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
일원상 (一圓相)
원불교용어사전
⑴ 원불교의 입장에서 본 우주의 궁극적 진리에 대한 상징적 표현. 부처님·하나님·진리·도(道)·태극 등과 같은 뜻으로 해석한다. 말로써는 일원상 또는 일원이요, 형상으로써는 「○」으로 표현한다. 말로만 표현할 때는 일원이라고 하지만, 말과 형상으로 다 표현하기 위해서 일원상 또는 법신불 일원상이라고 한다. 소태산 대종사가 1916년 4월 28일 이른 새벽에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인 진리를 크게 깨치고,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一) 두렷한(圓) 기틀(相)을 지었도다」라 했다. 원불교에서는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인 진리라 하여,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다. ⑵ 선가(禪家)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일원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일원상을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중국 당나라 때의 남양 혜충(南陽 慧忠‥?~775) 국사라고 전해온다.
원불교대사전
개요
일원상(◯)은 원불교에서 본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진리의 상징으로서, 이를 ‘일원상의 진리’ 또는 ‘법신불 일원상’이라 하여, 최고의 종지(宗旨)로 삼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모신다. 일원상은 교조 소태산대종사의 대각(大覺)에 의해 밝혀진 ‘일원상 진리’의 상징이다. 이는 《대종경》 서품 1장에 소태산 자신이 20여년간의 구도 끝에 도달한 대각의 심경으로서,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선포한 대각 제일성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가운데 ‘한(一) 두렷한(圓) 기틀(相)’이란 바로 일원상을 지칭한 것이다. 이는 대각이라는 심오한 종교체험의 달관적 입장에 비쳐진 만상의 본래 면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때 일(一)은 근원ㆍ전체ㆍ유일ㆍ절대를, 그리고 원(圓)은 원만ㆍ구족ㆍ완전ㆍ충만 등의 의미를 뜻하며, 상(相)은 이러한 일원의 궁극처를 상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 상징은 인류의 정신문화사에 있어 우주와 인생에 관한 궁극적 진리의 표현 또는 상징으로서 동서고금의 종교ㆍ철학ㆍ예술ㆍ과학 등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원불교의 일원상 상징은 그 가운데 소태산이 깨달은 일원상 진리를 바탕으로 하여, 과거의 전통적 종교상징들의 근본적 의미를 그 자체 안에 회통 조화시키고 있음이 특징이다. 곧 그것은 종래의 초월적 절대자에게 향한 향외적(向外的)인 신앙중심의 종교상징은 물론 내재적 진리로서의 참된 자아(自我眞我)의 완성을 위한 향내적(向內的)인 수행중심의 종교상징의 기능들을 조화적으로 회통시켜 미래의 인류 사회를 향도할 새로운 차원의 종교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법신불 일원상
원불교 ‘교리도(敎理圖)’에는 최고 종지로서의 일원상(◯)을 상단에 그려놓고, 그 아래 “일원은 법신불이니,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心印)이요, 일체중생의 본성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일원상 진리 그 자체와 그것이 우주만유와 우리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지니고 있는 존재론적 내지 종교적 의의를 살펴본다.
①법신불 일원상:먼저 ‘일원은 법신불’이라는 근본명제에서 볼 때, 원불교의 일원상 진리는 소태산 스스로의 대각에 의하여 천명된 독자적 진리관일 뿐 아니라, 그것은 그 깨달음에 바탕하여 동양의 전통적 진리관, 특히 불교적 진리관의 정수를 조화적으로 회통시켜 계승 발전한 것이다. 물론 원불교교리 전반에 비춰볼 때 거기에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ㆍ도교, 그리고 한국의 고유신앙 등 기타 모든 종교의 진리관이 조화적으로 회통되어 있는 통종교적 경향을 지니고 있으나, 무엇보다 불교적 진리관에 주된 사상적 연원을 두고 있다.
