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성업(聖業)의 결실(結實):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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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목표사업기관(目標事業機關)의 확립 === | === 제2장 목표사업기관(目標事業機關)의 확립 === | ||
==== 1. 삼대 목표사업과 재단 기업의 시련 ==== | |||
대종사,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사업 목표는 교화·교육·자선의 세 가지니, 앞으로 이를 늘 병진하여야 우리의 사업에 결함이 없으리라] 하시고, 이 3대 목표의 사업 기관을 고루 시설해 보시려고 노력하시었으나, 험난한 시국 관계로 그 뜻을 다 펴지 못하고 떠나시었다. 해방 후, [원불교 교헌]은 [본교는, 유치원·학교·수양원·요양원·병원·양로원·고아원 등을 수의(隨宜) 설치한다]고 하고, [유치원· 학교는 일반 교육기관으로, 수양원·요양원은 본교 유공인의 수양과 요양기관으로, 병원·양로원·고아원은 일반 자선기관으로 한다]고 규정하여, 교단은 이 3대목표 사업 기관의 균형 있는 확립을 지향하기 시작하였다. | |||
그런데, 그 동안 교단의 유지와 사업을 뒷 받침해온 산업 기관은 주로 농원과 과원이었고, 교산 또한 정관평을 비롯, 대부분이 농토와 임야로 되어 있었다. 해방 후 법인으로 등록된 새 회상 재단의 농지 중 직접 경작하지 않던 논 20여만 평과 밭 8만 여평이 원기 35년(1950·庚寅)에 실시된 농지 개혁법에 의하여 전부 정부에 매상 되었다. 그에 따라, 교단은 해당 농지에 대한 문교재단 보상금(地價證券:正租 2,771石4斗整)을 상공업 병진 기업체로 전환 운영할 것을 결의하고, 삼례 과원에서 다량 생산되는 통조림 제조용 황도가 그 방면에 수급되지 못함을 전용(轉用) 하여, 과정 양조(果精釀造)를 주 종목으로 하는 대기업체 하나를 창설하기로 하고, 36년(1951·辛卯) 8월, 이리에 있는 귀속 재산을 사들여 재단 기업체 삼창 공사(三昌公社)를 창립하였다. | |||
삼창이란 3대 사업을 창성케 하자는 뜻이었고, 재단의 지가 증권이 거의 다 투자되었으며, 삼례 과원을 직속 기관으로 까지 하였으나, 삼창 공사는 시국의 격동으로 인한 경제 불안, 편법에만 따른 부적당한 기업종목, 관리의 경험 부족 등으로 운영 3년 여에 기대했던 결과를 보지 못하고 끝나, 그 후 여러 해 동안 총부 경제가 큰 시련을 겪게 되었고, 42년(1957·丁酉) 11월에 총부 유지대책 위원회를 발족시켜, 이듬해 5월에야 총부 유지답(7,000여평)을 겨우 장만하게 되었다. | |||
==== 2. 교육 사업 진흥과 원광학원군 ==== | |||
유일학림 개설 후 5년 동안 새 회상은 간고한 가운데서도 학림 중등부를 중학교로, 학림 전문부를 대학교로 승격 육성코자 꾸준히 활동하여, 원기 36년(1951·辛卯) 6월, 이리에 원광 중학교의 설립 인가를, 그 해 9월, 총부 동편에 원광 대학의 설립 인가를 얻어, 학장 박 장식을 초대 중학교장으로, 학감 박 광전(朴光田)을 초대 대학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새 회상의 교육 사업은, 초기의 영산 학원·총부 학원 및 총부를 비롯한 각처의 야학원 사업과, 해방 후의 국문 강습소 및 학림 교육을 거쳐, 이제 회상의 개교 정신과 국가의 교육 이념을 조화한 본격적 교육사업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원광학원 군(圓光學園群)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 |||
원광 대학은 당초 교학과(敎學科) 단과의 초급 대학으로 총부 구내에서 출발, 원기 37년(1952·壬辰) 7월에 제 1대 성업 봉찬 사업의 일환으로 교지(校地) 확보와 교사(校舍)의 첫 건축에 착수하여, 38년(1953·癸巳) 1월에 교학(敎學)·국문학(國文學) 2과의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3월에 제1 본관을 준공하고, 39년(1954·甲午)에 도서관을 신축하여 총부 도서실 장서(藏書) 전부를 이양 받은 후, 해마다 학과 증설과 교사 증축을 거듭하다가, 52년(1967·丁未)에 대학원을 설립하고, 56년(1971·辛亥) 12월에 종합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원광 대학교는 대학 교육으로 국가 사회에 공헌함은 물론, 원불교학과로 새 회상 교역자를 많이 양성 하였으며, 부설 원불교학 연구회와 종교 문제 연구소는 새 회상의 교학 수립 및 타종교와의 비교 연구에, 해외 포교 연구소는 새 회상의 해외 포교 준비에 상당히 공헌하였다. | |||
