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성업(聖業)의 결실(結實): 두 판 사이의 차이
124번째 줄: | 124번째 줄: | ||
=== 제5장 개교 반백년(開敎半百年)의 결실(結實) === | === 제5장 개교 반백년(開敎半百年)의 결실(結實) === | ||
==== 1. 새 회상의 확인과 반백년 준비 ==== | |||
새 회상은 처음부터 하나의 새 종교로 창건되었고, 불법을 주로 연원하되, 모든 종교의 교지(敎旨)도 이를 통합 활용하여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를 이룩하자는 것이 대종사의 본회(本懷)시었다. 이는 원기 33년(1948·戊子)에 원불교라는 교명을 공포하고, 교헌에 대종사를 교조로 규정함으로써 더욱 분명해 졌으며, 교전의 교법 총설과, 새 예전의 대향 예법과, 대종사 성비에 그 뜻이 더욱 천명되었다. | |||
그러나, 국가 사회의 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던 중, 원기 46년(1961·辛丑) 5·16 혁명 후 포고령에 의하여 교단의 제반 등록을 새로이 한 바, 이듬 해 8월에 불교계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불교 재산 관리법을 공포 시행하면서 새 회상에도 그 법을 적용, 등록을 촉구하였다. 이에 4인(별록31)의 위원이 관계 당국에 건의서를 제출하고 각방으로 직접 절충하여, 새 회상의 입장을 강력히 천명한 바, 47년(1962·壬寅) 11월 22일자로 [원불교는 창립 경위와 현재 상황 및 본질상 불교 재산 관리법의 적용을 받을 성질의 단체가 아니라]는 종교 심의 위원회 의결에 따른 정부의 회보를 받았고, 53년(1968·戊申) 11월에는 정부 간행 문서에 새 회상의 입장이 거듭 확인 공표되었다. | |||
원기 48년(1963·癸卯) 10월, 수위단회는 개교 55주년 경축 기념 행사를 56년(1971·辛亥)에 거행하기로 하고, 이어 열린 교정 위원회에서는 연구위원 20명을 선정하여 사업 추진의 요강 작성을 위임하였다. 49년(1964·甲辰) 4월, 중앙 교의회에서 개교 반백년 기념 사업회(회장·朴光田사무장·丁光薰)가 발족되고, 사업 종목은 기념관·영모전·정산종사 성탑 등의 건립, 영모원 및 총부의 기지 확장 정리, 영산 성지의 확장 및 장엄, 영역 교전·기념 문총의 발간, 대회 행사 등으로 책정하였다. | |||
51년(1966·丙午) 4월에는 사업회 임원이 일부 개편(사무장·金正勇)이 되고, 54년(1969·己酉)부터 총부 및 영모원의 기지 확장 정리와 종법실 신축이 진행 되었으며, 55년(1970·庚戌)에는 반백년 기념관·영모전·정산종사 성탑이 차례로 착공되고, [반백년 기념 문총]의 편집과 [교전] 영역도 착수 되었다. 55년(1970·庚戌) 4월, 교정 위원회에서는 반백년 기념 사업으로 서울 기념관 건설도 추가하기로 하여, 그 해 10월, 남한강에 거대한 회관을 기공하였으나, 그 후 이로 인하여 거교적인 수습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는 시련을 겪게 되었고, 56년(1971·辛亥) 3월에는 교정위원회와 수위단회의 합의로 기념대회를 10월에 개최하기로 확정하였다. | |||
==== 2. 수양기관 설립과 재단 기업 계열화 ==== | |||
원기 48년(1963·癸卯) 4월, 수위단회에서는 정남 정녀 휴양 기관으로 수도원의 설립이 의결 되었다. 일찌기 대종사께서 계획하시고 정산 종사 당시부터 그 설립을 모색, 자체에서 기금을 길러 온 수도원이, 이에 이르러 공식으로 발족되고, 초대 원장에 이 공주가 선임 되었다. 수도원은, 그 후 서울 한남동 대지를 인수, 그 완전 불하에 공헌하였으며, 한동안 양주 농장 등을 경영하였고, 55년(1970·庚戌) 1월에는 종로 5가에 건물을 매입하여 한의원 발족을 모색하였다. | |||
한 편, 원기 39년(1954·甲午)에 부안 교당(교무·丁良珍) 발의로 수도원에서 매입한 변산 하섬은 봉래산 제법 성지의 기슭에서 새 회상의 해상 수양원 겸 편수 도량이 되었으며, 46년(1961·辛丑)에 정산 종사의 발기로 대지(9백여평)를 매입, 남선 교당을 옮겨 둠으로써 시작된 충남 신도 수양 기관은 대산 종법사의 직접 후원 아래 7년 동안 기지 확장과 건물 매입을 계속해 오다가, 52년(1967·丁未) 10월, 수위단회에서 삼동 수양원(초대원장·李炳恩) 설립이 의결됨으로써 유서 깊은 지역에 특수한 수양원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또한 회상 초기부터 특별 연지(緣地)이던 진안 만덕산은 52년(1967·丁未)부터 복구 개발에 착수, 앞으로 선농 일치의 수양 기관을 모색 중이고, 기타 각처의 교단 양로원들이 다 수양원의 기능을 겸행하여 노후 유공인들의 수양에 공헌하고 있다. | |||
한 편, 새 회상이 반백년을 지내오는 동안, 교단의 여러 산업 기관들이 기복과 성쇠를 거듭하는 가운데, 보화당은 이 동안·송 혜환·조 희석이 차례로 대표 이사의 대를 이으며, 각 부면의 경제에 많은 공헌을 하는 중, 49년(1964·甲辰) 4월에는 이리 삼중당 제약사를 흡수하여, 그 해 9월에 보화 경옥고를 주종목으로 하는 보화당 제약사(사장·趙暿錫)를 창설함으로써 보화당은 상공업 병진 기업체가 되었고, 55년(1970·庚戌) 7월에는 기업의 중앙 진출과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하여 종로 5가에 서울 보화당(회장·李共珠사장·李喆行)을 개설하고, 이어서 57년(1972·壬子) 7월에는 이리 역전 보화당(사장·李喆行)을 개설함으로써 재단 기업체 보화당은 차차 계열 기업화하기 시작하였다. | |||
==== 3. 청년 운동과 출판 언론 진흥 ==== | |||
원기 48년(1963·癸卯)에 중앙 청년회가 결성되고, 49년(1964·甲辰) 7월에 초대 회장(權世英)을 선정한 원불교 청년회는 각 대학별 교우회의 조직, 사회 봉사를 통한 개교 이념의 구현, 청년 회관의 건립, 교당별 청년회의 조직 확대 등을 결의하고, 50년(1965·乙巳) 7월에는 교패(敎牌) 달기·청소 실시·교서 보내기 등 세 가지 운동을 벌였다. 51년(1966·丙午) 9월에는 2대 회장(金正勇)이 월간 [원불교 청년회보]를 발간하여 교단의 선교에도 도움을 주었고, 52년(1967·丁未) 4월 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원불교 사상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55년(1970·庚戌) 7월에는 총부에서 청년 대회를 개최, 반백년 사업에 청년회의 공헌을 다짐하였고, 56년(1971·辛亥) 7월에는 총부에서 전국 청년 지도자 대회, 하섬에서 전국 청년 수련 대회를 개최, 청년들의 반백년 결실을 더욱 다졌다. | |||
한 편, 원기 42년(1957·丁酉) 2월에 자체 인쇄 시설을 갖춘 원광사는, 격월간 또는 계간으로 [원광] 발간을 계속하면서, 총부와 각 교립 학교 간행물들을 발행하였고, 47년(1962·壬寅) 7월에는 원불교 기념 사진첩 편집 위원회가 서편(序編)·대종사 추모의 편 등 전 4편으로 된 [원불교 기념 사진첩]을 간행하였으며, 49년(1964·甲辰) 5월에는 총무부(부장·金勤修)가 월간 [원불교 교보]를 창간하여, 54년(1969·己酉) 3월 까지 60호를 발행하였다. | |||
53년(1968·戊申)에는 정화사가 [원불교 교고 총간] 사업을 시작, 회상 초기의 정기 간행물(月末通信·月報·會報)들과 초기 교서 기본 사료 각 항 자료들을 전 6권에 수록, 연차 간행하였고, 54년(1969·己酉) 3월에는 원불교 신보사(사장·金正勇 편집·趙政勤)를 설립, 반월간 [원불교 신보]를 창간함에 이르러, 교단의 언론이 많이 창달되고 문화 공보에 큰 소임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 해 7월에는 원불교 출판사를 원광사에 병설, 정화사가 이양한 판형으로 [원불교 교전]과 축쇄판 [교전·성가]를 계속 간행하였으며, 56년도(1971·辛亥)에는 개교 반백년 기념 사업회가 [반백년 기념 문총]을 발간하였고, 원광대학 부설 종교문제 연구소(소장·柳基現)는 [한국 종교 대계]를 발간하고, [원불교 사전(圓佛敎事典)]을 편찬하는 등 40년대 후반기 부터 새 회상의 언론 출판 부문은 상당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 |||
==== 4. 반백년의 교세 ==== | |||
반백년 기념 대회를 앞 두고 56년(1971·辛亥) 3월에 결산된 원기 55년도의 교세 개요를 보면, 재가 교도 수는 신도를 합하여 6십 여만명, 출가 교도 수는 예비 교역자를 합하여 1천 여명으로 되어 있고, 교산은 종교 재단(宗敎財團圓佛敎)과 학원 재단(學園財團圓光學園)으로 분할되어 있으나, 이사진의 단일화로 관리는 귀일되어 있었다. | |||
기관은 중앙 총부 각 부처와, 서울 사무소·영산 출장소 등 중앙 직할 기관이 24개소, 중앙 훈련원·동산선원·영산선원·원광 대학교·원광 중 고등학교·원광 여자 중 고등학교·원광 고등공민학교·해룡 농업 기술학교·해룡 중학교·원광 유치원 등 훈련 및 교육 기관이 12개소, 원광사·정화사·원불교 신보사·원불교 출판사 등 출판 문화 기관이 4개소, 수도원·삼동 수양원·하섬 수양원·동래 수양원·중앙 수양원·전주 양로원 등 수양 및 양로 기관이 6개소, 동화병원·중앙 요양원·이리 보육원 등 요양 및 자선 기관이 3개소, 보화당·보화당 제약사·서울 보화당·총부 농원·수계 농원·만덕산 농원·유일 정미소(재무부직할) 등 산업 기관이 7개소로 되어 있고, 청년회·학생회·유년회·수덕회·정토회 등 단체가 총지부를 망라하여 도합 50여개로 되어 있다. | |||
