대 초기부터 모색하기 시작한 해외 포교는, 48년(1963·癸卯) 11월에 박 광전 등 3인(별록28)이 1개월간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재포교의 기연을 모색하였고, 당년도 중 영문지 [원부디즘]과 해외 불교지들의 새 회상 관계 기사를 보고 미국인 2명이 처음으로 입교하였으며, 50년(1965·乙巳)에는 [원불교 요람] 중역(中譯)·독역(獨譯)·일역판(日譯版)을 각각 임시판으로 간행하는 동시에, 중국 신문에 새 회상이 처음 소개되었다. 51년(1966·丙午) 3월에는 일본 순교감(徐世仁)을 발령, 2개월 간 일본 재포교를 다시 모색하였고, 11월 태국에서 열린 세계 불교도 대회에 황 정신행을 파견하였으며, 12월에 이 공주가 홍콩·태국·일본 등지를 순방하였고, 52년(1967·丁未) 8월에는 미국 유학생(全八根·鄭惟誠)에게 처음으로 미국 교무를 발령하였다. 이 해에 또한 중역 [정전]이 임시판으로 발간되었고, 53년(1968·戊申) 9월에는 이 운권이 1개월간 중국 불교계를 시찰하였으며, 12월에는 뉴욕의 미국인 교도 가정에 처음으로 법신불이 봉안되고, 종교학자 강 위조(姜渭祚박사)는 미국 종교학회에서 [한국의 원불교와 한국 사회]란 제목의 연구 발표로 미국 학계에 새 회상을 소개하였다. 54년(1969·己酉) 4월에는 말레이지아에서 열린 세계 불교도 대회에 김 정용을 파견하고, 영문판 [요람]을 간행하였으며, 7월에는 중국 유학생(金大鉉)에게 처음으로 중국 교무를 발령하였다. 55년(1970·庚戌) 7월에는 박 장식이 10일 동안 일본 종교계를 시찰하였고, 10월, 일본에서 열린 제 1차 세계 종교자 평화회의에 박 광전 등 4인(별록29)이 파견되어 처음으로 세계 종협 활동에 참가, 저명 종교인들을 반백년 대회에 직접 초청하였으며, 56년(1971·辛亥) 5월, 일본의 세계 연방 촉진 종교인 평화 회의에도 박 광전 등 4인(별록30)이 참석하고, 10월에는 반백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영역 교전](全八根역)을 발간하는 등 5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 회상은 해외 포교 진출에 더욱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제5장 개교 반백년(開敎半百年)의 결실(結實)

1. 새 회상의 확인과 반백년 준비

새 회상은 처음부터 하나의 새 종교로 창건되었고, 불법을 주로 연원하되, 모든 종교의 교지(敎旨)도 이를 통합 활용하여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를 이룩하자는 것이 대종사의 본회(本懷)시었다. 이는 원기 33년(1948·戊子)에 원불교라는 교명을 공포하고, 교헌에 대종사를 교조로 규정함으로써 더욱 분명해 졌으며, 교전의 교법 총설과, 새 예전의 대향 예법과, 대종사 성비에 그 뜻이 더욱 천명되었다. 그러나, 국가 사회의 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던 중, 원기 46년(1961·辛丑) 5·16 혁명 후 포고령에 의하여 교단의 제반 등록을 새로이 한 바, 이듬 해 8월에 불교계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불교 재산 관리법을 공포 시행하면서 새 회상에도 그 법을 적용, 등록을 촉구하였다. 이에 4인(별록31)의 위원이 관계 당국에 건의서를 제출하고 각방으로 직접 절충하여, 새 회상의 입장을 강력히 천명한 바, 47년(1962·壬寅) 11월 22일자로 [원불교는 창립 경위와 현재 상황 및 본질상 불교 재산 관리법의 적용을 받을 성질의 단체가 아니라]는 종교 심의 위원회 의결에 따른 정부의 회보를 받았고, 53년(1968·戊申) 11월에는 정부 간행 문서에 새 회상의 입장이 거듭 확인 공표되었다. 원기 48년(1963·癸卯) 10월, 수위단회는 개교 55주년 경축 기념 행사를 56년(1971·辛亥)에 거행하기로 하고, 이어 열린 교정 위원회에서는 연구위원 20명을 선정하여 사업 추진의 요강 작성을 위임하였다. 49년(1964·甲辰) 4월, 중앙 교의회에서 개교 반백년 기념 사업회(회장·朴光田사무장·丁光薰)가 발족되고, 사업 종목은 기념관·영모전·정산종사 성탑 등의 건립, 영모원 및 총부의 기지 확장 정리, 영산 성지의 확장 및 장엄, 영역 교전·기념 문총의 발간, 대회 행사 등으로 책정하였다. 51년(1966·丙午) 4월에는 사업회 임원이 일부 개편(사무장·金正勇)이 되고, 54년(1969·己酉)부터 총부 및 영모원의 기지 확장 정리와 종법실 신축이 진행 되었으며, 55년(1970·庚戌)에는 반백년 기념관·영모전·정산종사 성탑이 차례로 착공되고, [반백년 기념 문총]의 편집과 [교전] 영역도 착수 되었다. 55년(1970·庚戌) 4월, 교정 위원회에서는 반백년 기념 사업으로 서울 기념관 건설도 추가하기로 하여, 그 해 10월, 남한강에 거대한 회관을 기공하였으나, 그 후 이로 인하여 거교적인 수습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는 시련을 겪게 되었고, 56년(1971·辛亥) 3월에는 교정위원회와 수위단회의 합의로 기념대회를 10월에 개최하기로 확정하였다.