이는 ‘대각’이라는 소태산의 종교체험 그 자체가 이미 불교적 성향을 지닌 것일 뿐 아니라, 대각 제일성으로서 강조된 ‘불생불멸의 도’와 ‘인과보응의 이치’ 등의 개념 또한 불교사상적 토양위에서 전개된 것이라는 점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더욱이 소태산은 스스로 ‘불교는 무상대도(無上大道)’ 또는 ‘불법(佛法)은 천하의 큰 도’(《대종경》 서품3) 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불교 또는 불법이란 단순히 전통 불교의 교리적 전승 내지 그의 종파적 전개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불의 근본적 진리관 또는 불교사상사를 통하여 다양하게 전개된 제(諸) 진리관이 소태산의 대각의 차원에서 종합 지향된 불교 또는 불법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법신불(Dharma-kya)이란 법ㆍ보ㆍ화 등 삼신불 중의 하나인 협의의 법신불을 의미한 것이라기보다는, 초기불교뿐 아니라 대승불교 전반의 교리발달사를 통하여 심화 발전되어온 제(諸) 불타관 내지 진리관의 총체적 의미를 조화적으로 종합 지향한 광의의 법신불을 의미한다. 그것은 개별 현상이나 인격적 화신불(Nirma-kya)을 넘어서서 만법의 근원으로서의 진리(dharma) 그 자체를 부처로 본 것이다.
원불교의 법신불은 우주의 궁극적 진리 그 자체를 부처로 본 것으로서, 진리의 체성 뿐 아니라 진리의 작용까지를 동시에 포함한 궁극적 통일자를 지칭한 것이다. 또 그것은 우주만유의 본원과 우리들 마음의 본성을 둘로 나누어 볼 수 없는 진여실상을 지칭한 것이다. 또한 일체의 인격성을 넘어선 것임과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인격으로도 현시될 수 있는 함축적 의미마저 지닌다.
이와 같은 법신불 일원상에 대해 소태산은 과거 불교의 불상(佛像)숭배와 대비시켜, “불상은 부처님의 형체를 나타낸 것이요,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心體)를 나타낸 것이므로, 형체라 하는 것은 한 인형에 불과한 것이요, 심체라 하는 것은 광대무량하여 능히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했나니”(《대종경》 교의품3)라고 설명하면서, 진리적 종교신앙의 방향으로서 ‘불상숭배’를 넘어선 ‘법신불 일원상의 신앙’을 주창했다.
②우주만유의 본원으로서의 일원상:한편 이와 같은 법신불 일원상이야말로 바로 ‘우주만유의 본원’이라는 명제에 비춰볼 때, 일원상은 우주만유의 전체상과 그 근원성 및 유일절대성 등의 의의를 상징한다. 곧 일원상은 만유가 한 체성에 바탕해 있는 무한한 존재세계의 전체상을 상징하며, 동시에 그것은 만법의 근원으로서의 절대 유일의 본원세계를 상징한다. 만유 또는 만법이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시ㆍ공을 통해 전개되는 유정ㆍ무정의 모든 존재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성변화 작용, 그리고 시간과 공간 그 자체까지도 포함하여 부른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일체의 가치관이나 진리관 등의 의미적 존재까지도 폭 넓게 수용한 개념이다.
소태산은 이러한 일원의 진리를 “광대무량하여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했나니, 곧 천지 만물의 본원”(《대종경》 교의품3)이라고 하는가 하면, 때로는 “유무초월의 생사문”(《정전》 일원상서원문)이라 밝히고 있다. 곧 만유의 근본 체성이며 만법의 근원으로서의 일원은 유와 무의 분별 이전의 세계이며, 동시에 유와 무를 총섭하되 그 자체는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본원(本源)세계로서, 그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소멸되는 근원적 존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대소ㆍ유무ㆍ생사ㆍ선악ㆍ변불변 등 일체의 차별현상을 총섭함과 동시에 그러한 일체 상대적 차별현상을 초월한, 이른바 포월자(包越者)이다. 우주만유의 본원으로서의 ‘법신불 일원’이야말로 일체의 차별과 상대를 그 안에 총섭함과 동시에 그것들을 넘어선 유일절대의 포월자이다. 그것은 언어표상과 의식분별마저 넘어선 절대의 경지이다.