교당은, 전라북도에 이리·동이리·남중동·전주·교동·동전주·서전주·군산·익산·함라·금마·팔봉·수계·삼례·동산·봉상·마령·좌포·진안·백운·안천·무주·장수·산서·관촌·임실·오수·금평·지사·남원·수지·운봉·산동·아영·보절·북아영·인월·순창·화해·신태인·승부·정읍·용각·감곡·소성·태인·칠보·고부·덕천·고창·흥덕·해리·부안·원평·용신·화포·김제·금구·만경·임산 등 60개소, | |||
전라 남도에 광주·서광주·남광주·계림·목포·여수·순천·영산·신흥·왕촌·대마·도양·불갑·영광·군남·백수·법성·장성·해보·창평·곡성·겸면·구례·보성·영암·불목·완도·압해도 등 28개소, 서울 특별시에 서울·종로·원남·돈암·송천·신촌·사직·정릉·답십리·화곡·불광동·필동·청파·제기동 등 14개소, 경기도에 의정부·인천·수원·강화·부천·안양 등 6개소, 강원도에 춘천·남춘천·화천 등 3개소, 충청 남도에 대전·금산·제원·추부·유성·신도·도곡·강경 등 8개소, 충청 북도에 청주·괴산 등 2개소, 부산 직할시에 당리·경남·초량·다대·부산진·서면·동래·대신·구포·영도·남부민·해운대·청학·거제동 등 14개소, 경상 북도에 대구·서성로·봉덕·삼덕·경주·김천·포항·안동·성주 등 9개소, 경상 남도에 마산·신마산·진주·통영·진해·울산·삼천포·용암·진영·김해·함양·지곡·밀양·창원·합천·기장·고성·의령·양산 등 19개소, 제주도에 제주·서귀포 등 2개소, 출장 교화 장소로, 전북에 덕진·고산·중평·장계·사매·복흥·창동·무장·마포·봉황 등 10개소, 전남에 담양·나주, 충남에 장항, 경북에 경산 등이 있었고, 당년도 신설이 충남의 천안, 전남의 산동(求禮山東), 서울의 이문동, 전북의 함열 등이고, 전남의 장산도, 강원의 강릉이 개척 중에 있었다. | |||
==== 5. 기념관·영모전·정산 종사 성탑 봉건 ==== | |||
원기 56년(1971·辛亥) 10월, 반백년 기념 대회를 앞두고 반백년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불단 제도를 새롭게 하여, 정면 벽상에 대형 일원상만을 봉안한 대법당과, 1층·3층에 몇 개의 부속실을 둔 기념관은 교단의 중요 행사에 쓰이게 되며, 각 부속실은 얼맛동안 각부의 사무실로 쓰이게 되었다. | |||
아울러, 이 때에 영모전이 준공되니, 영모전 법이 교헌에 규정된 후, 실로 22년만의 성사(盛事)였다. 영모전은, 영모원 송림 아래 정초(定礎)하여 봉건한 바, 묘위는 새 [예전]에 의하여 본좌 상단 중앙에 대종사 소태산 여래 위, 중단 중앙에 종사 위, 그 좌우에 대봉도 위와 대호법 위, 대봉도 위 좌편에 전무출신 각등 위와 보통 출가 교도 위, 대호법 위 우편에 거진출진 각등 위와 보통 재가 교도 위를 모셨고, 좌편 별좌 상단에 희사 각 위와 그 하단에 일반 부모 선조 위, 우편 별좌 상단에 선성 각위와 그 하단에 일체 생령 위를 각각 모셔, 대종사와 열위 선령을 중심으로 시방 삼세 만성 만생이 다 함께 배향 되었으며, 이 때 본좌에 입묘된 입등 선령은 총 7백여 위였다. | |||
또한, 영모전 옆에 정산 종사 성탑이 봉건 되었다. 탑은 화강석 기단(基壇) 위에 3개의 사각 석물을 쌓아, 장방형 탑신을 이루고, 그 안에 성해를 봉안한 후, 앞 뒤로 탑호와 탑명을 새겼으며, 탑신 위에 연화대석과 원석을 올려 조성한 바, 정산 종사 열반 후 9년 동안 송대(松臺)에 임시 봉안하였던 성해가 이에 이르러 성탑에 모셔 지게 되었다. | |||
대산 종법사 지은 정산 종사 탑명에는 [정산 종사는 한 없는 세상을 통하여 대종사를 받들고 제생 의세의 대업을 운전하실 제, 신의는 고금을 일관하시고 경륜은 우주를 관통하시며, 시국의 만난(萬難) 중에서도 대도를 이어 받아 드러내시고, 흉흉한 세도 인심 속에서도 대자 대비로 모든 생령을 두루 안아 길러 주시며, 새 질서를 갈망하는 세계를 향하여 일원 세계 건설의 큰 길을 높이 외쳐 주셨으니, 후래 제자로서 묵묵히 우러러 뵈올 때에 대종사는 하늘이요 태양이시라면 정산 종사는 땅이요 명월이시며, 대종사는 우리의 정신을 낳아 주신 영부(靈父)시라면 정산 종사는 그 정신을 길러 주신 법모(法母)시라]고 결론되어 있다. | |||
==== 6. 개교 반백년 기념 대회 ==== | |||
원기 56년(1971·辛亥) 10월 7일부터 6일 동안 새 회상은 대종사께서 예시하신 사 오십년 결실의 뜻을 되새겨 다지는 개교 반백년 기념 대회를 열었다. 대산 종법사의 제창으로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일원세계!]라는 주제 아래 열린 이 기념 대회는, 7일에, 대종사 유품 전시회, 영모전 낙성 및 묘위 봉안 봉고제, 정산 종사 성탑 제막식, 대회 전야제를 거행하고, 8일에, 반백년 기념관 봉불 및 낙성식을 거행한 후, 원광대학 광장에서 반백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 |||
반백년 기념식에는 3부(部)의 요인, 종교계 대표, 언론인들과, 미국·중국·일본 등 해외 종교인들이 다수 참석하였고, 전국 2백여 교당과 기관에서 4만여 교도 대표가 모였으며, 박 광전 대회장의 대회사와 대산 종법사의 치사에 이어, 경과 보고와 시상, 정계·종교계·해외 종교계 각 대표의 축사가 있은 다음, 이 운권 교정원장의 제창으로 4개 항의 대회 결의문이 채택되고, 원불교 만세를 3창한 후, 폐회하였다. | |||
대회사에서는, 인류를 위한 인류의 새 종교인 새 회상이 강조되었고, 치사에서는, 삼학 공부로 대 중화력, 사중 보은으로 대 감화력, 사요 실천으로 대 평등력을 발휘하는 일이 교단 만대의 뿌리요 제생 의세의 활력소라고 설법되었으며, 4개 항의 결의문은, 앞으로 새회상이 ①일체 종교와 세계 인류를 하나로 보아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주인 될 것과 ②빈부의 격차, 종족의 차별 없는 평등으로 세계의 질서를 정립할 것과 ③유구한 민족의 전통적 슬기를 바탕하여 세계적 정신 운동을 이 땅에서 달성할 것과 ④국제적 종교 연합 기구를 통하여 모든 종교의 융통을 토의하고, 진리적 종교의 신앙,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종교를 생활화 할 것이 다짐되었다. | |||
기념식에 이어, 교립 남녀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장엄한 매스게임이 펼쳐지고, 오후에는 신축 기념관에서 기념 대사상 강연회가 열려 한·미·일 3개국 학자들(별록32)의 강연이 있은 후, 경축 예술제가 열렸다. 9일에는 체육 대회와 교리 강연 대회가 있었고, 10일에는 교역자 총회가 열려 교단의 새 방향에 관한 논의를 거듭, 9개항의 교역자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12일에는 이 공주 원력 사업인 대종사 대각 성비가 영산 성지에서 제막됨으로써 6일간의 개교 반백년 기념 대회는 그 막을 내리고, 이로 부터 새 회상은 대종사께서 예시하신 사 오백 년 결복 향한 거룩한 대전진을 계속하게 되었다. |
2025년 1월 23일 (목) 19:32 판
■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全文 →제1편 개벽(開闢)의 여명(黎明) →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 → 제3편 성업(聖業)의 결실(結實)
제1장 성업봉찬(聖業奉贊)사업
1. 대종사 성탑의 봉건과 봉찬사업 준비
원기 34년(1949·己丑) 4월 25일, 총부 구내 영모원(永慕園) 송림 안에 대종사 성탑을 봉건하고, 성탑에 성해 입탑식(聖骸入塔式)을 거행 함으로써 대종사 성업 봉찬 보본 사업이 그 막을 올렸다. 그 동안 각지 교도의 알뜰한 성금을 모아, 황등산 화강석으로 조성한 대종사 성탑은, 연화를 양각(陽刻)한 기단(基壇)위에 연화대석을 받치고, 원석(圓石)을 올려, 그 안에 성해(聖骸)를 봉안한 후 5층의 탑신과 개석(蓋石)을 쌓아, 그해 10월에 준공한 바, 이로써 대종사 열반 후 6년만에 성해가 성탑에 모셔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성탑을 중심한 영모원 일대가 길이 보본 숭모의 성역으로 화하였다. 다음 날 열린 중앙 교의회에서는 [대종사주 성업 봉찬회]가 조직되었고, 이듬 해(원기35·1950)의 중앙 교의회에서는 [창립 제 3회 1대 기념사업 준비 위원회](위원장 李共珠)가 구성 되었으나, 6·25동란으로 준비가 부진하여, 그 해 10월의 임시 중앙 교의회에서 기념 총회를 1년 연기하기로 하고, 성업 봉찬회와 기념 준비 위원회를 [3회 성업 봉찬회]로 종합 발족 하는 동시에, 위원장 이 공주 주관 아래 교단의 연혁 편찬과 대종사 성비 봉건을 준비하는 한 편, 제 1대 전체 교도의 사업 성적 총 결산 사무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 때 감찰원(원장 李雲捲)에서는 전체 교도의 법위 사정 사무를 아울러 시작하니, 이는, 원기 16년(1931·辛未) 3월에 대종사께서 제 2차 법위 사정을 실시하신 후 만 20년 만에 시행되는 제 3차 법위 사정 작업이었다. 한 편, 원기 33년(1948·戊子)에는 오 창건의 발기와 감역으로 봉래정사 석두암을 중수하여 제법 성지의 면목을 일신케 하였으나, 불행히 6·25동란 중 소실 되었으며, 성탑을 준공한 그 해(원기34년·1949)에는 [불교정전]의 부분 개쇄(部分改刷)를 행하여, 대종사의 본의에 유감 되었던 점을 1차로 없이 하였다.