2. 수양기관 설립과 재단 기업 계열화

원기 48년(1963·癸卯) 4월, 수위단회에서는 정남 정녀 휴양 기관으로 수도원의 설립이 의결 되었다. 일찌기 대종사께서 계획하시고 정산 종사 당시부터 그 설립을 모색, 자체에서 기금을 길러 온 수도원이, 이에 이르러 공식으로 발족되고, 초대 원장에 이 공주가 선임 되었다. 수도원은, 그 후 서울 한남동 대지를 인수, 그 완전 불하에 공헌하였으며, 한동안 양주 농장 등을 경영하였고, 55년(1970·庚戌) 1월에는 종로 5가에 건물을 매입하여 한의원 발족을 모색하였다. 한 편, 원기 39년(1954·甲午)에 부안 교당(교무·丁良珍) 발의로 수도원에서 매입한 변산 하섬은 봉래산 제법 성지의 기슭에서 새 회상의 해상 수양원 겸 편수 도량이 되었으며, 46년(1961·辛丑)에 정산 종사의 발기로 대지(9백여평)를 매입, 남선 교당을 옮겨 둠으로써 시작된 충남 신도 수양 기관은 대산 종법사의 직접 후원 아래 7년 동안 기지 확장과 건물 매입을 계속해 오다가, 52년(1967·丁未) 10월, 수위단회에서 삼동 수양원(초대원장·李炳恩) 설립이 의결됨으로써 유서 깊은 지역에 특수한 수양원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또한 회상 초기부터 특별 연지(緣地)이던 진안 만덕산은 52년(1967·丁未)부터 복구 개발에 착수, 앞으로 선농 일치의 수양 기관을 모색 중이고, 기타 각처의 교단 양로원들이 다 수양원의 기능을 겸행하여 노후 유공인들의 수양에 공헌하고 있다. 한 편, 새 회상이 반백년을 지내오는 동안, 교단의 여러 산업 기관들이 기복과 성쇠를 거듭하는 가운데, 보화당은 이 동안·송 혜환·조 희석이 차례로 대표 이사의 대를 이으며, 각 부면의 경제에 많은 공헌을 하는 중, 49년(1964·甲辰) 4월에는 이리 삼중당 제약사를 흡수하여, 그 해 9월에 보화 경옥고를 주종목으로 하는 보화당 제약사(사장·趙暿錫)를 창설함으로써 보화당은 상공업 병진 기업체가 되었고, 55년(1970·庚戌) 7월에는 기업의 중앙 진출과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하여 종로 5가에 서울 보화당(회장·李共珠사장·李喆行)을 개설하고, 이어서 57년(1972·壬子) 7월에는 이리 역전 보화당(사장·李喆行)을 개설함으로써 재단 기업체 보화당은 차차 계열 기업화하기 시작하였다.