원광 중학교는 원기 37년(1952·壬辰) 10월에 교지를 확보하고, 39년(1954·甲午) 2월에 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 해 4월에 제 1 본관, 40년(1955·乙未) 5월에 제2 본관을 준공하고, 그 해 9월과 41년(1956·丙申) 9월에 증축 공사, 42년(1957·丁酉) 4월에 여자 중학생 분리 운영, 50년(1965·乙巳) 6월에 제 3 본관 신축 착수, 51년(1966·丙午) 4월에 2대 교장 정 광훈(丁光薰)이 임명되었다. | |||
원광 여자 중고등학교는 원기 41년(1956·丙申) 4월에 원광대학 부속 여자 고등학원(원장 朴將植)으로 발족, 익산 보화원 강당에서 수업하다가 42년(1957·丁酉) 4월에 원광 중학교 일부를 빌려 여자 중학생을 흡수, 45년(1960·庚子) 2월에 여자 중학교와 여자 상업 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초대 교장에 정 성숙(丁盛熟)이 임명되었고, 법은 재단을 비롯, 각 교당의 후원으로 47년(1962·壬寅) 7월에 교지·교사를 확보하여 독립하였다. | |||
원광 남녀 중고등학교 또한 일반 교육으로 국가 사회에 공헌은 물론, 적지 않은 전무출신 지원자를 배출하여 교단 인재 양성에 기여하였다. | |||
이 밖에도, 원기 37년(1952·壬辰)에 도양지부 부설로 발족한 원광 중학원은 그 후 도양 고등 공민학교·해룡 농업 기술학교로 발전, 마침내 반백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해룡 중학교의 기초가 되어, 성지 근화(聖地近化)에 이바지가 되었고, 원기 20년대(年代) 이래 꾸준히 계속해 온 총부 야학원을 계승하여 익산 보화원 원내 교육기관으로 40년(1955·乙未)에 발족한 원광 고등 공민학교도 총부 근화와 인재 배출에 상당히 공헌하였다. | |||
==== 3. 삼대 선원(三大禪院) 개설과 장학 사업 ==== | |||
원기 40년(1955·乙未) 1월, 교무 연합회에서 중앙 직할 3대 선원 설립이 공고되었다. 이는, 원기 38년(1953·癸巳) 6월에 설립된 이리 고등선원을 동산선원으로, 그 동안의 총부 선원을 중앙 선원으로, 영산 학원을 영산 선원으로 각각 발전시키되, 이 3대 선원을 중앙 직할 선원으로 하여 장차 새 회상 교역자 양성의 본거를 삼자는 것이었다. | |||
그리하여, 동산 선원은 고등선원 교감 이 운권을 초대 원장으로 발령, 그 해 3월에 제 1회 수료생을 내고, 그 후 조 전권·안 이정(安理正)이 원장의 대(代)를 이어, 매년 수선(修禪)을 계속, 원광 대학 교학과와 함께 새 회상 교역자 배출의 쌍벽을 이루었다. 중앙 선원은 동산 선원장(李雲捲)을 초대 원장으로 겸임 발령하여 종전 제도로 지내오다가, 42년(1957·丁酉)에 이 완철을 전임(專任) 원장으로 발령하여, 그 해 11월 6일 첫 결제식을 가졌다. 그러나, 어려워진 교단 경제 아래 자체의 유지 토대가 확립되지 못하여, 휴원·재개원을 거듭하다가, 한 동안 동산 선원과 병합 운영도 하고, 54년(1969·己酉)부터는 총부 구내 상주선원(常住禪院)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그 후 중앙 훈련원으로 발전하였다. | |||
영산 선원은 전재 복구와 재방언 등 관계로 쉽게 발족을 보지 못하다가 47년(1962·壬寅)에 우선 영산지부에서 학원 제도 형식을 복구하였고, 49년(1964·甲辰) 3월에 초대 원장 안 이정을 임명, 중등·고등 2부 편제의 초등 선원으로 개원하여 정관평 작농도 겸한 선농 일치 교육을 실시, 54년(1969·己酉)에 2대 원장 오 종태가 단일 편제로 상급 선원 진학의 길을 계속 열어 주어, 교역자 육성에 기여하였다. | |||
한 편, 원기 42년(1957·丁酉) 4월에 원불교 장학회가 발족하였다. 회상 초기부터 꾸준히 염원되어 온 교단 인재 양성의 꿈은, 원기 12년(1927·丁卯)에 육영부 창립단 활동이 시작되고, 19년(1934·甲戌)의 새 회규는 십부 중 육영부를 두어 기금 육성을 전담케 하였으나, 시국 관계로 소기의 재단이 이루어 지지않자, 27년(1942·壬午), 부서에서 제외되었다가, 그 후 학교와 선원들의 교역자 양성 작업이 차차 진전되자, 이에 이르러 장학회를 발족하고, 이어, 교헌 개정(원기44·1959)으로 육영부(부장·徐大仁)를 부활시켜 육영 장학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게 하였다. 정산 종법사는 장학회 치사에서 [초(楚)나라는 오직 어진 이를 보배 삼았다 하거니와, 우리는 오직 철저한 신심과 알뜰한 공심 가진 혈성 동지들을 기르고 또 길러서 우리의 무궁한 사업에 실다운 보배를 삼고 자산을 삼자] 하시었다. | |||