2. 제 1대 성업 봉찬 대회
원기 38년(1953·癸巳) 4월 26일에 제 1대 성업봉찬 대회가 열렸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원정 기일(元定期日)을 1년 연기하였으나 새 회상이 창립 제 1대를 공적으로 마감하는 동시에, 제 2대를 맞게 되는 뜻 깊은 기념 일이었다. 이날 오전 10시, 새로 다듬은 원광대학 광장의 대회장에는 수 많은 축하 인사와 5천 여명의 남녀 교도가 운집한 가운데 수위단 중앙단원 유 허일의 대회사로 대회가 개회되고, 종법사의 치사와 봉찬회장 이 공주의 기념사에 이어, 제 1대 전체 교도의 공부 사업 원성적 내역 발표와 성적표 수여가 있은 후, 중앙 정계 인사들의 축사에 이어, 원불교 만세 삼창으로 폐회 되었다. 이 날 오후에는 김 영신·조 전권에 대한 첫 연화장 수여식이 있었으며, 다음날의 중앙 교의회에서는 정산 종법사를 연임 추대하고, 첫 총선거로 수위단이 개편되었으며, 교정원장에 김 대거, 감찰원장에 이 공주를 선임하여, 제 2대 교단의 첫 운영을 맡겼다. 또한 새 회상은 당년 부터 시창 연호를 원기로 기록하기로 하고, 새 대향 예법을 실행하며, 대종사 성비를 봉건함으로써, 동란 중 경제 공황 속에 재가 출가가 정성을 모은 제 1차 대종사 성업 봉찬 사업의 막을 내렸다. 제 1대 전체 교도의 공부 사업 원성적 내역은, 준 5등 이상 입등자 1,754명 중, 전무출신 입등자 258명, 거진출진 입등자 1,496명인 바, 전무출신은 준 특등 8명, 정 1등 17명, 준 1등 20명, 정 2등 6명, 준 2등 40명, 정 3등 28명, 준 3등 48명, 정 4등 31명, 준 4등 31명, 정 5등 10명, 준 5등 13명, 확정 보류자 6명이요, 거진 출진은 준 특등 1명, 정 1등 3명, 준 1등 6명, 정 2등 8명, 준 2등 16명, 정 3등 23명, 준 3등 78명, 정 4등 51명, 준 4등 179명, 정 5등 211명, 준 5등 881명, 특별 추증자 39명이었다. 전무출신 준 특등자는 이 공주·송 도성·김 광선·김 기천·이 동안·이 동진화·오 창건·이 재철이요, 거진출진 준 특등자는 황정신행 이었으며, 법위 정사(正師) 이상자는 원정사(圓正師) 송 도성, 정사(正師) 김 광선·김 기천·이 동안·오 창건·이 재철·박 세철·이 인의화(李仁義華)·서 동풍 이었다. 총 결산 후, 정산 종법사는 [공부의 등위와 사업의 등급에 공정을 기하고자 애를 썼으나, 어찌 그 숨은 공부와 숨은 공로가 다 드러나기를 바랄 수 있으리요. 그런즉 우리는, 참다운 사정(査定)은 호리도 틀림 없는 진리에 맡기고 이번에 나타난 등급으로는 앞 날의 적공에 더욱 분발할 대중만 삼는다면, 이 분들이 참으로 알뜰한 우리 동지요, 참으로 등급 높은 공인(功人)이니, 후일, 영모전에서 등위보다 실적이 넉넉한 선령은 제사 받기가 떳떳하지마는, 실적이 혹 등위만 못한 선령은 헛 대접 받기가 얼마나 부끄러우리요] 하시었다.
3. 제 1대의 교세
창립 제 1대의 총 교도수는, 의무 교도 32,244명, 일반 신도 290,196명, 합계 322,440명으로 되어 있으며, 전무출신은 260여명이고, 교당은 익산·이리·남선·수계·삼례·영산·신흥·대마·도양·광주·봉동·왕촌·서울·개성·춘천·마령·전주·좌포·관촌·중길·임실·장수·당리·경남·초량·용암·진영·다대·금산·용신·신태인·화해·정읍·승부·남원·운봉·호곡·금평·오수·군산 등 40개 교당에, 함열·덕룡·산서·목동·인월·창평·순창·목포·마산·부안 등 준지소(准支所)를 합하여 50개 교당으로 되어 있는 바, 여기에 열거되지는 아니하였으나, 원기 26년(1941·辛巳)에 장 적조가 만주 목단강에 교당 설립을 모색, 박 대완 교무를 파송까지 하였다가 일정의 탄압으로 철수한 일은 국외 포교 제2차의 사실 이었다. 또한, 기관은, 교육기관이 원광 대학, 원광 중고등학교, 도양의 원광 중학원 등 3개, 자선 기관이 서울 보화원, 익산 보화원, 신룡 양로원, 전주 양로원, 기타 등 7개, 산업기관이 삼창 공사, 보화당 약방, 유일 정미소, 삼창 과원, 이흥 과원, 영산 과원, 금산 과원 등 7개소였고, 출판 기관인 원광사를 합하여 모두 18개 기관이었다.
4. 새 [예전]의 편성과 보본 행사
정산 종법사는 일찍부터 일반 예의 교육의 긴급함과 발전 교단의 의례 보완이 절실히 필요함을 통감하여, 원기 36년(1951·辛卯) 9월에 새 [예전] 전 3편을 탈고하고, 이듬 해(원기37·1952) 7월에 이를 임시판으로 발간하시었다. 새 [예전]은, 제 1편 조신의 예, 제 2편 가정의 예, 제 3편 교회의 예로 되어 있는데, 종전의 [예전]에 비하여, 조신의 예 총 19장이 새로 편입되었고, 가정의 예에 회갑·천도재가 증보 되었으며, 교회의 예에 봉불·법회·득도·은법 결의·대사·봉고·특별기도·축하·영모전·영모원·대향·교의 등이 새로 편입되고, 그 밖의 예도 많이 개편되었다. 그 중, 조신의 예는 개인의 몸 가지는 통례로서 모든 사람이 예의 근본을 닦게 하는 요법이 되고, 영모전 대향 예법은 기념 일과 기념 묘우(廟宇)를 통일하여 대종사 이하 역대 열위 선령께 공동 향례를 받들도록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원기 38년(1953·癸巳) 6월 1일, 교단 일제히 하향(夏享)을 거행함으로써, 새 회상은 새 대향 예법을 실행하기 시작하였고, 그 날 오후 영모원에 봉건한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비를 제막하였다. 정산 종법사 지으신 비문은, 새 회상이 새 세상의 주세 회상임과 대종사께서 새 시대의 주세 성자이심을 처음으로 금석(金石)에 각하여 천하에 고한 것으로서, 그 끝절에 [대종사는 일찌기 광겁 종성(曠劫種聖)으로 궁촌 변지에 생장하시어, 학문의 수습(修習)이 없었으나 문리를 스스로 알으시고, 사장의 지도가 없었으나 대도를 자각하시었으며, 판탕(板蕩)한 시국을 당하였으나 사업을 주저하지 아니하시고, 완강한 중생을 대할지라도 제도의 만능이 구비하시었으며, 기상은 태산교악 같으시나 춘풍 화기의 자비가 겸전하시고, 처사(處事)는 뇌뢰 낙락(磊磊落落)하시나 세세 곡절의 진정을 통해 주시며, 옛 법을 개조하시나 대의(大義)는 더욱 세우시고 시대의 병을 바루시나 완고에는 그치지 않게 하시며, 만법을 하나에 총섭하시나 분별은 오히려 역력히 밝히시고, 하나를 만법에 시용(施用)하시나 본체는 항상 여여히 드러내사, 안으로는 무상묘의(無上妙義)의 원리에 근거하시고, 밖으로는 사사 물물의 지류(支流)까지 통하시어 일원 대도의 바른 법을 시방 삼세에 한 없이 열으시었으니, 이른 바 백억 화신의 여래시요 집군성이대성(集群聖而大成)이시라]고 새겨 있다. 한 편, 새 회상은, 원기 40년(1955·乙未) 7월에 원광지가 발기한 혈인 기념일 행사를 41년(1956·丙申)부터 거교적 행사로 시행하여, 후일 사대 경축의 하나인 법인절로 지정하였고, 그 해(원기 41·1956) 8월에는 영모전 묘위법을 일부 개정하여, 종사 위 위패를 대종사 위 정면 중단에 설위하고, 그 좌편에 대봉도 위, 그 우편에 대호법 위를 설위하기로 한 후, 42년(1957·丁酉) 4월 대회에서 주산 송 도성에게 종사 위, 팔산 김 광선과 구타원 이 공주에게 대봉도 위, 팔타원 황 정신행에게 대호법 위를 드리는 새 회상의 첫 법훈 증여식을 거행하였다. 정산 종법사는 치사에서 [나는 이 네 분 원훈(元勳)이 초창기 우리 회상에 공헌한 공부 사업 두 방면의 위대한 법훈(法勳)을 모든 대중과 더불어 높이 찬양하는 동시에, 재가 출가의 남녀 동지들이 여기에 마음을 다시 새로이 하여, 앞으로 우리 회상에 수 많은 종사와 수 많은 대봉도와 수 많은 대호법이 끊임 없이 배출되기를 믿고 바란다]고 하시었다.
5. 정관평 재방언과 성지 사업
정관평 첫 방언 공사 후 30여년이 경과함을 따라, 언(堰)은 대대적인 보수를 요하게 되었고, 이를 확장 재방언하게 될 경우 국가 부흥 계획의 일부 원조를 받을 것이 확실하게 되어, 원기 40년(1955·乙未) 8월에는 정산 종법사를 총재, 송 혜환을 위원장, 김 홍철을 실무 부위원장으로 하는 영광 정관평 재방언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고, 이듬 해 4월에 그 착공식을 거행하였다. 공사는, 각지 교당 봉공대의 봉공 작업과, 작업에 참가 못하는 교도들의 노임 대전(勞賃代錢)으로 기초 작업을 마친 후, 정부의 보조를 받아, 방조제 및 방수제, 2개소의 배수 갑문, 저수 호안 및 배수 암거 등 다양한 모든 공사를 44년도(1959·己亥)에 완공하여, 27,000여평의 새 농토와 그에 따른 완전 수리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새 언의 축조로 농토 안에 들어가게 된 구언(舊堰)은 보존 기념하기로 하였으며, 총공사비(3,000여만원) 중 7할은 정부 보조에 힘입었다. 한 편, 동란 중 황폐된 영산 성지의 복구 운동이 성지에서 요양 중이던 김 대거에 의하여 발기되어, 원기 43년(1958·戊戌)부터 대종사 성탄지와 대각 성지 일대가 매입 되었고, 재방언 공사가 끝난 44년(1959·己亥)부터 성지의 개척 사업이 더욱 활발해 져서, 성탄지와 구간 도실 일대의 토지 임야, 삼밭재 일대의 임야를 매입하는 동시에, 성지 순례 도로의 확대 보수 공사를 추진하였다. 45년(1960·庚子) 1월에는 교정위원회에서 [영산성지 개척공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우선 주요 지점의 녹화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반백년 기념 사업회가 발족되면서 성지 장엄을 그 사업 종목에 넣어, 대각 성지 주변 임야의 매입, 영산 대각전의 수축 등 성역의 확대 보수에 힘쓰게 되었다.
제2장 목표사업기관(目標事業機關)의 확립
1. 삼대 목표사업과 재단 기업의 시련
대종사,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사업 목표는 교화·교육·자선의 세 가지니, 앞으로 이를 늘 병진하여야 우리의 사업에 결함이 없으리라] 하시고, 이 3대 목표의 사업 기관을 고루 시설해 보시려고 노력하시었으나, 험난한 시국 관계로 그 뜻을 다 펴지 못하고 떠나시었다. 해방 후, [원불교 교헌]은 [본교는, 유치원·학교·수양원·요양원·병원·양로원·고아원 등을 수의(隨宜) 설치한다]고 하고, [유치원· 학교는 일반 교육기관으로, 수양원·요양원은 본교 유공인의 수양과 요양기관으로, 병원·양로원·고아원은 일반 자선기관으로 한다]고 규정하여, 교단은 이 3대목표 사업 기관의 균형 있는 확립을 지향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동안 교단의 유지와 사업을 뒷 받침해온 산업 기관은 주로 농원과 과원이었고, 교산 또한 정관평을 비롯, 대부분이 농토와 임야로 되어 있었다. 해방 후 법인으로 등록된 새 회상 재단의 농지 중 직접 경작하지 않던 논 20여만 평과 밭 8만 여평이 원기 35년(1950·庚寅)에 실시된 농지 개혁법에 의하여 전부 정부에 매상 되었다. 그에 따라, 교단은 해당 농지에 대한 문교재단 보상금(地價證券:正租 2,771石4斗整)을 상공업 병진 기업체로 전환 운영할 것을 결의하고, 삼례 과원에서 다량 생산되는 통조림 제조용 황도가 그 방면에 수급되지 못함을 전용(轉用) 하여, 과정 양조(果精釀造)를 주 종목으로 하는 대기업체 하나를 창설하기로 하고, 36년(1951·辛卯) 8월, 이리에 있는 귀속 재산을 사들여 재단 기업체 삼창 공사(三昌公社)를 창립하였다. 삼창이란 3대 사업을 창성케 하자는 뜻이었고, 재단의 지가 증권이 거의 다 투자되었으며, 삼례 과원을 직속 기관으로 까지 하였으나, 삼창 공사는 시국의 격동으로 인한 경제 불안, 편법에만 따른 부적당한 기업종목, 관리의 경험 부족 등으로 운영 3년 여에 기대했던 결과를 보지 못하고 끝나, 그 후 여러 해 동안 총부 경제가 큰 시련을 겪게 되었고, 42년(1957·丁酉) 11월에 총부 유지대책 위원회를 발족시켜, 이듬해 5월에야 총부 유지답(7,000여평)을 겨우 장만하게 되었다.