3. 청년 운동과 출판 언론 진흥

원기 48년(1963·癸卯)에 중앙 청년회가 결성되고, 49년(1964·甲辰) 7월에 초대 회장(權世英)을 선정한 원불교 청년회는 각 대학별 교우회의 조직, 사회 봉사를 통한 개교 이념의 구현, 청년 회관의 건립, 교당별 청년회의 조직 확대 등을 결의하고, 50년(1965·乙巳) 7월에는 교패(敎牌) 달기·청소 실시·교서 보내기 등 세 가지 운동을 벌였다. 51년(1966·丙午) 9월에는 2대 회장(金正勇)이 월간 [원불교 청년회보]를 발간하여 교단의 선교에도 도움을 주었고, 52년(1967·丁未) 4월 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원불교 사상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55년(1970·庚戌) 7월에는 총부에서 청년 대회를 개최, 반백년 사업에 청년회의 공헌을 다짐하였고, 56년(1971·辛亥) 7월에는 총부에서 전국 청년 지도자 대회, 하섬에서 전국 청년 수련 대회를 개최, 청년들의 반백년 결실을 더욱 다졌다. 한 편, 원기 42년(1957·丁酉) 2월에 자체 인쇄 시설을 갖춘 원광사는, 격월간 또는 계간으로 [원광] 발간을 계속하면서, 총부와 각 교립 학교 간행물들을 발행하였고, 47년(1962·壬寅) 7월에는 원불교 기념 사진첩 편집 위원회가 서편(序編)·대종사 추모의 편 등 전 4편으로 된 [원불교 기념 사진첩]을 간행하였으며, 49년(1964·甲辰) 5월에는 총무부(부장·金勤修)가 월간 [원불교 교보]를 창간하여, 54년(1969·己酉) 3월 까지 60호를 발행하였다. 53년(1968·戊申)에는 정화사가 [원불교 교고 총간] 사업을 시작, 회상 초기의 정기 간행물(月末通信·月報·會報)들과 초기 교서 기본 사료 각 항 자료들을 전 6권에 수록, 연차 간행하였고, 54년(1969·己酉) 3월에는 원불교 신보사(사장·金正勇 편집·趙政勤)를 설립, 반월간 [원불교 신보]를 창간함에 이르러, 교단의 언론이 많이 창달되고 문화 공보에 큰 소임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 해 7월에는 원불교 출판사를 원광사에 병설, 정화사가 이양한 판형으로 [원불교 교전]과 축쇄판 [교전·성가]를 계속 간행하였으며, 56년도(1971·辛亥)에는 개교 반백년 기념 사업회가 [반백년 기념 문총]을 발간하였고, 원광대학 부설 종교문제 연구소(소장·柳基現)는 [한국 종교 대계]를 발간하고, [원불교 사전(圓佛敎事典)]을 편찬하는 등 40년대 후반기 부터 새 회상의 언론 출판 부문은 상당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4. 반백년의 교세