또한, 43년(1958·戊戌)에 목포 김 현관(金玄觀)은 육영 사업을 발원, 연차 계획으로 수계 농원에 상당 규모의 인삼 재배를 실시하여, 46년(1961·辛丑) 5월에 은산 육영재단을 설립하였고, 그 해 10월에 원불교 육영재단 정관을 제정, 11월 부터 거교적인 장학회원 모집 운동을 일으키어, 상당한 재단이 형성되자, 47년(1962·壬寅) 5월에 육영재단 이사회(이사장·文東賢)를 구성하여 교단 만년 대계인 육영 장학을 계속 뒷받침하게 하였다. | |||
==== 4. 자선 사업 개척과 요양 사업 ==== | |||
대종사 재세시부터 그토록 염원하시던 새 회상의 자선 사업은, 해방 직후에 전재 동포 구호로 그 막을 열었고, 그 해(1945·乙酉) 11월, 서울 보화원을 한남동에 설립함으로써 첫 결실을 보았으며, 36년(1951·辛卯) 1월, 1·4후퇴 때 총부로 피난 온 서울 보화원 원아 일부를 수용한 익산 보화원(초대원장·宋慧煥)이 발족되고, 38년(1953·癸巳) 5월에 이리시로 부터 인수한 이리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부터 새 회상의 무의탁자 보호 사업은 그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 |||
한 편, 양로 사업도 34년(1949·己丑) 4월 부터 총부 일부에 그 설립을 모색해 오다가 37년(1952·壬辰) 3월에 당국의 인가를 얻어, 총부에 신룡 양로원(초대원장·宋慧煥)을 설립하여, 41년(1956·丙申) 7월, 원사(院舍) 신축과 함께 중앙 수양원으로 개칭하고 이사하였으며, 때를 같이 하여 설립된 전주 양로원과 48년(1963·癸卯) 4월에 설립된 동래 수양원도 무의탁 노인들의 보호 사업과 회상 유공 노인들의 수양에 상당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 |||
또한, 전무출신 요양기관 겸 자선병원을 설립하기 위하여 원기 35년(1950·庚寅) 3월에는 보화당 자금으로 금산 과원을 인수, 금산 요양원(초대원장·李東震華)을 설립하여 38년(1953·癸巳)에 총부로 이전, 39년(1954·甲午) 4월에 중앙 요양원(원장·宋慧煥)으로 발전하였으며, 40년(1955·乙未) 5월, 북일면 진료소를 겸한 원사(院舍)를 신축하고, 42년(1957·丁酉) 10월에는 동화병원 설립 인가와 함께 정부의 보조를 받아 44년(1959·乙亥) 10월 총 건평 220평의 2층 병원을 완공 하였으나, 그 후 인사난과 운영난으로 이전·휴원·재개원을 거듭하다가, 법은 재단(法恩財團)과 제휴하여 설립 목적 달성에 부심하게 되었다. | |||
=== 제3장 일원세계(一圓世界)의 터전 === |
2025년 1월 23일 (목) 19:27 판
■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全文 →제1편 개벽(開闢)의 여명(黎明) →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 → 제3편 성업(聖業)의 결실(結實)
제1장 성업봉찬(聖業奉贊)사업
1. 대종사 성탑의 봉건과 봉찬사업 준비
원기 34년(1949·己丑) 4월 25일, 총부 구내 영모원(永慕園) 송림 안에 대종사 성탑을 봉건하고, 성탑에 성해 입탑식(聖骸入塔式)을 거행 함으로써 대종사 성업 봉찬 보본 사업이 그 막을 올렸다. 그 동안 각지 교도의 알뜰한 성금을 모아, 황등산 화강석으로 조성한 대종사 성탑은, 연화를 양각(陽刻)한 기단(基壇)위에 연화대석을 받치고, 원석(圓石)을 올려, 그 안에 성해(聖骸)를 봉안한 후 5층의 탑신과 개석(蓋石)을 쌓아, 그해 10월에 준공한 바, 이로써 대종사 열반 후 6년만에 성해가 성탑에 모셔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성탑을 중심한 영모원 일대가 길이 보본 숭모의 성역으로 화하였다. 다음 날 열린 중앙 교의회에서는 [대종사주 성업 봉찬회]가 조직되었고, 이듬 해(원기35·1950)의 중앙 교의회에서는 [창립 제 3회 1대 기념사업 준비 위원회](위원장 李共珠)가 구성 되었으나, 6·25동란으로 준비가 부진하여, 그 해 10월의 임시 중앙 교의회에서 기념 총회를 1년 연기하기로 하고, 성업 봉찬회와 기념 준비 위원회를 [3회 성업 봉찬회]로 종합 발족 하는 동시에, 위원장 이 공주 주관 아래 교단의 연혁 편찬과 대종사 성비 봉건을 준비하는 한 편, 제 1대 전체 교도의 사업 성적 총 결산 사무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 때 감찰원(원장 李雲捲)에서는 전체 교도의 법위 사정 사무를 아울러 시작하니, 이는, 원기 16년(1931·辛未) 3월에 대종사께서 제 2차 법위 사정을 실시하신 후 만 20년 만에 시행되는 제 3차 법위 사정 작업이었다. 한 편, 원기 33년(1948·戊子)에는 오 창건의 발기와 감역으로 봉래정사 석두암을 중수하여 제법 성지의 면목을 일신케 하였으나, 불행히 6·25동란 중 소실 되었으며, 성탑을 준공한 그 해(원기34년·1949)에는 [불교정전]의 부분 개쇄(部分改刷)를 행하여, 대종사의 본의에 유감 되었던 점을 1차로 없이 하였다.