2. 교육 사업 진흥과 원광학원군
유일학림 개설 후 5년 동안 새 회상은 간고한 가운데서도 학림 중등부를 중학교로, 학림 전문부를 대학교로 승격 육성코자 꾸준히 활동하여, 원기 36년(1951·辛卯) 6월, 이리에 원광 중학교의 설립 인가를, 그 해 9월, 총부 동편에 원광 대학의 설립 인가를 얻어, 학장 박 장식을 초대 중학교장으로, 학감 박 광전(朴光田)을 초대 대학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새 회상의 교육 사업은, 초기의 영산 학원·총부 학원 및 총부를 비롯한 각처의 야학원 사업과, 해방 후의 국문 강습소 및 학림 교육을 거쳐, 이제 회상의 개교 정신과 국가의 교육 이념을 조화한 본격적 교육사업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원광학원 군(圓光學園群)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원광 대학은 당초 교학과(敎學科) 단과의 초급 대학으로 총부 구내에서 출발, 원기 37년(1952·壬辰) 7월에 제 1대 성업 봉찬 사업의 일환으로 교지(校地) 확보와 교사(校舍)의 첫 건축에 착수하여, 38년(1953·癸巳) 1월에 교학(敎學)·국문학(國文學) 2과의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3월에 제1 본관을 준공하고, 39년(1954·甲午)에 도서관을 신축하여 총부 도서실 장서(藏書) 전부를 이양 받은 후, 해마다 학과 증설과 교사 증축을 거듭하다가, 52년(1967·丁未)에 대학원을 설립하고, 56년(1971·辛亥) 12월에 종합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원광 대학교는 대학 교육으로 국가 사회에 공헌함은 물론, 원불교학과로 새 회상 교역자를 많이 양성 하였으며, 부설 원불교학 연구회와 종교 문제 연구소는 새 회상의 교학 수립 및 타종교와의 비교 연구에, 해외 포교 연구소는 새 회상의 해외 포교 준비에 상당히 공헌하였다. 원광 중학교는 원기 37년(1952·壬辰) 10월에 교지를 확보하고, 39년(1954·甲午) 2월에 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 해 4월에 제 1 본관, 40년(1955·乙未) 5월에 제2 본관을 준공하고, 그 해 9월과 41년(1956·丙申) 9월에 증축 공사, 42년(1957·丁酉) 4월에 여자 중학생 분리 운영, 50년(1965·乙巳) 6월에 제 3 본관 신축 착수, 51년(1966·丙午) 4월에 2대 교장 정 광훈(丁光薰)이 임명되었다. 원광 여자 중고등학교는 원기 41년(1956·丙申) 4월에 원광대학 부속 여자 고등학원(원장 朴將植)으로 발족, 익산 보화원 강당에서 수업하다가 42년(1957·丁酉) 4월에 원광 중학교 일부를 빌려 여자 중학생을 흡수, 45년(1960·庚子) 2월에 여자 중학교와 여자 상업 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초대 교장에 정 성숙(丁盛熟)이 임명되었고, 법은 재단을 비롯, 각 교당의 후원으로 47년(1962·壬寅) 7월에 교지·교사를 확보하여 독립하였다. 원광 남녀 중고등학교 또한 일반 교육으로 국가 사회에 공헌은 물론, 적지 않은 전무출신 지원자를 배출하여 교단 인재 양성에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원기 37년(1952·壬辰)에 도양지부 부설로 발족한 원광 중학원은 그 후 도양 고등 공민학교·해룡 농업 기술학교로 발전, 마침내 반백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해룡 중학교의 기초가 되어, 성지 근화(聖地近化)에 이바지가 되었고, 원기 20년대(年代) 이래 꾸준히 계속해 온 총부 야학원을 계승하여 익산 보화원 원내 교육기관으로 40년(1955·乙未)에 발족한 원광 고등 공민학교도 총부 근화와 인재 배출에 상당히 공헌하였다.
3. 삼대 선원(三大禪院) 개설과 장학 사업
원기 40년(1955·乙未) 1월, 교무 연합회에서 중앙 직할 3대 선원 설립이 공고되었다. 이는, 원기 38년(1953·癸巳) 6월에 설립된 이리 고등선원을 동산선원으로, 그 동안의 총부 선원을 중앙 선원으로, 영산 학원을 영산 선원으로 각각 발전시키되, 이 3대 선원을 중앙 직할 선원으로 하여 장차 새 회상 교역자 양성의 본거를 삼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산 선원은 고등선원 교감 이 운권을 초대 원장으로 발령, 그 해 3월에 제 1회 수료생을 내고, 그 후 조 전권·안 이정(安理正)이 원장의 대(代)를 이어, 매년 수선(修禪)을 계속, 원광 대학 교학과와 함께 새 회상 교역자 배출의 쌍벽을 이루었다. 중앙 선원은 동산 선원장(李雲捲)을 초대 원장으로 겸임 발령하여 종전 제도로 지내오다가, 42년(1957·丁酉)에 이 완철을 전임(專任) 원장으로 발령하여, 그 해 11월 6일 첫 결제식을 가졌다. 그러나, 어려워진 교단 경제 아래 자체의 유지 토대가 확립되지 못하여, 휴원·재개원을 거듭하다가, 한 동안 동산 선원과 병합 운영도 하고, 54년(1969·己酉)부터는 총부 구내 상주선원(常住禪院)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그 후 중앙 훈련원으로 발전하였다. 영산 선원은 전재 복구와 재방언 등 관계로 쉽게 발족을 보지 못하다가 47년(1962·壬寅)에 우선 영산지부에서 학원 제도 형식을 복구하였고, 49년(1964·甲辰) 3월에 초대 원장 안 이정을 임명, 중등·고등 2부 편제의 초등 선원으로 개원하여 정관평 작농도 겸한 선농 일치 교육을 실시, 54년(1969·己酉)에 2대 원장 오 종태가 단일 편제로 상급 선원 진학의 길을 계속 열어 주어, 교역자 육성에 기여하였다. 한 편, 원기 42년(1957·丁酉) 4월에 원불교 장학회가 발족하였다. 회상 초기부터 꾸준히 염원되어 온 교단 인재 양성의 꿈은, 원기 12년(1927·丁卯)에 육영부 창립단 활동이 시작되고, 19년(1934·甲戌)의 새 회규는 십부 중 육영부를 두어 기금 육성을 전담케 하였으나, 시국 관계로 소기의 재단이 이루어 지지않자, 27년(1942·壬午), 부서에서 제외되었다가, 그 후 학교와 선원들의 교역자 양성 작업이 차차 진전되자, 이에 이르러 장학회를 발족하고, 이어, 교헌 개정(원기44·1959)으로 육영부(부장·徐大仁)를 부활시켜 육영 장학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게 하였다. 정산 종법사는 장학회 치사에서 [초(楚)나라는 오직 어진 이를 보배 삼았다 하거니와, 우리는 오직 철저한 신심과 알뜰한 공심 가진 혈성 동지들을 기르고 또 길러서 우리의 무궁한 사업에 실다운 보배를 삼고 자산을 삼자] 하시었다. 또한, 43년(1958·戊戌)에 목포 김 현관(金玄觀)은 육영 사업을 발원, 연차 계획으로 수계 농원에 상당 규모의 인삼 재배를 실시하여, 46년(1961·辛丑) 5월에 은산 육영재단을 설립하였고, 그 해 10월에 원불교 육영재단 정관을 제정, 11월 부터 거교적인 장학회원 모집 운동을 일으키어, 상당한 재단이 형성되자, 47년(1962·壬寅) 5월에 육영재단 이사회(이사장·文東賢)를 구성하여 교단 만년 대계인 육영 장학을 계속 뒷받침하게 하였다.
4. 자선 사업 개척과 요양 사업
대종사 재세시부터 그토록 염원하시던 새 회상의 자선 사업은, 해방 직후에 전재 동포 구호로 그 막을 열었고, 그 해(1945·乙酉) 11월, 서울 보화원을 한남동에 설립함으로써 첫 결실을 보았으며, 36년(1951·辛卯) 1월, 1·4후퇴 때 총부로 피난 온 서울 보화원 원아 일부를 수용한 익산 보화원(초대원장·宋慧煥)이 발족되고, 38년(1953·癸巳) 5월에 이리시로 부터 인수한 이리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부터 새 회상의 무의탁자 보호 사업은 그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한 편, 양로 사업도 34년(1949·己丑) 4월 부터 총부 일부에 그 설립을 모색해 오다가 37년(1952·壬辰) 3월에 당국의 인가를 얻어, 총부에 신룡 양로원(초대원장·宋慧煥)을 설립하여, 41년(1956·丙申) 7월, 원사(院舍) 신축과 함께 중앙 수양원으로 개칭하고 이사하였으며, 때를 같이 하여 설립된 전주 양로원과 48년(1963·癸卯) 4월에 설립된 동래 수양원도 무의탁 노인들의 보호 사업과 회상 유공 노인들의 수양에 상당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또한, 전무출신 요양기관 겸 자선병원을 설립하기 위하여 원기 35년(1950·庚寅) 3월에는 보화당 자금으로 금산 과원을 인수, 금산 요양원(초대원장·李東震華)을 설립하여 38년(1953·癸巳)에 총부로 이전, 39년(1954·甲午) 4월에 중앙 요양원(원장·宋慧煥)으로 발전하였으며, 40년(1955·乙未) 5월, 북일면 진료소를 겸한 원사(院舍)를 신축하고, 42년(1957·丁酉) 10월에는 동화병원 설립 인가와 함께 정부의 보조를 받아 44년(1959·乙亥) 10월 총 건평 220평의 2층 병원을 완공 하였으나, 그 후 인사난과 운영난으로 이전·휴원·재개원을 거듭하다가, 법은 재단(法恩財團)과 제휴하여 설립 목적 달성에 부심하게 되었다.