③인간 자아의 본성으로서의 일원상:법신불 일원상은 ‘우주만유의 본원’일 뿐 아니라 ‘일체중생의 본성’이라는 명제에 비춰 볼 때, 그것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존재의 본성 그 자체이다. 이는 진리의 내재성과 그에 따른 인간 스스로의 주체성과 자각성을 강조한 것이다. 곧 우주만유의 본원으로서의 일원은 동시에 인간 자아의 본성 그 자체로서, 그것은 일원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佛菩薩)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凡夫衆生)에 관계없이 그들의 본성에 일원의 진리가 내재해 있다.
인간의 본성은 바로 법신불 일원의 내재적 진리로서, 이를 원불교에서는 자성불(自性佛)ㆍ심불(心佛)ㆍ불성(佛性)ㆍ성품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이렇게 볼 때 본성에 있어서는 부처와 범부의 차별이 없을 뿐 아니라, 누구나 수행을 통해 일원의 진리에 계합될 수 있는 불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정산종사는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이며 자기의 성품이 곧 법”(《정산종사법어》 원리편3)이라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이야말로 일원의 진리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 절대존재이다.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일원상 진리의 자기실현의 장이다. 그렇다고 하여 인간만이 유일한 가치가 있다거나, 마음을 떠난 객관적 세계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뜻은 아니다. 우리들 스스로의 본성은 일원의 진리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이며, 그것은 지고(至高) 지선(至善)의 존재로서 지금, 여기,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영원 무한의 법신불 일원이 약동 자재하고 있다.
④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으로서의 일원상: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일체중생의 본성으로서의 법신불 일원상은 동시에 ‘제불제성의 심인(心印)’이다. 심인이란 원래 선가(禪家)에서 주로 쓰는 용어로서, 심(心)은 불심(佛心), 인(印)은 인가(印可) 또는 인증(印證)을 뜻하며, 부처님이 마음으로 깨달아 증득한 경지, 곧 언어나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궁극의 경지 그 자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불제성의 심인이라는 명제는 진리의 각증성(覺證性)과 회통성 및 귀일성 등의 의의를 강조한 것이다.
곧 근원적 진리로서의 법신불 일원은 일상적 언어로 개념화하거나 표현할 수 없으며(言語道斷), 상대적인 사유작용으로는 인식될 수 없는(心行處滅) 자리로서, 오직 부처나 성자들의 심오한 종교체험으로서의 직관적 깨달음(覺證)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그 내면세계에 체인(體認)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자들이 깨달음이나 계시의 차원을 통해 밝힌 궁극적 실재에 대한 제 종교의 진리관들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별개의 진리가 아니라 결국 하나의 진리로 만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진리관은 하나의 근원적 진리에서 비롯된 다양한 전개에 불과하며, 동시에 그들 모든 종교의 지향점 또한 그 궁극적 진리를 실현하고 그 근원적 진리에 돌아가기 위한 서로 다른 수단방편이 된다. 만일 어느 종교가 그 지향점을 이와 같은 하나의 근원적 진리에 두지 않고, 오히려 그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자기 종교의 도그마 내지 상징에만 국집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우상숭배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소태산은 이러한 근원적 진리의 세계를 모든 종교의 원천이며 구경처라 보고, 하나의 근원적 진리에 바탕한 모든 종교와 교파들은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데 국집하는 종파주의를 넘어서서, 근본적으로 서로 융통하고 협조해야 할 것을 주창한다.