반백년 기념 대회를 앞 두고 56년(1971·辛亥) 3월에 결산된 원기 55년도의 교세 개요를 보면, 재가 교도 수는 신도를 합하여 6십 여만명, 출가 교도 수는 예비 교역자를 합하여 1천 여명으로 되어 있고, 교산은 종교 재단(宗敎財團圓佛敎)과 학원 재단(學園財團圓光學園)으로 분할되어 있으나, 이사진의 단일화로 관리는 귀일되어 있었다. 기관은 중앙 총부 각 부처와, 서울 사무소·영산 출장소 등 중앙 직할 기관이 24개소, 중앙 훈련원·동산선원·영산선원·원광 대학교·원광 중 고등학교·원광 여자 중 고등학교·원광 고등공민학교·해룡 농업 기술학교·해룡 중학교·원광 유치원 등 훈련 및 교육 기관이 12개소, 원광사·정화사·원불교 신보사·원불교 출판사 등 출판 문화 기관이 4개소, 수도원·삼동 수양원·하섬 수양원·동래 수양원·중앙 수양원·전주 양로원 등 수양 및 양로 기관이 6개소, 동화병원·중앙 요양원·이리 보육원 등 요양 및 자선 기관이 3개소, 보화당·보화당 제약사·서울 보화당·총부 농원·수계 농원·만덕산 농원·유일 정미소(재무부직할) 등 산업 기관이 7개소로 되어 있고, 청년회·학생회·유년회·수덕회·정토회 등 단체가 총지부를 망라하여 도합 50여개로 되어 있다. 교당은, 전라북도에 이리·동이리·남중동·전주·교동·동전주·서전주·군산·익산·함라·금마·팔봉·수계·삼례·동산·봉상·마령·좌포·진안·백운·안천·무주·장수·산서·관촌·임실·오수·금평·지사·남원·수지·운봉·산동·아영·보절·북아영·인월·순창·화해·신태인·승부·정읍·용각·감곡·소성·태인·칠보·고부·덕천·고창·흥덕·해리·부안·원평·용신·화포·김제·금구·만경·임산 등 60개소, 전라 남도에 광주·서광주·남광주·계림·목포·여수·순천·영산·신흥·왕촌·대마·도양·불갑·영광·군남·백수·법성·장성·해보·창평·곡성·겸면·구례·보성·영암·불목·완도·압해도 등 28개소, 서울 특별시에 서울·종로·원남·돈암·송천·신촌·사직·정릉·답십리·화곡·불광동·필동·청파·제기동 등 14개소, 경기도에 의정부·인천·수원·강화·부천·안양 등 6개소, 강원도에 춘천·남춘천·화천 등 3개소, 충청 남도에 대전·금산·제원·추부·유성·신도·도곡·강경 등 8개소, 충청 북도에 청주·괴산 등 2개소, 부산 직할시에 당리·경남·초량·다대·부산진·서면·동래·대신·구포·영도·남부민·해운대·청학·거제동 등 14개소, 경상 북도에 대구·서성로·봉덕·삼덕·경주·김천·포항·안동·성주 등 9개소, 경상 남도에 마산·신마산·진주·통영·진해·울산·삼천포·용암·진영·김해·함양·지곡·밀양·창원·합천·기장·고성·의령·양산 등 19개소, 제주도에 제주·서귀포 등 2개소, 출장 교화 장소로, 전북에 덕진·고산·중평·장계·사매·복흥·창동·무장·마포·봉황 등 10개소, 전남에 담양·나주, 충남에 장항, 경북에 경산 등이 있었고, 당년도 신설이 충남의 천안, 전남의 산동(求禮山東), 서울의 이문동, 전북의 함열 등이고, 전남의 장산도, 강원의 강릉이 개척 중에 있었다.

5. 기념관·영모전·정산 종사 성탑 봉건

원기 56년(1971·辛亥) 10월, 반백년 기념 대회를 앞두고 반백년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불단 제도를 새롭게 하여, 정면 벽상에 대형 일원상만을 봉안한 대법당과, 1층·3층에 몇 개의 부속실을 둔 기념관은 교단의 중요 행사에 쓰이게 되며, 각 부속실은 얼맛동안 각부의 사무실로 쓰이게 되었다. 아울러, 이 때에 영모전이 준공되니, 영모전 법이 교헌에 규정된 후, 실로 22년만의 성사(盛事)였다. 영모전은, 영모원 송림 아래 정초(定礎)하여 봉건한 바, 묘위는 새 [예전]에 의하여 본좌 상단 중앙에 대종사 소태산 여래 위, 중단 중앙에 종사 위, 그 좌우에 대봉도 위와 대호법 위, 대봉도 위 좌편에 전무출신 각등 위와 보통 출가 교도 위, 대호법 위 우편에 거진출진 각등 위와 보통 재가 교도 위를 모셨고, 좌편 별좌 상단에 희사 각 위와 그 하단에 일반 부모 선조 위, 우편 별좌 상단에 선성 각위와 그 하단에 일체 생령 위를 각각 모셔, 대종사와 열위 선령을 중심으로 시방 삼세 만성 만생이 다 함께 배향 되었으며, 이 때 본좌에 입묘된 입등 선령은 총 7백여 위였다. 또한, 영모전 옆에 정산 종사 성탑이 봉건 되었다. 탑은 화강석 기단(基壇) 위에 3개의 사각 석물을 쌓아, 장방형 탑신을 이루고, 그 안에 성해를 봉안한 후, 앞 뒤로 탑호와 탑명을 새겼으며, 탑신 위에 연화대석과 원석을 올려 조성한 바, 정산 종사 열반 후 9년 동안 송대(松臺)에 임시 봉안하였던 성해가 이에 이르러 성탑에 모셔 지게 되었다. 대산 종법사 지은 정산 종사 탑명에는 [정산 종사는 한 없는 세상을 통하여 대종사를 받들고 제생 의세의 대업을 운전하실 제, 신의는 고금을 일관하시고 경륜은 우주를 관통하시며, 시국의 만난(萬難) 중에서도 대도를 이어 받아 드러내시고, 흉흉한 세도 인심 속에서도 대자 대비로 모든 생령을 두루 안아 길러 주시며, 새 질서를 갈망하는 세계를 향하여 일원 세계 건설의 큰 길을 높이 외쳐 주셨으니, 후래 제자로서 묵묵히 우러러 뵈올 때에 대종사는 하늘이요 태양이시라면 정산 종사는 땅이요 명월이시며, 대종사는 우리의 정신을 낳아 주신 영부(靈父)시라면 정산 종사는 그 정신을 길러 주신 법모(法母)시라]고 결론되어 있다.