제3장 일원세계(一圓世界)의 터전
1. 사종 의무 여행(勵行)과 교헌 개정
원기 40년(1955·乙未) 4월26일, 개교 40년 축하식에서 교도 4종 의무 강조 기간의 설정이 선포되었다. 4종 의무란 조석 심고·보은미·연원 지도·법규 준수 등 네 가지로서, 이를 거교적으로 강조 실행하여 교세의 내실과 확장을 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39년(1954·甲午)에는 연원 지도 강조 연간을 실시하고, 정례 포교 방송을 시작하였으며, 그동안 교당 별로 자치 운영해 오던 학생회 조직을 교무부에서 주도하는 동시에, 40년(1955·乙未) 1월에는 새 [예전] 반포 후 처음으로 합동 성년식을 거행하는 등 교화 활동에 박차를 가해 온 교정원(원장·金大擧)이, 이에 이르러 종합적 교화 발전책으로 4종 의무 강조 기간을 선포한 것이다. 이 운동은 각 교당의 열렬한 호응을 얻어, 42년(1957·丁酉) 4월 대회에서는 교화상(敎化賞)에 11개교당, 연원상 개인 특상에 24명, 교화단 상에 11개 단이 포상되었으며, 44년(1959·己亥)부터는 교화 계획안의 수립, 보은 사상 강조 연간의 설정, 특별 강송(講誦) 정진의 달 설정 등으로 교화의 내실을 더욱 다졌다. 한 편, 그 해(원기 44·1959) 4월25일, 중앙 교의회에서 교헌 개정안이 통과 되었다. 그 동안 총 2편 24장 225조이던 교헌이 총 11장 81조로 대폭 축양 되었으며, 따로 제정된 교정원 조직법과 감찰원 조직법도 이 때 아울러 채택되었다. 개정 교헌은 40년(1955·乙未) 6월에 박 장식 등 5인(별록24)의 교헌 연구위원이 교헌의 거강적 재기초(擧綱的再起草)와 중앙 직제의 개편, 교정 위원회의 신설, 기타 사항 등에 관하여 숙의를 거듭한 끝에 성안한 것으로, 첫 교헌 제 2편 교제(敎制)는 그 강령만 조문화 하고, 세목은 다 교규로 미룬 것이 두드러진 특색으로 되어 있다. 교헌 개정 다음 날, 정산 종법사는 3차 연임 취임식 설법에서 [교세의 발전이 늘 새로워, 국가와 사회에서 우리의 존재를 점차로 두루 인식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장차 세계 포교의 모든 터전이 차차 성숙되어 가고 있다]고 말씀하고, [우리는 대세계 주의자가 되자]고 강조하시었다. 개정 교헌은 5년 후(원기 49·1964) 다시 개정되니, 총 11장 86조가 10장 90조로 되고, [정전을 본경(本經)으로]가 [교전을 본경으로]로 되었으며, 협의 기관 형태이던 교정 위원회가 실질적으로 중앙교의회에 앞서는 교정 의결 기관이 된 반면에, 종법사 권한 규정 3개 조에 [수위단회의 의결을 거쳐]가 삽입되었으며, 종법사 자문위원, 법무실, 수위단회 사무처, 중앙 교의회 사무처 등이 신설되고, 법훈(法勳) 제도와 원성적 제도 등이 조문화 되었다.
2. 도운융창 대기도와 해외 포교 모색
원기 40년(1955·乙未) 1월27일 부터 정산 종법사의 유시로 세계 평화 및 도운 융창 정례 대기도회가 교단 일제히 시작되었다. 새 회상은, 구인 기도 당시 부터 세계 인류의 행복과 도운의 융창을 기도해 왔으며, 그 동안 계속하여 매월 1일의 정례 기도로 세계 평화를 기원해 왔던 바, 이 때 세계 불교도 대회에서 앞으로 모든 불교도가 매월 만월일(滿月日)을 기하여 세계 평화 대기도회를 가지기로 한다는 소식에 접하고 [우리도 이에 더욱 기운을 합하며 일원(一圓)으로써 상응케 하기 위하여] 이달 부터 매월 만월일에 세계 모든 불교도들과 함께 대기도회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례 대기도회는 41년(1956·丙申) 5월 14일까지 17개월 동안 실시 되었는데, 이는 새 회상이 해외 포교의 모색을 앞 두고 먼저 그 기운을 합하는 큰 행사였으며, 이에 참가한 교도 수는 연(延) 10만 여명에 달하였다. 원기 40년(1955·乙未) 1월에 새 회상은 원광 대학장 박광전을 구미(歐美)에 보내어 종교·문화·교육 등 각 분야를 시찰하는 동시에, 해외 포교의 기연을 모색토록 하였고, 그 해의 교무 연합회에서는 교수(敎樹)로 보리수, 교화(敎花)로 연화를 지정하였으며, 원광 대학은 교학 연구회를 발족시켰다. 43년(1958·戊戌) 10월에는 아시아 재단 특별 고문이며 미국의 불교학자인 [리챠-드 A·가-드] 박사가 총부에 내방하여 [한국 불교의 전망]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고, 그 해 11월 태국에서 열린 세계 불교도 대회에 박 광전을 교단 대표로 파견하였으며, 45년(1960·庚子) 11월에는 해외 포교 연구회(회장·朴光田)를 발족, 정화사(正化社)의 교서 번역 업무를 위임하였고, 이를 원광 대학 부설 해외 포교 연구소(소장·全八根)로 개편, 47년(1962·壬寅)부터 영문 포교지 [원부디즘]을 발간하게 하였다.
3. [대종경]편수와 [정전]재편
원기 41년(1956·丙申) 5월, 수위단회 의결로 대종경 편수 위원회가 정산 종법사를 총재, 수위단 남녀 중앙단원(金大擧 李共珠)을 지도위원, 수위단원 전원(별록25)을 자문위원으로 하고, 전문 편수위원(李空田)을 임명하여 발족 되었다. 대종경 편수의 논의는 대종사 열반 직후 부터 발론되었고, 그 과업이 제 1대 성업 봉찬회에 위임도 되었으나 진전을 보지 못한 바, 이에 이르러, 대종사 재세 당시에 이미 수필(受筆) 공표된 법설들과 대종사 열반 후 송 도성 등(별록26) 친시 제자(親侍弟子)들에 의하여 편편이 기록된 법설들이 공식적으로 수집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대종경 편수 위원회는 발족 후 1년 반 동안 자료의 대체 수집을 마친 다음, 42년(1957·丁酉) 10월부터 편수 장소를 남원 산동(山東) 교당에 정하고 그간 수집한 모든 자료의 축약 분품(縮約分品) 작업을 반년 동안에 대강 매듭지었다. 이에, 당시 장수(長水) 교당에서 요양 중이시던 정산 종법사는 수위단회의 협찬을 얻어, 원기 43년(1958·戊戌) 5월에 교전 교서 편수 발간 기관으로 정화사를 발족시켰다. 진전하는 교세에 부응하여 대종경 뿐 아니라 각종 교서의 편찬을 조속 추진하며, 그 번역과 출판의 소임을 담당할 정화사는, 대종경 편수 위원회의 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위에, 편찬·번역·연구·경제의 각 위원을 두어 각 항 업무를 분담하였고, 사무장에 이 공전이 임명되어 우선 대종경의 편수를 계속, 그 해 7월 부터 초안의 자문과 재편수 및 감수 작업을 진행 하였다. 한 편, 원기 45년(1960·庚子) 1월, 수위단회에서 [정전의 자귀 수정과 그 재간의 추진]이 의결됨으로써 정화사는 대종경의 편수와 정전의 재편을 아울러 진행하게 되었다. 대종사 열반 전년에 서둘러 성편(成編)되고, 일정 압제의 고비에 어렵게 발간된 [불교정전]은, 대종사께서 설법하신 바(대종경 부촉품 3장)와 같이 때가 급하여 그 만전(萬全)을 다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기 34년(1949·己丑)에 일부 개쇄(一部改刷)로 수정된 부분 외에, 대종사의 본의가 한 지역이나 한 교파에 국한된 듯 해석될 부분들을 대종사의 본의대로 바로 잡고, 명칭도 [정전]으로 환원하며, 편차도 대종경과 연관하여 다시 가다듬되, 그 일은 종법사 친재 아래 정화사를 통하여 행하시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편수 작업을 진행하는 도중, 정산 종법사의 환후가 점차 침중해 지시어, 46년(1961·辛丑) 12월 25일에는 최후의 특별 유시로 김 대거·이 공주·이 완철·박 광전·이 운권·박 장식에게 교전 교서의 감수가 위촉되고, 담당 위원에게 편수의 조속 추진이 촉구되었다.
4. 삼동 윤리 선포와 법은 재단 설립
원기 46년(1961·辛丑) 4월26일에는 개교 46년 축하식과 정산 종법사 회갑 경축식을 총 지부 각 교당에서 일제히 겸행하였다. 이날 오전, 총부에서는 [일체 허례는 이를 생략하고 간소한 의식에만 그치라] 하신 사전 부촉을 받들어 간소한 식만을 거행하였으며, 정산 종법사는 기념 법문으로 [우리가 장차 하나의 세계를 이룩할 기본 강령이 되는 삼동 윤리의 대지를 설명하여, 동지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본래 서원을 다시 새로이 하고자 한다] 하시고, 삼동 윤리를 공식으로 선포하시었다. 정산 종법사 말씀하시기를 [삼동 윤리의 첫째 강령은 동원 도리(同源道理)니, 곧 모든 종교와 교회가 그 근본은 다 같은 한 근원의 도리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 화합하자는 것이요, 그 둘째 강령은 동기 연계(同氣連契)니, 곧 모든 인종과 생령이 근본은 다 같은 한 기운으로 연계(連契)된 동포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 화합하자는 것이요, 그 세째 강령은 동척 사업(同拓事業)이니, 곧 모든 사업과 주장이 다 같이 세상을 개척하는 데에 힘이 되는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 화합하자는 것]이라고 하시었다. 이 해(원기 46·1961) 5월, 정산 종법사의 원력 사업으로 전무출신 요양 재단인 법은 재단이 설립되고, 그 운영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정산 종법사는 회갑식에 앞서 당부하시기를 [나는 지금 병중에 여러 동지들의 알뜰한 정성을 받고 있으나, 각처에서 혈심 노력하다가 병약한 전무출신 동지들에게는 아직 이에 대한 교중(敎中)의 재원(財源)이 서 있지 못하여, 때로 내 마음이 아프고, 불안하니, 기어히 정의(情誼)를 표하고자 하는 동지들은 전무출신 요양 대책의 재단 하나를 세우는 일로 나의 회갑을 기념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시었다. 재가 출가의 동지들은 이 뜻을 받들어 회갑 당일 총지부 각 교당에서 축하 성금을 모아 재단을 이룩하고, 정관을 제정하여 운영 위원회를 발족시킨 것이다. 그 후, 법은 재단은 52년(1967·丁未) 7월에 후원회인 법은회(회장 邊衆船)가 발족되어 54년(1969·己酉)까지 기금 증자 운동을 전개, 재단의 많은 확장을 보게 되었으며, 이 재단의 운용으로 수 많은 전무출신 요양자가 계속 법은을 입게 되었다.