일원상 진리의 논리적 구조
일원상진리 그 자체는 인간의 상대적 인식작용의 한계를 넘어선 초논리적, 초경험적 차원에 속한 것이나, 그에 대한 인간 차원에서의 가능한 한 최대의 이해작업의 시도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법신불 일원의 진리에 대한 이해 내지 인식작업의 일환으로서 변불변, 유상(有常)ㆍ무상(無常), 진공ㆍ묘유, 공(空)ㆍ원(圓)ㆍ정(正), 이(理)ㆍ사(事), 대소유무, 동(動)ㆍ정(靜), 도ㆍ덕 등 다양한 논리구조에 의한 접근법이 제기될 수 있다.
이 가운데 진공ㆍ묘유의 양면관과 공ㆍ원ㆍ정의 삼속성관은 무엇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기본적 진리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교를 비롯한 동양종교사상의 전통적 논리를 계승한 보편적 진리관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법신불 일원에 대한 여타의 다양한 진리관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①진공(眞空)의 체성(體性):《정전》 교의편에 나타난 ‘일원상의 진리’의 법문에 대해서는 이해하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방법이 제기될 수 있다. 대체로 본체론적 입장에서 본 ‘진공의 체성’과, 현상론적 입장에서 본 ‘묘유의 조화작용’이라는 양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법신불 일원의 진리를 본체론적 입장에서 본 ‘진공의 체성’에 대해 본문에서는,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라 설명하고 있다. 곧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과 관념을 넘어선 진공체가 그의 근본체성으로서, 이 경지는 여여(如如)불변하여 생사변화와 선악 길흉 등 일체의 차별이 끊어진(頓空) 자리이다.
그 자리는 유와 무를 비롯하여 생사, 거래, 일이(一異), 단상(斷常) 등 일체의 상대적 차별현상을 초월한 진공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절대의 경지는 상대적 언어로 개념화하거나 표현될 수 없으며 일상적 사유로는 미칠 수 없는 경지로서, 오직 일체의 언어와 사유가 끊어진 입정(入定)의 체험, 곧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직관적 깨달음을 통해서만이 파악된다. 그것은 차별적 분별지(分別智), 즉 능소(能所)와 주객 대립의 틀에 의한 분별지를 넘어서서 능소미분(能所未分), 주객합일의 전일자(全一者)적 무분별지의 체험에 의해서만 파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원의 체성에 대해 정산은 “일원상의 원리는 모든 상대가 끊어져서 말로써 가히 이르지 못하며, 사량으로써 가히 계교하지 못하며, 명상으로써 가히 행동하지 못하리라. 이는 곧 일원상의 진공체요”(《정산종사법어》 원리편2)라고 주석하고 있다.
②묘유(妙有)의 작용:법신불 일원의 진리를 현상론적 입장에서 본 묘유의 작용에 대해 본문에서는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법신불 일원’의 체성은 일체의 상대적 차별을 넘어선 무상(無相)의 진공체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은 물리적 진공이나 무기(無記)의 공과 같은 것이 아니라, 공적영지의 광명을 포함한 신묘한 공(空)이다. 다시 말하면 공적한 가운데 영지(靈知)가 내재해 있어 묘유의 조화작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차별현상은 바로 이 법신불 일원의 묘유작용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러한 묘유의 조화작용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무한하고 영원하여 우주만유를 통해 무시광겁토록 은현자재한다.
한편 이러한 묘유조화에 대해 ‘일원상서원문’에서는 ‘유상(有常, 곧 不變)으로 보면 여여자연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했고, 무상(無常, 곧 變)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노병사와 사생(四生)의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六道)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降級)으로, 혹은 은생어해(恩生於害)로 혹은 해생어은(害生於恩)으로 이와 같이 무량세계를 전개했나니’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유상세계란 진공의 체성, 곧 불생불멸한 불변의 진리가 근본이 되는 본체세계를, 그리고 무상세계란 묘유작용, 곧 인과보응의 이치에 바탕한 변화무상의 현상세계를 각각 지칭한 것이다.