6. 개교 반백년 기념 대회

원기 56년(1971·辛亥) 10월 7일부터 6일 동안 새 회상은 대종사께서 예시하신 사 오십년 결실의 뜻을 되새겨 다지는 개교 반백년 기념 대회를 열었다. 대산 종법사의 제창으로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일원세계!]라는 주제 아래 열린 이 기념 대회는, 7일에, 대종사 유품 전시회, 영모전 낙성 및 묘위 봉안 봉고제, 정산 종사 성탑 제막식, 대회 전야제를 거행하고, 8일에, 반백년 기념관 봉불 및 낙성식을 거행한 후, 원광대학 광장에서 반백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반백년 기념식에는 3부(部)의 요인, 종교계 대표, 언론인들과, 미국·중국·일본 등 해외 종교인들이 다수 참석하였고, 전국 2백여 교당과 기관에서 4만여 교도 대표가 모였으며, 박 광전 대회장의 대회사와 대산 종법사의 치사에 이어, 경과 보고와 시상, 정계·종교계·해외 종교계 각 대표의 축사가 있은 다음, 이 운권 교정원장의 제창으로 4개 항의 대회 결의문이 채택되고, 원불교 만세를 3창한 후, 폐회하였다. 대회사에서는, 인류를 위한 인류의 새 종교인 새 회상이 강조되었고, 치사에서는, 삼학 공부로 대 중화력, 사중 보은으로 대 감화력, 사요 실천으로 대 평등력을 발휘하는 일이 교단 만대의 뿌리요 제생 의세의 활력소라고 설법되었으며, 4개 항의 결의문은, 앞으로 새회상이 ①일체 종교와 세계 인류를 하나로 보아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주인 될 것과 ②빈부의 격차, 종족의 차별 없는 평등으로 세계의 질서를 정립할 것과 ③유구한 민족의 전통적 슬기를 바탕하여 세계적 정신 운동을 이 땅에서 달성할 것과 ④국제적 종교 연합 기구를 통하여 모든 종교의 융통을 토의하고, 진리적 종교의 신앙,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종교를 생활화 할 것이 다짐되었다. 기념식에 이어, 교립 남녀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장엄한 매스게임이 펼쳐지고, 오후에는 신축 기념관에서 기념 대사상 강연회가 열려 한·미·일 3개국 학자들(별록32)의 강연이 있은 후, 경축 예술제가 열렸다. 9일에는 체육 대회와 교리 강연 대회가 있었고, 10일에는 교역자 총회가 열려 교단의 새 방향에 관한 논의를 거듭, 9개항의 교역자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12일에는 이 공주 원력 사업인 대종사 대각 성비가 영산 성지에서 제막됨으로써 6일간의 개교 반백년 기념 대회는 그 막을 내리고, 이로 부터 새 회상은 대종사께서 예시하신 사 오백 년 결복 향한 거룩한 대전진을 계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