제4장 결실성업(結實聖業)의 전진(前進)
1. 정산 종법사 열반과 대산(大山)종법사 추대
원기 47년(1962·壬寅) 1월 24일, 정산 종법사께서 열반하시었다. 대종사의 뒤를 이어 3차 연임을 거듭하신 19년 동안, 일정 압제의 고비와, 건국 초기의 혼란과, 교단 경제의 간난 가운데, 교단 체제를 완비하고, 성업 봉찬 사업을 주도하시며, 목표 사업 기관들을 확립하고, 일원 세계 건설의 터전을 다지신 정산 종법사는, 만년에는 요양을 겸행하면서, 정력을 기울여 이 해 1월까지 교전 편수를 친감하시다가, 22일, 대중에게 삼동윤리를 거듭 설하시고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는 송(頌)을 남기신 후, 24일 열반에 드시니, 세수는 63세요 법랍은 45년이었다. 이에, 교정원장(李完喆)이 종법사의 권한을 대행하여 긴급 수위단회와 간부 연석 회의를 열고, 그 법위를 정식 대각여래위로 추존하는 동시에 장의 위원회(위원장·朴光田)를 구성하여, 28일 오전, 원광 대학 광장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이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성해(聖骸)를 총부에 모시고, 총지부 일제히 봉도식과 초종 재식을 엄수하였다. 장례를 마치고, 1월31일 수위단회에서는 당시 수위단의 남자 중앙 단원인 대산 김 대거 법사를 후계 종법사로 선거하고, 2월23일 중앙 교의회의 절차를 거쳐, 새 종법사 추대식을 총부 대각전에서 거행하였다. 대산 종법사는, 원기 전 2년(1914·甲寅) 음 3월16일에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全羅北道鎭安郡聖壽面佐浦里)에서 연산 김인오(連山金仁悟)와 봉타원 안 경신(奉陀圓安敬信)의 5남매중 장남으로 나시었다. 어려서 부터 기상이 늠름하고 성격이 대범하여 대인(大人)의 풍이 보였으며, 11세 때 조모를 따라 만덕산에서 대종사께 귀의하고, 16세에 출가하여, 3년간 총부에서 학원 생활 중 대종사와 은부자의 의(義)를 맺었으며, 그 후 7년간 서무·상조·공익·육영·교무 각 부의 서기를 차례로 역임하면서 5년간 대종사의 시봉을 겸행하였다. 원기 22년(1937·丁丑)부터 서무부장·교무부장·감사부장·총부 교감 겸 예감 등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며, 원기 28년(1943·癸未), 수위단원에 보선되고, 31년(1946·丙戌)에는 총부 서울 출장소장에 피임, 해방 직후 다난한 교단 발전에 3년간 공헌하였다. 그 후로는 원평·총부·진영·다대 등지에서 요양하면서 대종경 자료를 정리하다가 37년(1952·壬辰)에는 수위단 중앙에 피선, 대산(大山) 법호를 받고, 교정원장에 피임되었으며, 44년(1959·己亥)에는 중앙 선원장에 피임되었으나 영산에서 요양하면서 정관평 재방언과 성지 사업의 기초를 세웠다. 46년(1961·辛丑)부터 하섬·신도 등지에서 교재를 연마 중, 정산 종법사 특별 유시로 정화사 감수위원에 위촉되었고, 정산 종법사의 열반에 따라 후계 종법사로 추대 되시었다. 한 편, 이 때 중앙 총부 각 부면의 인사 개편으로, 수위단 남자 중앙 단원에 박 광전이 선정되고, 교정원장에 박 장식, 감찰원장에 이 완철, 중앙 교의회 의장에 문 동현이 각각 선임되었다.
2. [교전] 발간과 교서 결집
원기 47년(1962·壬寅) 2월, 수위단회에서는 정화사의 제안을 채택하여, 그 동안 [불교정전] 권일(卷一)이던 [정전]과 새로 편수한 [대종경]을 합간하여 [원불교 교전]으로 발행할 것을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재편수된 교전 초안은 감수 감정의 절차와 수위단회의 봉찬을 거쳐 인쇄에 회부, 이 해(원기47·1962) 9월 26일 드디어 발간 되었다. 이로써 새 회상은 만대의 본경을 완정하였으며, 10월 7일, 총부 대각전에서는 교전 간행 봉고 및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대산 종법사는 설법에서 [우리 교전은 앞으로 천여래 만보살을 배출하여, 무변 중생이 다 함께 제도를 받으며, 일체 생령의 혜복 문로를 열어 줄 전만고 후만고에 희유한 대법보]라고 말씀하고, [우리 동지들은 시방 삼계 육도 사생과 함께 이 교전의 발간을 환희 경축하는 동시에, 이 공부 이 사업에 더욱 힘써서 이 법은이 무량 세계 무량 중생에게 고루 미치도록 전하자]고 하였으며, 때 마침 개최 중이던 교무선은 6일간의 교전 일독회로써 선 과정을 해제하였다. 한 편 정화사는, 국내 각계와 해외 각계에 신간 교전을 널리 증정하여 새 회상의 원음을 시방에 전파하였고, 그 후 [거룩한 50년대 결집으로 결실하자]는 표어 아래, 정산 종사께서 내정해 두신 편수 방침을 토대로 새 회상의 교서들을 차례로 결집 발간하였다. 원기 50년(1965·乙巳) 12월에는 연원 고경으로 [불조요경]을 발간하였다. 이는 일찌기 대종사께서 [불교정전] 권2·권3에 편입하신 바 있는 금강경 등 오경(五經)과 수심결 등 삼론(三論)을 개역(改譯) 발간한 것이다. 53년(1968·戊申) 3월에는 그 동안 수정 보완을 거듭해 온 새 [예전]과 총 126곡을 담은 [성가]를 동시에 발간하고, 성가 발간 기념 발표회를 총부 대각전에서 성대히 열었다. 57년(1972·壬子) 1월, 제1부 세전·제2부 법어로 된 [정산 종사 법어]를 발간한 정화사는, 새 회상 개교 반백년의 결실 과정을 거울할 이 [원불교 교사]와, 새 회상 백년대를 대중할 [원불교 교헌]을 편정 발간하고 그 과업을 마칠 것이다.
3. 교화 삼대목표 추진과 법위 향상운동
원기 48년(1963·癸卯)부터, 개교 반백년 기념 대회를 앞 두고, 새 회상은 사 오십 년 결실을 알차게 실현하기 위하여, 교화 3대 목표를 설정, 이를 거교적으로 추진하였다. 교화 3대 목표는, 연원 달기·교화단 불리기·연원교당 만들기인 바, 연원 달기란, 9인 이상의 연원을 가지라는 것이 대종사 교화의 일대 정신이시니, 우선 한 사람이 한 사람 이상의 연원을 달자는 것이요, 교화단 불리기란, 이단치교의 법을 더욱 진흥시켜, 모든 교도가 4종 의무를 잘 이행케 하며, 우선 한 단에서 새로 한 단 이상을 불리자는 것이요, 연원 교당 만들기란, 각 교당에서 연원 교당을 이룩하여, 나라나 세계에 일원 대도가 편만하도록, 우선 한 교당에서 한 교당 이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 3대 목표를 연차 계획으로 실시하고 통계 시상한 바, 첫 연도부터 매년 성과가 올라, 56년(1971·辛亥)까지 86,014명의 교도, 1,687개의 교화단, 108개소의 교당이 불어, 반백년 결실대회를 앞 두고 교세 확장에 한 전기를 지었다. 한 편, 원기 49년(1964·甲辰) 10월에 수위단회는, 삼산 김 기천에게 종사 위, 도산 이 동안·사산 오 창건·일산 이 재철·공산 송 혜환·육타원 이 동진화 등에게 대봉도 위를 드리기로 하고, 이듬 해 10월에는 응산 이 완철에게 대봉도 위를 드리니, 이는 새 회상의 제 2차 법훈 증여였다. 또한, 대산 종법사는 반백년 결실의 참다운 내실을 위하여 전 교도의 법위 향상 운동을 제창, 수위단회의 협찬을 얻어, 50년(1965·乙巳) 11월부터 5개월 동안, 전 교도의 법위 예비 사정을 실시한 바, 준 정사(准正師) 이상은 보류하고, 교정(敎正) 124명, 준 교정(准敎正) 470명, 교선(敎選) 1,638명, 준 교선(准敎選) 2,824명, 도합 5,056명으로 나타났다. 그 후, 법위 향상의 준비 행사로, 특별 기도·가정 봉불·교리 연마·교리 실천·본인 사정·교구 사정 등을 거쳐, 55년(1960·庚戌) 3월, 수위단회에서 법위 사정 실시 요강을 채택하고, 각 지구별 담당 위원을 선정하여 면밀 사정한 후, 3월 20일 수위단회 심사와 종법사 감정으로 개교 반백년도 전 교도의 법위를 확정하니, 정사(正師)부터 이상은 보류하고, 준 정사 22명, 교정 503명, 준 교정 826명, 교선 3,167명, 준 교선 5,326명으로, 60만 교도 중 준 교선 이상 준 정사까지의 법위자 총 수가 9,844명이었다. 이에 뒤이어 55년(1970·庚戌) 9월에는, 교도의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연마와 신앙 수행의 촉진으로 교단적 공부 풍토를 더욱 조성하기 위하여 교도의 교리 연마 실력 평가를 실시하였고, 교역자의 교화단 조직을 시도하였다.
4. 고시 제도 실시와 기관 단체 정비
원기 46년(1961·辛丑)에 포교사 자격 고시 규정이 제정되고, 49년(1964·甲辰) 4월에 교역자 고시 규정으로 개정된 교역자 고시 제도가 49년도 부터 실시 되었다. 첫 고시 위원회(위원장·朴將植)는 여러 차례 회합을 거듭한 끝에 50년(1965·乙巳) 2월 4일 부터 3일간 시행한 첫 고시로 24명의 합격자를 내었다. 고시는, 수양·연구·취사의 3과(科)로 하되, 수양과는 염불 좌선 등에 대한 성의의 평가로, 연구과는 정전 대종경 불조요경 예전 교헌 교사 등에 대한 이해와 강연 정기 일기 등의 실력 점수로, 취사과는 주의 조행 등에 대한 평가로 채점하여, 3과의 종합 점수로 합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 후 매년 시행된 고시에 의하여, 반백년 기념 총회 년도(원기56·1971)까지 도합 218명이 새 교역자의 자격을 공인 받았다. 원기 40년(1955·乙未) 4월에 전무출신 친목 단체로 수덕회가 창립된 후, 44년(1959·己亥)에는 전무출신 권장인들의 친목 수양 단체로 정토회가 발족되었으며, 45년(1960·庚子)에는 학생회 연합회가 창립되고, 47년(1962·壬寅)에는 교우회 연합회가 결성되었으며, 48년(1963·癸卯)에는 중앙 청년회가 결성되고, 자선기관 연합회가 발족하였으며, 교학과생 하계 봉사 활동이 시작되고, 12월에는 어린이회 교재 시안(敎務部案)이 작성되었으며, 49년(1964·甲辰)부터는 유년회가 강습회를 시작하였고, 55년(1970·庚戌)에는 영광 지구에서 성지개발 협의회가 발족하였다. 또한, 49년(1964·甲辰) 3월28일자로 종교 재단 원불교에서 학원 재단 원광학원이 분립되었고, 54년(1969·己酉) 5월에는 교화 재단의 발족이 시도되었으며, 55년(1970·庚戌) 3월에는 영산 출장소(소장·李中和)가 영산 선원과 영산 지부에서 분리 운영되기 시작하였고, 56년(1971·辛亥) 1월에는 원불교 신용조합(이사장·宋圓徹)이 설립되었다. 한 편, 41년(1956·丙申) 5월에는 신생활 운동안을 현상 모집하여 새 생활 운동의 전개를 시도하였고, 그 해 7월에는 교역자들의 생활 개선 방안을 위한 연구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47년(1962·壬寅) 12월에는 이흥 과원을 매각하여 총부 유지답을 확장하였고, 48년(1963·癸卯) 2월에는 황등 율원(黃登栗園)을 매각하여 원광사 시설을 확장하였다. 또한 50년(1965·乙巳) 4월에는 익산 보화원이 이리 보육원(원장·趙甲種)에 통합되고 51년(1966·丙午) 11월 부터는 자선의 달(주관事業部)이 실시되었으며, 52년(1967·丁未) 7월에는 서울 보화원이 수도원의 방침에 따라 홍제원 분원에 흡수되는 등 40년대와 50년대 초반에는 각 기관 단체의 설립 정비 폐합 등이 성행하였다.