2. 제 1대 성업 봉찬 대회
원기 38년(1953·癸巳) 4월 26일에 제 1대 성업봉찬 대회가 열렸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원정 기일(元定期日)을 1년 연기하였으나 새 회상이 창립 제 1대를 공적으로 마감하는 동시에, 제 2대를 맞게 되는 뜻 깊은 기념 일이었다. 이날 오전 10시, 새로 다듬은 원광대학 광장의 대회장에는 수 많은 축하 인사와 5천 여명의 남녀 교도가 운집한 가운데 수위단 중앙단원 유 허일의 대회사로 대회가 개회되고, 종법사의 치사와 봉찬회장 이 공주의 기념사에 이어, 제 1대 전체 교도의 공부 사업 원성적 내역 발표와 성적표 수여가 있은 후, 중앙 정계 인사들의 축사에 이어, 원불교 만세 삼창으로 폐회 되었다. 이 날 오후에는 김 영신·조 전권에 대한 첫 연화장 수여식이 있었으며, 다음날의 중앙 교의회에서는 정산 종법사를 연임 추대하고, 첫 총선거로 수위단이 개편되었으며, 교정원장에 김 대거, 감찰원장에 이 공주를 선임하여, 제 2대 교단의 첫 운영을 맡겼다. 또한 새 회상은 당년 부터 시창 연호를 원기로 기록하기로 하고, 새 대향 예법을 실행하며, 대종사 성비를 봉건함으로써, 동란 중 경제 공황 속에 재가 출가가 정성을 모은 제 1차 대종사 성업 봉찬 사업의 막을 내렸다. 제 1대 전체 교도의 공부 사업 원성적 내역은, 준 5등 이상 입등자 1,754명 중, 전무출신 입등자 258명, 거진출진 입등자 1,496명인 바, 전무출신은 준 특등 8명, 정 1등 17명, 준 1등 20명, 정 2등 6명, 준 2등 40명, 정 3등 28명, 준 3등 48명, 정 4등 31명, 준 4등 31명, 정 5등 10명, 준 5등 13명, 확정 보류자 6명이요, 거진 출진은 준 특등 1명, 정 1등 3명, 준 1등 6명, 정 2등 8명, 준 2등 16명, 정 3등 23명, 준 3등 78명, 정 4등 51명, 준 4등 179명, 정 5등 211명, 준 5등 881명, 특별 추증자 39명이었다. 전무출신 준 특등자는 이 공주·송 도성·김 광선·김 기천·이 동안·이 동진화·오 창건·이 재철이요, 거진출진 준 특등자는 황정신행 이었으며, 법위 정사(正師) 이상자는 원정사(圓正師) 송 도성, 정사(正師) 김 광선·김 기천·이 동안·오 창건·이 재철·박 세철·이 인의화(李仁義華)·서 동풍 이었다. 총 결산 후, 정산 종법사는 [공부의 등위와 사업의 등급에 공정을 기하고자 애를 썼으나, 어찌 그 숨은 공부와 숨은 공로가 다 드러나기를 바랄 수 있으리요. 그런즉 우리는, 참다운 사정(査定)은 호리도 틀림 없는 진리에 맡기고 이번에 나타난 등급으로는 앞 날의 적공에 더욱 분발할 대중만 삼는다면, 이 분들이 참으로 알뜰한 우리 동지요, 참으로 등급 높은 공인(功人)이니, 후일, 영모전에서 등위보다 실적이 넉넉한 선령은 제사 받기가 떳떳하지마는, 실적이 혹 등위만 못한 선령은 헛 대접 받기가 얼마나 부끄러우리요] 하시었다.
3. 제 1대의 교세
창립 제 1대의 총 교도수는, 의무 교도 32,244명, 일반 신도 290,196명, 합계 322,440명으로 되어 있으며, 전무출신은 260여명이고, 교당은 익산·이리·남선·수계·삼례·영산·신흥·대마·도양·광주·봉동·왕촌·서울·개성·춘천·마령·전주·좌포·관촌·중길·임실·장수·당리·경남·초량·용암·진영·다대·금산·용신·신태인·화해·정읍·승부·남원·운봉·호곡·금평·오수·군산 등 40개 교당에, 함열·덕룡·산서·목동·인월·창평·순창·목포·마산·부안 등 준지소(准支所)를 합하여 50개 교당으로 되어 있는 바, 여기에 열거되지는 아니하였으나, 원기 26년(1941·辛巳)에 장 적조가 만주 목단강에 교당 설립을 모색, 박 대완 교무를 파송까지 하였다가 일정의 탄압으로 철수한 일은 국외 포교 제2차의 사실 이었다. 또한, 기관은, 교육기관이 원광 대학, 원광 중고등학교, 도양의 원광 중학원 등 3개, 자선 기관이 서울 보화원, 익산 보화원, 신룡 양로원, 전주 양로원, 기타 등 7개, 산업기관이 삼창 공사, 보화당 약방, 유일 정미소, 삼창 과원, 이흥 과원, 영산 과원, 금산 과원 등 7개소였고, 출판 기관인 원광사를 합하여 모두 18개 기관이었다.
4. 새 [예전]의 편성과 보본 행사
정산 종법사는 일찍부터 일반 예의 교육의 긴급함과 발전 교단의 의례 보완이 절실히 필요함을 통감하여, 원기 36년(1951·辛卯) 9월에 새 [예전] 전 3편을 탈고하고, 이듬 해(원기37·1952) 7월에 이를 임시판으로 발간하시었다. 새 [예전]은, 제 1편 조신의 예, 제 2편 가정의 예, 제 3편 교회의 예로 되어 있는데, 종전의 [예전]에 비하여, 조신의 예 총 19장이 새로 편입되었고, 가정의 예에 회갑·천도재가 증보 되었으며, 교회의 예에 봉불·법회·득도·은법 결의·대사·봉고·특별기도·축하·영모전·영모원·대향·교의 등이 새로 편입되고, 그 밖의 예도 많이 개편되었다. 그 중, 조신의 예는 개인의 몸 가지는 통례로서 모든 사람이 예의 근본을 닦게 하는 요법이 되고, 영모전 대향 예법은 기념 일과 기념 묘우(廟宇)를 통일하여 대종사 이하 역대 열위 선령께 공동 향례를 받들도록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원기 38년(1953·癸巳) 6월 1일, 교단 일제히 하향(夏享)을 거행함으로써, 새 회상은 새 대향 예법을 실행하기 시작하였고, 그 날 오후 영모원에 봉건한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비를 제막하였다. 정산 종법사 지으신 비문은, 새 회상이 새 세상의 주세 회상임과 대종사께서 새 시대의 주세 성자이심을 처음으로 금석(金石)에 각하여 천하에 고한 것으로서, 그 끝절에 [대종사는 일찌기 광겁 종성(曠劫種聖)으로 궁촌 변지에 생장하시어, 학문의 수습(修習)이 없었으나 문리를 스스로 알으시고, 사장의 지도가 없었으나 대도를 자각하시었으며, 판탕(板蕩)한 시국을 당하였으나 사업을 주저하지 아니하시고, 완강한 중생을 대할지라도 제도의 만능이 구비하시었으며, 기상은 태산교악 같으시나 춘풍 화기의 자비가 겸전하시고, 처사(處事)는 뇌뢰 낙락(磊磊落落)하시나 세세 곡절의 진정을 통해 주시며, 옛 법을 개조하시나 대의(大義)는 더욱 세우시고 시대의 병을 바루시나 완고에는 그치지 않게 하시며, 만법을 하나에 총섭하시나 분별은 오히려 역력히 밝히시고, 하나를 만법에 시용(施用)하시나 본체는 항상 여여히 드러내사, 안으로는 무상묘의(無上妙義)의 원리에 근거하시고, 밖으로는 사사 물물의 지류(支流)까지 통하시어 일원 대도의 바른 법을 시방 삼세에 한 없이 열으시었으니, 이른 바 백억 화신의 여래시요 집군성이대성(集群聖而大成)이시라]고 새겨 있다. 한 편, 새 회상은, 원기 40년(1955·乙未) 7월에 원광지가 발기한 혈인 기념일 행사를 41년(1956·丙申)부터 거교적 행사로 시행하여, 후일 사대 경축의 하나인 법인절로 지정하였고, 그 해(원기 41·1956) 8월에는 영모전 묘위법을 일부 개정하여, 종사 위 위패를 대종사 위 정면 중단에 설위하고, 그 좌편에 대봉도 위, 그 우편에 대호법 위를 설위하기로 한 후, 42년(1957·丁酉) 4월 대회에서 주산 송 도성에게 종사 위, 팔산 김 광선과 구타원 이 공주에게 대봉도 위, 팔타원 황 정신행에게 대호법 위를 드리는 새 회상의 첫 법훈 증여식을 거행하였다. 정산 종법사는 치사에서 [나는 이 네 분 원훈(元勳)이 초창기 우리 회상에 공헌한 공부 사업 두 방면의 위대한 법훈(法勳)을 모든 대중과 더불어 높이 찬양하는 동시에, 재가 출가의 남녀 동지들이 여기에 마음을 다시 새로이 하여, 앞으로 우리 회상에 수 많은 종사와 수 많은 대봉도와 수 많은 대호법이 끊임 없이 배출되기를 믿고 바란다]고 하시었다.