5. 종협 참여와 해외 포교 진출
원기 50년(1965·乙巳) 4월에 총부 서울 사무소(소장·李雲捲)를 다시 열었다. 이는 50년대에 접어 든 새 회상이 국내에서 그 결실을 더욱 촉진하기 위한 한 조치였다. 드디어 그 해 6월,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주최한 한국 6대 종교인의 대화에 황 정신행 등 3인(별록27)이 교단 대표로 참석하여, 불교·유교·천주교·기독교·천도교 등 국내에 공존하는 대표적 종교 지도자들과 2일간의 대화를 가짐으로써 그 해 12월에 한국 종교인 협회가 창립되었고, 새 회상이 그 6개 창립 종교 중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그 때에 서울 사무소는 월간지 [종교계](주간李恩錫)를 창간하고, 사무소 안에 종협 사무소를 두게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종협 활동의 중심이 되는 듯 하였으며, 자금난 등 사정으로 통권 7호에 휴간은 되었으나, [종교계]지에 제기된 새 회상 논의 등은 새 회상의 위치를 천명하는 데 한 계기를 지었다. 51년(1966·丙午) 2월에는 새 회상의 교무를 군종으로 파견할 대정부 교섭을 시작하였으며, 그 해 10월 15일에는 종협 제 3차 연구 모임인 원불교 이해의 모임을 총부에서 개최, 이웃 종교인들에게 새 회상을 많이 인식시켰고, 그 후 계속 종협 활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55년(1970·庚戌) 2월에는 교정원장(朴將植)이, 56년(1971·辛亥) 12월에는 중앙 교의회 의장(文東賢)이 각각 그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한 편, 교단의 종협 활동에 발맞추어 51년(1966·丙午) 5월 부터 원광 대학 교학 연구회에서는 대학생 종교제를 발기하여 여러 해 동안 정례 행사화 하였으며, 52년(1967·丁未) 11월에는 청년회 대표가 7대 종교 청년 대표자 간담회에 참석하여 종협 강화책을 제의하였고, 55년(1970·庚戌) 10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세계 불교 지도자 대회에, 56년(1971·辛亥) 7월에는 부산에서 열린 한일 불교 친선 [세미나]에 박 장식 등 다수 대표가 참석하여 국제적 종협 활동에도 합력하기 시작하였다. 또 한, 원기 40년대 초기부터 모색하기 시작한 해외 포교는, 48년(1963·癸卯) 11월에 박 광전 등 3인(별록28)이 1개월간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재포교의 기연을 모색하였고, 당년도 중 영문지 [원부디즘]과 해외 불교지들의 새 회상 관계 기사를 보고 미국인 2명이 처음으로 입교하였으며, 50년(1965·乙巳)에는 [원불교 요람] 중역(中譯)·독역(獨譯)·일역판(日譯版)을 각각 임시판으로 간행하는 동시에, 중국 신문에 새 회상이 처음 소개되었다. 51년(1966·丙午) 3월에는 일본 순교감(徐世仁)을 발령, 2개월 간 일본 재포교를 다시 모색하였고, 11월 태국에서 열린 세계 불교도 대회에 황 정신행을 파견하였으며, 12월에 이 공주가 홍콩·태국·일본 등지를 순방하였고, 52년(1967·丁未) 8월에는 미국 유학생(全八根·鄭惟誠)에게 처음으로 미국 교무를 발령하였다. 이 해에 또한 중역 [정전]이 임시판으로 발간되었고, 53년(1968·戊申) 9월에는 이 운권이 1개월간 중국 불교계를 시찰하였으며, 12월에는 뉴욕의 미국인 교도 가정에 처음으로 법신불이 봉안되고, 종교학자 강 위조(姜渭祚박사)는 미국 종교학회에서 [한국의 원불교와 한국 사회]란 제목의 연구 발표로 미국 학계에 새 회상을 소개하였다. 54년(1969·己酉) 4월에는 말레이지아에서 열린 세계 불교도 대회에 김 정용을 파견하고, 영문판 [요람]을 간행하였으며, 7월에는 중국 유학생(金大鉉)에게 처음으로 중국 교무를 발령하였다. 55년(1970·庚戌) 7월에는 박 장식이 10일 동안 일본 종교계를 시찰하였고, 10월, 일본에서 열린 제 1차 세계 종교자 평화회의에 박 광전 등 4인(별록29)이 파견되어 처음으로 세계 종협 활동에 참가, 저명 종교인들을 반백년 대회에 직접 초청하였으며, 56년(1971·辛亥) 5월, 일본의 세계 연방 촉진 종교인 평화 회의에도 박 광전 등 4인(별록30)이 참석하고, 10월에는 반백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영역 교전](全八根역)을 발간하는 등 5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 회상은 해외 포교 진출에 더욱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제5장 개교 반백년(開敎半百年)의 결실(結實)
1. 새 회상의 확인과 반백년 준비
새 회상은 처음부터 하나의 새 종교로 창건되었고, 불법을 주로 연원하되, 모든 종교의 교지(敎旨)도 이를 통합 활용하여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를 이룩하자는 것이 대종사의 본회(本懷)시었다. 이는 원기 33년(1948·戊子)에 원불교라는 교명을 공포하고, 교헌에 대종사를 교조로 규정함으로써 더욱 분명해 졌으며, 교전의 교법 총설과, 새 예전의 대향 예법과, 대종사 성비에 그 뜻이 더욱 천명되었다. 그러나, 국가 사회의 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던 중, 원기 46년(1961·辛丑) 5·16 혁명 후 포고령에 의하여 교단의 제반 등록을 새로이 한 바, 이듬 해 8월에 불교계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불교 재산 관리법을 공포 시행하면서 새 회상에도 그 법을 적용, 등록을 촉구하였다. 이에 4인(별록31)의 위원이 관계 당국에 건의서를 제출하고 각방으로 직접 절충하여, 새 회상의 입장을 강력히 천명한 바, 47년(1962·壬寅) 11월 22일자로 [원불교는 창립 경위와 현재 상황 및 본질상 불교 재산 관리법의 적용을 받을 성질의 단체가 아니라]는 종교 심의 위원회 의결에 따른 정부의 회보를 받았고, 53년(1968·戊申) 11월에는 정부 간행 문서에 새 회상의 입장이 거듭 확인 공표되었다. 원기 48년(1963·癸卯) 10월, 수위단회는 개교 55주년 경축 기념 행사를 56년(1971·辛亥)에 거행하기로 하고, 이어 열린 교정 위원회에서는 연구위원 20명을 선정하여 사업 추진의 요강 작성을 위임하였다. 49년(1964·甲辰) 4월, 중앙 교의회에서 개교 반백년 기념 사업회(회장·朴光田사무장·丁光薰)가 발족되고, 사업 종목은 기념관·영모전·정산종사 성탑 등의 건립, 영모원 및 총부의 기지 확장 정리, 영산 성지의 확장 및 장엄, 영역 교전·기념 문총의 발간, 대회 행사 등으로 책정하였다. 51년(1966·丙午) 4월에는 사업회 임원이 일부 개편(사무장·金正勇)이 되고, 54년(1969·己酉)부터 총부 및 영모원의 기지 확장 정리와 종법실 신축이 진행 되었으며, 55년(1970·庚戌)에는 반백년 기념관·영모전·정산종사 성탑이 차례로 착공되고, [반백년 기념 문총]의 편집과 [교전] 영역도 착수 되었다. 55년(1970·庚戌) 4월, 교정 위원회에서는 반백년 기념 사업으로 서울 기념관 건설도 추가하기로 하여, 그 해 10월, 남한강에 거대한 회관을 기공하였으나, 그 후 이로 인하여 거교적인 수습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는 시련을 겪게 되었고, 56년(1971·辛亥) 3월에는 교정위원회와 수위단회의 합의로 기념대회를 10월에 개최하기로 확정하였다.
2. 수양기관 설립과 재단 기업 계열화
원기 48년(1963·癸卯) 4월, 수위단회에서는 정남 정녀 휴양 기관으로 수도원의 설립이 의결 되었다. 일찌기 대종사께서 계획하시고 정산 종사 당시부터 그 설립을 모색, 자체에서 기금을 길러 온 수도원이, 이에 이르러 공식으로 발족되고, 초대 원장에 이 공주가 선임 되었다. 수도원은, 그 후 서울 한남동 대지를 인수, 그 완전 불하에 공헌하였으며, 한동안 양주 농장 등을 경영하였고, 55년(1970·庚戌) 1월에는 종로 5가에 건물을 매입하여 한의원 발족을 모색하였다. 한 편, 원기 39년(1954·甲午)에 부안 교당(교무·丁良珍) 발의로 수도원에서 매입한 변산 하섬은 봉래산 제법 성지의 기슭에서 새 회상의 해상 수양원 겸 편수 도량이 되었으며, 46년(1961·辛丑)에 정산 종사의 발기로 대지(9백여평)를 매입, 남선 교당을 옮겨 둠으로써 시작된 충남 신도 수양 기관은 대산 종법사의 직접 후원 아래 7년 동안 기지 확장과 건물 매입을 계속해 오다가, 52년(1967·丁未) 10월, 수위단회에서 삼동 수양원(초대원장·李炳恩) 설립이 의결됨으로써 유서 깊은 지역에 특수한 수양원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또한 회상 초기부터 특별 연지(緣地)이던 진안 만덕산은 52년(1967·丁未)부터 복구 개발에 착수, 앞으로 선농 일치의 수양 기관을 모색 중이고, 기타 각처의 교단 양로원들이 다 수양원의 기능을 겸행하여 노후 유공인들의 수양에 공헌하고 있다. 한 편, 새 회상이 반백년을 지내오는 동안, 교단의 여러 산업 기관들이 기복과 성쇠를 거듭하는 가운데, 보화당은 이 동안·송 혜환·조 희석이 차례로 대표 이사의 대를 이으며, 각 부면의 경제에 많은 공헌을 하는 중, 49년(1964·甲辰) 4월에는 이리 삼중당 제약사를 흡수하여, 그 해 9월에 보화 경옥고를 주종목으로 하는 보화당 제약사(사장·趙暿錫)를 창설함으로써 보화당은 상공업 병진 기업체가 되었고, 55년(1970·庚戌) 7월에는 기업의 중앙 진출과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하여 종로 5가에 서울 보화당(회장·李共珠사장·李喆行)을 개설하고, 이어서 57년(1972·壬子) 7월에는 이리 역전 보화당(사장·李喆行)을 개설함으로써 재단 기업체 보화당은 차차 계열 기업화하기 시작하였다.