5. 정관평 재방언과 성지 사업
정관평 첫 방언 공사 후 30여년이 경과함을 따라, 언(堰)은 대대적인 보수를 요하게 되었고, 이를 확장 재방언하게 될 경우 국가 부흥 계획의 일부 원조를 받을 것이 확실하게 되어, 원기 40년(1955·乙未) 8월에는 정산 종법사를 총재, 송 혜환을 위원장, 김 홍철을 실무 부위원장으로 하는 영광 정관평 재방언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고, 이듬 해 4월에 그 착공식을 거행하였다. 공사는, 각지 교당 봉공대의 봉공 작업과, 작업에 참가 못하는 교도들의 노임 대전(勞賃代錢)으로 기초 작업을 마친 후, 정부의 보조를 받아, 방조제 및 방수제, 2개소의 배수 갑문, 저수 호안 및 배수 암거 등 다양한 모든 공사를 44년도(1959·己亥)에 완공하여, 27,000여평의 새 농토와 그에 따른 완전 수리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새 언의 축조로 농토 안에 들어가게 된 구언(舊堰)은 보존 기념하기로 하였으며, 총공사비(3,000여만원) 중 7할은 정부 보조에 힘입었다. 한 편, 동란 중 황폐된 영산 성지의 복구 운동이 성지에서 요양 중이던 김 대거에 의하여 발기되어, 원기 43년(1958·戊戌)부터 대종사 성탄지와 대각 성지 일대가 매입 되었고, 재방언 공사가 끝난 44년(1959·己亥)부터 성지의 개척 사업이 더욱 활발해 져서, 성탄지와 구간 도실 일대의 토지 임야, 삼밭재 일대의 임야를 매입하는 동시에, 성지 순례 도로의 확대 보수 공사를 추진하였다. 45년(1960·庚子) 1월에는 교정위원회에서 [영산성지 개척공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우선 주요 지점의 녹화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반백년 기념 사업회가 발족되면서 성지 장엄을 그 사업 종목에 넣어, 대각 성지 주변 임야의 매입, 영산 대각전의 수축 등 성역의 확대 보수에 힘쓰게 되었다.
제2장 목표사업기관(目標事業機關)의 확립
1. 삼대 목표사업과 재단 기업의 시련
대종사,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사업 목표는 교화·교육·자선의 세 가지니, 앞으로 이를 늘 병진하여야 우리의 사업에 결함이 없으리라] 하시고, 이 3대 목표의 사업 기관을 고루 시설해 보시려고 노력하시었으나, 험난한 시국 관계로 그 뜻을 다 펴지 못하고 떠나시었다. 해방 후, [원불교 교헌]은 [본교는, 유치원·학교·수양원·요양원·병원·양로원·고아원 등을 수의(隨宜) 설치한다]고 하고, [유치원· 학교는 일반 교육기관으로, 수양원·요양원은 본교 유공인의 수양과 요양기관으로, 병원·양로원·고아원은 일반 자선기관으로 한다]고 규정하여, 교단은 이 3대목표 사업 기관의 균형 있는 확립을 지향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동안 교단의 유지와 사업을 뒷 받침해온 산업 기관은 주로 농원과 과원이었고, 교산 또한 정관평을 비롯, 대부분이 농토와 임야로 되어 있었다. 해방 후 법인으로 등록된 새 회상 재단의 농지 중 직접 경작하지 않던 논 20여만 평과 밭 8만 여평이 원기 35년(1950·庚寅)에 실시된 농지 개혁법에 의하여 전부 정부에 매상 되었다. 그에 따라, 교단은 해당 농지에 대한 문교재단 보상금(地價證券:正租 2,771石4斗整)을 상공업 병진 기업체로 전환 운영할 것을 결의하고, 삼례 과원에서 다량 생산되는 통조림 제조용 황도가 그 방면에 수급되지 못함을 전용(轉用) 하여, 과정 양조(果精釀造)를 주 종목으로 하는 대기업체 하나를 창설하기로 하고, 36년(1951·辛卯) 8월, 이리에 있는 귀속 재산을 사들여 재단 기업체 삼창 공사(三昌公社)를 창립하였다. 삼창이란 3대 사업을 창성케 하자는 뜻이었고, 재단의 지가 증권이 거의 다 투자되었으며, 삼례 과원을 직속 기관으로 까지 하였으나, 삼창 공사는 시국의 격동으로 인한 경제 불안, 편법에만 따른 부적당한 기업종목, 관리의 경험 부족 등으로 운영 3년 여에 기대했던 결과를 보지 못하고 끝나, 그 후 여러 해 동안 총부 경제가 큰 시련을 겪게 되었고, 42년(1957·丁酉) 11월에 총부 유지대책 위원회를 발족시켜, 이듬해 5월에야 총부 유지답(7,000여평)을 겨우 장만하게 되었다.