3. 청년 운동과 출판 언론 진흥
원기 48년(1963·癸卯)에 중앙 청년회가 결성되고, 49년(1964·甲辰) 7월에 초대 회장(權世英)을 선정한 원불교 청년회는 각 대학별 교우회의 조직, 사회 봉사를 통한 개교 이념의 구현, 청년 회관의 건립, 교당별 청년회의 조직 확대 등을 결의하고, 50년(1965·乙巳) 7월에는 교패(敎牌) 달기·청소 실시·교서 보내기 등 세 가지 운동을 벌였다. 51년(1966·丙午) 9월에는 2대 회장(金正勇)이 월간 [원불교 청년회보]를 발간하여 교단의 선교에도 도움을 주었고, 52년(1967·丁未) 4월 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원불교 사상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55년(1970·庚戌) 7월에는 총부에서 청년 대회를 개최, 반백년 사업에 청년회의 공헌을 다짐하였고, 56년(1971·辛亥) 7월에는 총부에서 전국 청년 지도자 대회, 하섬에서 전국 청년 수련 대회를 개최, 청년들의 반백년 결실을 더욱 다졌다. 한 편, 원기 42년(1957·丁酉) 2월에 자체 인쇄 시설을 갖춘 원광사는, 격월간 또는 계간으로 [원광] 발간을 계속하면서, 총부와 각 교립 학교 간행물들을 발행하였고, 47년(1962·壬寅) 7월에는 원불교 기념 사진첩 편집 위원회가 서편(序編)·대종사 추모의 편 등 전 4편으로 된 [원불교 기념 사진첩]을 간행하였으며, 49년(1964·甲辰) 5월에는 총무부(부장·金勤修)가 월간 [원불교 교보]를 창간하여, 54년(1969·己酉) 3월 까지 60호를 발행하였다. 53년(1968·戊申)에는 정화사가 [원불교 교고 총간] 사업을 시작, 회상 초기의 정기 간행물(月末通信·月報·會報)들과 초기 교서 기본 사료 각 항 자료들을 전 6권에 수록, 연차 간행하였고, 54년(1969·己酉) 3월에는 원불교 신보사(사장·金正勇 편집·趙政勤)를 설립, 반월간 [원불교 신보]를 창간함에 이르러, 교단의 언론이 많이 창달되고 문화 공보에 큰 소임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 해 7월에는 원불교 출판사를 원광사에 병설, 정화사가 이양한 판형으로 [원불교 교전]과 축쇄판 [교전·성가]를 계속 간행하였으며, 56년도(1971·辛亥)에는 개교 반백년 기념 사업회가 [반백년 기념 문총]을 발간하였고, 원광대학 부설 종교문제 연구소(소장·柳基現)는 [한국 종교 대계]를 발간하고, [원불교 사전(圓佛敎事典)]을 편찬하는 등 40년대 후반기 부터 새 회상의 언론 출판 부문은 상당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4. 반백년의 교세
반백년 기념 대회를 앞 두고 56년(1971·辛亥) 3월에 결산된 원기 55년도의 교세 개요를 보면, 재가 교도 수는 신도를 합하여 6십 여만명, 출가 교도 수는 예비 교역자를 합하여 1천 여명으로 되어 있고, 교산은 종교 재단(宗敎財團圓佛敎)과 학원 재단(學園財團圓光學園)으로 분할되어 있으나, 이사진의 단일화로 관리는 귀일되어 있었다. 기관은 중앙 총부 각 부처와, 서울 사무소·영산 출장소 등 중앙 직할 기관이 24개소, 중앙 훈련원·동산선원·영산선원·원광 대학교·원광 중 고등학교·원광 여자 중 고등학교·원광 고등공민학교·해룡 농업 기술학교·해룡 중학교·원광 유치원 등 훈련 및 교육 기관이 12개소, 원광사·정화사·원불교 신보사·원불교 출판사 등 출판 문화 기관이 4개소, 수도원·삼동 수양원·하섬 수양원·동래 수양원·중앙 수양원·전주 양로원 등 수양 및 양로 기관이 6개소, 동화병원·중앙 요양원·이리 보육원 등 요양 및 자선 기관이 3개소, 보화당·보화당 제약사·서울 보화당·총부 농원·수계 농원·만덕산 농원·유일 정미소(재무부직할) 등 산업 기관이 7개소로 되어 있고, 청년회·학생회·유년회·수덕회·정토회 등 단체가 총지부를 망라하여 도합 50여개로 되어 있다. 교당은, 전라북도에 이리·동이리·남중동·전주·교동·동전주·서전주·군산·익산·함라·금마·팔봉·수계·삼례·동산·봉상·마령·좌포·진안·백운·안천·무주·장수·산서·관촌·임실·오수·금평·지사·남원·수지·운봉·산동·아영·보절·북아영·인월·순창·화해·신태인·승부·정읍·용각·감곡·소성·태인·칠보·고부·덕천·고창·흥덕·해리·부안·원평·용신·화포·김제·금구·만경·임산 등 60개소, 전라 남도에 광주·서광주·남광주·계림·목포·여수·순천·영산·신흥·왕촌·대마·도양·불갑·영광·군남·백수·법성·장성·해보·창평·곡성·겸면·구례·보성·영암·불목·완도·압해도 등 28개소, 서울 특별시에 서울·종로·원남·돈암·송천·신촌·사직·정릉·답십리·화곡·불광동·필동·청파·제기동 등 14개소, 경기도에 의정부·인천·수원·강화·부천·안양 등 6개소, 강원도에 춘천·남춘천·화천 등 3개소, 충청 남도에 대전·금산·제원·추부·유성·신도·도곡·강경 등 8개소, 충청 북도에 청주·괴산 등 2개소, 부산 직할시에 당리·경남·초량·다대·부산진·서면·동래·대신·구포·영도·남부민·해운대·청학·거제동 등 14개소, 경상 북도에 대구·서성로·봉덕·삼덕·경주·김천·포항·안동·성주 등 9개소, 경상 남도에 마산·신마산·진주·통영·진해·울산·삼천포·용암·진영·김해·함양·지곡·밀양·창원·합천·기장·고성·의령·양산 등 19개소, 제주도에 제주·서귀포 등 2개소, 출장 교화 장소로, 전북에 덕진·고산·중평·장계·사매·복흥·창동·무장·마포·봉황 등 10개소, 전남에 담양·나주, 충남에 장항, 경북에 경산 등이 있었고, 당년도 신설이 충남의 천안, 전남의 산동(求禮山東), 서울의 이문동, 전북의 함열 등이고, 전남의 장산도, 강원의 강릉이 개척 중에 있었다.
5. 기념관·영모전·정산 종사 성탑 봉건
원기 56년(1971·辛亥) 10월, 반백년 기념 대회를 앞두고 반백년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불단 제도를 새롭게 하여, 정면 벽상에 대형 일원상만을 봉안한 대법당과, 1층·3층에 몇 개의 부속실을 둔 기념관은 교단의 중요 행사에 쓰이게 되며, 각 부속실은 얼맛동안 각부의 사무실로 쓰이게 되었다. 아울러, 이 때에 영모전이 준공되니, 영모전 법이 교헌에 규정된 후, 실로 22년만의 성사(盛事)였다. 영모전은, 영모원 송림 아래 정초(定礎)하여 봉건한 바, 묘위는 새 [예전]에 의하여 본좌 상단 중앙에 대종사 소태산 여래 위, 중단 중앙에 종사 위, 그 좌우에 대봉도 위와 대호법 위, 대봉도 위 좌편에 전무출신 각등 위와 보통 출가 교도 위, 대호법 위 우편에 거진출진 각등 위와 보통 재가 교도 위를 모셨고, 좌편 별좌 상단에 희사 각 위와 그 하단에 일반 부모 선조 위, 우편 별좌 상단에 선성 각위와 그 하단에 일체 생령 위를 각각 모셔, 대종사와 열위 선령을 중심으로 시방 삼세 만성 만생이 다 함께 배향 되었으며, 이 때 본좌에 입묘된 입등 선령은 총 7백여 위였다. 또한, 영모전 옆에 정산 종사 성탑이 봉건 되었다. 탑은 화강석 기단(基壇) 위에 3개의 사각 석물을 쌓아, 장방형 탑신을 이루고, 그 안에 성해를 봉안한 후, 앞 뒤로 탑호와 탑명을 새겼으며, 탑신 위에 연화대석과 원석을 올려 조성한 바, 정산 종사 열반 후 9년 동안 송대(松臺)에 임시 봉안하였던 성해가 이에 이르러 성탑에 모셔 지게 되었다. 대산 종법사 지은 정산 종사 탑명에는 [정산 종사는 한 없는 세상을 통하여 대종사를 받들고 제생 의세의 대업을 운전하실 제, 신의는 고금을 일관하시고 경륜은 우주를 관통하시며, 시국의 만난(萬難) 중에서도 대도를 이어 받아 드러내시고, 흉흉한 세도 인심 속에서도 대자 대비로 모든 생령을 두루 안아 길러 주시며, 새 질서를 갈망하는 세계를 향하여 일원 세계 건설의 큰 길을 높이 외쳐 주셨으니, 후래 제자로서 묵묵히 우러러 뵈올 때에 대종사는 하늘이요 태양이시라면 정산 종사는 땅이요 명월이시며, 대종사는 우리의 정신을 낳아 주신 영부(靈父)시라면 정산 종사는 그 정신을 길러 주신 법모(法母)시라]고 결론되어 있다.
6. 개교 반백년 기념 대회
원기 56년(1971·辛亥) 10월 7일부터 6일 동안 새 회상은 대종사께서 예시하신 사 오십년 결실의 뜻을 되새겨 다지는 개교 반백년 기념 대회를 열었다. 대산 종법사의 제창으로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일원세계!]라는 주제 아래 열린 이 기념 대회는, 7일에, 대종사 유품 전시회, 영모전 낙성 및 묘위 봉안 봉고제, 정산 종사 성탑 제막식, 대회 전야제를 거행하고, 8일에, 반백년 기념관 봉불 및 낙성식을 거행한 후, 원광대학 광장에서 반백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반백년 기념식에는 3부(部)의 요인, 종교계 대표, 언론인들과, 미국·중국·일본 등 해외 종교인들이 다수 참석하였고, 전국 2백여 교당과 기관에서 4만여 교도 대표가 모였으며, 박 광전 대회장의 대회사와 대산 종법사의 치사에 이어, 경과 보고와 시상, 정계·종교계·해외 종교계 각 대표의 축사가 있은 다음, 이 운권 교정원장의 제창으로 4개 항의 대회 결의문이 채택되고, 원불교 만세를 3창한 후, 폐회하였다. 대회사에서는, 인류를 위한 인류의 새 종교인 새 회상이 강조되었고, 치사에서는, 삼학 공부로 대 중화력, 사중 보은으로 대 감화력, 사요 실천으로 대 평등력을 발휘하는 일이 교단 만대의 뿌리요 제생 의세의 활력소라고 설법되었으며, 4개 항의 결의문은, 앞으로 새회상이 ①일체 종교와 세계 인류를 하나로 보아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주인 될 것과 ②빈부의 격차, 종족의 차별 없는 평등으로 세계의 질서를 정립할 것과 ③유구한 민족의 전통적 슬기를 바탕하여 세계적 정신 운동을 이 땅에서 달성할 것과 ④국제적 종교 연합 기구를 통하여 모든 종교의 융통을 토의하고, 진리적 종교의 신앙,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종교를 생활화 할 것이 다짐되었다. 기념식에 이어, 교립 남녀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장엄한 매스게임이 펼쳐지고, 오후에는 신축 기념관에서 기념 대사상 강연회가 열려 한·미·일 3개국 학자들(별록32)의 강연이 있은 후, 경축 예술제가 열렸다. 9일에는 체육 대회와 교리 강연 대회가 있었고, 10일에는 교역자 총회가 열려 교단의 새 방향에 관한 논의를 거듭, 9개항의 교역자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12일에는 이 공주 원력 사업인 대종사 대각 성비가 영산 성지에서 제막됨으로써 6일간의 개교 반백년 기념 대회는 그 막을 내리고, 이로 부터 새 회상은 대종사께서 예시하신 사 오백 년 결복 향한 거룩한 대전진을 계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