2. 교육 사업 진흥과 원광학원군
유일학림 개설 후 5년 동안 새 회상은 간고한 가운데서도 학림 중등부를 중학교로, 학림 전문부를 대학교로 승격 육성코자 꾸준히 활동하여, 원기 36년(1951·辛卯) 6월, 이리에 원광 중학교의 설립 인가를, 그 해 9월, 총부 동편에 원광 대학의 설립 인가를 얻어, 학장 박 장식을 초대 중학교장으로, 학감 박 광전(朴光田)을 초대 대학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새 회상의 교육 사업은, 초기의 영산 학원·총부 학원 및 총부를 비롯한 각처의 야학원 사업과, 해방 후의 국문 강습소 및 학림 교육을 거쳐, 이제 회상의 개교 정신과 국가의 교육 이념을 조화한 본격적 교육사업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원광학원 군(圓光學園群)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원광 대학은 당초 교학과(敎學科) 단과의 초급 대학으로 총부 구내에서 출발, 원기 37년(1952·壬辰) 7월에 제 1대 성업 봉찬 사업의 일환으로 교지(校地) 확보와 교사(校舍)의 첫 건축에 착수하여, 38년(1953·癸巳) 1월에 교학(敎學)·국문학(國文學) 2과의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3월에 제1 본관을 준공하고, 39년(1954·甲午)에 도서관을 신축하여 총부 도서실 장서(藏書) 전부를 이양 받은 후, 해마다 학과 증설과 교사 증축을 거듭하다가, 52년(1967·丁未)에 대학원을 설립하고, 56년(1971·辛亥) 12월에 종합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원광 대학교는 대학 교육으로 국가 사회에 공헌함은 물론, 원불교학과로 새 회상 교역자를 많이 양성 하였으며, 부설 원불교학 연구회와 종교 문제 연구소는 새 회상의 교학 수립 및 타종교와의 비교 연구에, 해외 포교 연구소는 새 회상의 해외 포교 준비에 상당히 공헌하였다. 원광 중학교는 원기 37년(1952·壬辰) 10월에 교지를 확보하고, 39년(1954·甲午) 2월에 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 해 4월에 제 1 본관, 40년(1955·乙未) 5월에 제2 본관을 준공하고, 그 해 9월과 41년(1956·丙申) 9월에 증축 공사, 42년(1957·丁酉) 4월에 여자 중학생 분리 운영, 50년(1965·乙巳) 6월에 제 3 본관 신축 착수, 51년(1966·丙午) 4월에 2대 교장 정 광훈(丁光薰)이 임명되었다. 원광 여자 중고등학교는 원기 41년(1956·丙申) 4월에 원광대학 부속 여자 고등학원(원장 朴將植)으로 발족, 익산 보화원 강당에서 수업하다가 42년(1957·丁酉) 4월에 원광 중학교 일부를 빌려 여자 중학생을 흡수, 45년(1960·庚子) 2월에 여자 중학교와 여자 상업 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초대 교장에 정 성숙(丁盛熟)이 임명되었고, 법은 재단을 비롯, 각 교당의 후원으로 47년(1962·壬寅) 7월에 교지·교사를 확보하여 독립하였다. 원광 남녀 중고등학교 또한 일반 교육으로 국가 사회에 공헌은 물론, 적지 않은 전무출신 지원자를 배출하여 교단 인재 양성에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원기 37년(1952·壬辰)에 도양지부 부설로 발족한 원광 중학원은 그 후 도양 고등 공민학교·해룡 농업 기술학교로 발전, 마침내 반백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해룡 중학교의 기초가 되어, 성지 근화(聖地近化)에 이바지가 되었고, 원기 20년대(年代) 이래 꾸준히 계속해 온 총부 야학원을 계승하여 익산 보화원 원내 교육기관으로 40년(1955·乙未)에 발족한 원광 고등 공민학교도 총부 근화와 인재 배출에 상당히 공헌하였다.
3. 삼대 선원(三大禪院) 개설과 장학 사업
원기 40년(1955·乙未) 1월, 교무 연합회에서 중앙 직할 3대 선원 설립이 공고되었다. 이는, 원기 38년(1953·癸巳) 6월에 설립된 이리 고등선원을 동산선원으로, 그 동안의 총부 선원을 중앙 선원으로, 영산 학원을 영산 선원으로 각각 발전시키되, 이 3대 선원을 중앙 직할 선원으로 하여 장차 새 회상 교역자 양성의 본거를 삼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산 선원은 고등선원 교감 이 운권을 초대 원장으로 발령, 그 해 3월에 제 1회 수료생을 내고, 그 후 조 전권·안 이정(安理正)이 원장의 대(代)를 이어, 매년 수선(修禪)을 계속, 원광 대학 교학과와 함께 새 회상 교역자 배출의 쌍벽을 이루었다. 중앙 선원은 동산 선원장(李雲捲)을 초대 원장으로 겸임 발령하여 종전 제도로 지내오다가, 42년(1957·丁酉)에 이 완철을 전임(專任) 원장으로 발령하여, 그 해 11월 6일 첫 결제식을 가졌다. 그러나, 어려워진 교단 경제 아래 자체의 유지 토대가 확립되지 못하여, 휴원·재개원을 거듭하다가, 한 동안 동산 선원과 병합 운영도 하고, 54년(1969·己酉)부터는 총부 구내 상주선원(常住禪院)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그 후 중앙 훈련원으로 발전하였다. 영산 선원은 전재 복구와 재방언 등 관계로 쉽게 발족을 보지 못하다가 47년(1962·壬寅)에 우선 영산지부에서 학원 제도 형식을 복구하였고, 49년(1964·甲辰) 3월에 초대 원장 안 이정을 임명, 중등·고등 2부 편제의 초등 선원으로 개원하여 정관평 작농도 겸한 선농 일치 교육을 실시, 54년(1969·己酉)에 2대 원장 오 종태가 단일 편제로 상급 선원 진학의 길을 계속 열어 주어, 교역자 육성에 기여하였다. 한 편, 원기 42년(1957·丁酉) 4월에 원불교 장학회가 발족하였다. 회상 초기부터 꾸준히 염원되어 온 교단 인재 양성의 꿈은, 원기 12년(1927·丁卯)에 육영부 창립단 활동이 시작되고, 19년(1934·甲戌)의 새 회규는 십부 중 육영부를 두어 기금 육성을 전담케 하였으나, 시국 관계로 소기의 재단이 이루어 지지않자, 27년(1942·壬午), 부서에서 제외되었다가, 그 후 학교와 선원들의 교역자 양성 작업이 차차 진전되자, 이에 이르러 장학회를 발족하고, 이어, 교헌 개정(원기44·1959)으로 육영부(부장·徐大仁)를 부활시켜 육영 장학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게 하였다. 정산 종법사는 장학회 치사에서 [초(楚)나라는 오직 어진 이를 보배 삼았다 하거니와, 우리는 오직 철저한 신심과 알뜰한 공심 가진 혈성 동지들을 기르고 또 길러서 우리의 무궁한 사업에 실다운 보배를 삼고 자산을 삼자] 하시었다. 또한, 43년(1958·戊戌)에 목포 김 현관(金玄觀)은 육영 사업을 발원, 연차 계획으로 수계 농원에 상당 규모의 인삼 재배를 실시하여, 46년(1961·辛丑) 5월에 은산 육영재단을 설립하였고, 그 해 10월에 원불교 육영재단 정관을 제정, 11월 부터 거교적인 장학회원 모집 운동을 일으키어, 상당한 재단이 형성되자, 47년(1962·壬寅) 5월에 육영재단 이사회(이사장·文東賢)를 구성하여 교단 만년 대계인 육영 장학을 계속 뒷받침하게 하였다.
4. 자선 사업 개척과 요양 사업
대종사 재세시부터 그토록 염원하시던 새 회상의 자선 사업은, 해방 직후에 전재 동포 구호로 그 막을 열었고, 그 해(1945·乙酉) 11월, 서울 보화원을 한남동에 설립함으로써 첫 결실을 보았으며, 36년(1951·辛卯) 1월, 1·4후퇴 때 총부로 피난 온 서울 보화원 원아 일부를 수용한 익산 보화원(초대원장·宋慧煥)이 발족되고, 38년(1953·癸巳) 5월에 이리시로 부터 인수한 이리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부터 새 회상의 무의탁자 보호 사업은 그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한 편, 양로 사업도 34년(1949·己丑) 4월 부터 총부 일부에 그 설립을 모색해 오다가 37년(1952·壬辰) 3월에 당국의 인가를 얻어, 총부에 신룡 양로원(초대원장·宋慧煥)을 설립하여, 41년(1956·丙申) 7월, 원사(院舍) 신축과 함께 중앙 수양원으로 개칭하고 이사하였으며, 때를 같이 하여 설립된 전주 양로원과 48년(1963·癸卯) 4월에 설립된 동래 수양원도 무의탁 노인들의 보호 사업과 회상 유공 노인들의 수양에 상당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또한, 전무출신 요양기관 겸 자선병원을 설립하기 위하여 원기 35년(1950·庚寅) 3월에는 보화당 자금으로 금산 과원을 인수, 금산 요양원(초대원장·李東震華)을 설립하여 38년(1953·癸巳)에 총부로 이전, 39년(1954·甲午) 4월에 중앙 요양원(원장·宋慧煥)으로 발전하였으며, 40년(1955·乙未) 5월, 북일면 진료소를 겸한 원사(院舍)를 신축하고, 42년(1957·丁酉) 10월에는 동화병원 설립 인가와 함께 정부의 보조를 받아 44년(1959·乙亥) 10월 총 건평 220평의 2층 병원을 완공 하였으나, 그 후 인사난과 운영난으로 이전·휴원·재개원을 거듭하다가, 법은 재단(法恩財團)과 제휴하여 설립 목적 달성에 부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