이들 유상세계와 무상세계는 서로 떠날 수 없는 상즉불이(相卽不二)의 관계구조라 할 수 있는 바, 결국 그들은 하나의 일원상 진리에 대한 양면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정산은 이와 같은 ‘일원상의 진리’에 대해 진공과 묘유와 인과의 삼속성의 의미구조로 분석하면서, 그 가운데 ‘일원의 묘유’와 ‘일원의 인과’에 대해 각각, “그 진공한 가운데 또한 영지불매(靈知不昧)하여 광명이 시방을 포함하고, 조화가 만상(萬像)을 통하여 자재하나니 이는 곧 일원의 묘유요”, 또는 “진공과 묘유 그 가운데 또한 만법이 운행하여 생멸거래와 선악업보가 달라져서 드디어 육도와 사생으로 승급 강급하나니, 이는 곧 일원의 인과인 바”라 해석하고, 나아가 “이러한 진공과 묘유와 인과가 서로 떠나지 아니하여 한가지 일원의 진리가 된다”(《정산종사법어》 원리편2)고 정의하고 있다.
이들 삼속성 가운데 특히 뒤의 두 속성, 곧 묘유조화와 인과작용이란 바로 일원상진리의 묘유작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둘로 나누어 본 것이다. 이상에서 일원상 진리를 진공의 체성과 묘유의 조화작용으로 나누어 설명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설명의 편의상 하나의 진리에 대한 양면적 관찰에 불과한 것으로서, 실제에 있어서는 그 체와 용이 상즉불리(相卽不離)의 관계에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한편 이 법신불 일원의 진리를 공ㆍ원ㆍ정 또는 체ㆍ상ㆍ용 등의 삼속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일원상 진리의 종교적 체험:신앙과 수행
①일원상진리의 종교체험:법신불 일원의 진리는 소태산의 대각에 의하여 천명된 궁극적 진리로서, 그러한 법신불 일원의 세계는 일상적 인식작용이나 상대적 경험을 통해서는 도저히 파악될 수 없는 궁극의 세계이다. 이는 법신불 일원의 진리뿐만 아니라 여타 모든 종교의 궁극적 진리도 결국 심오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비로소 체감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체험은 지적ㆍ윤리적ㆍ심미적인 어느 체험과도 구별되는 것으로서, 인간이 가정할 수 있는 최상의 궁극적 존재를 향한 가장 근원적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심오한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인간은 유한성을 초극하고 무한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며, 이로부터 생명의 원천이 용솟음치는 종교적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교적 체험의 원천이 되는 것은 바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이며, 그 궁극적 실재는 종교와 종파에 따라서 서로 다른 상징체계로 나타난다. 곧 종교체험의 원천으로서의 궁극적 실재가 어떤 종교에서는 절대자로서의 초월적 신(神)으로 상징되기도 하고, 어떤 종교에서는 근원적 절대아(絶對我)로서의 불성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이 궁극적 실재에 대한 상징적 표현과 그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태도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종교의 출현과 종교체험의 모습이 전개될 수 있는 바, 이를 특징적으로 크게 유형지어 보면 감응적 종교체험과 합일적 종교체험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전자가 주로 궁극적 실재를 근원적 절대자 또는 창조적 초월자의 모습으로 대상화하여 그 절대자의 감응과 은총 속에서 살아가려는 감응적 종교체험이라 한다면, 이에 비해 후자는 그 궁극적 실재를 인간 자아의 본성 또는 절대아로서의 자성불로 내면화하여 그 참 자아와 계합된 주체적 삶을 추구하는 합일적 종교체험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계시(啓示)종교와 개오(開悟)종교, 또는 타력신앙과 자력신앙 등의 유형 구분을 시도하기도 한다.
원불교에서는 이들 양대 종교체험, 곧 감응적 종교체험과 합일적 종교체험을 조화적으로 회통시켜 자타력병진신앙(自他力竝進信仰)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곧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신앙문과 수행의 표본으로 하는 수행문이라는 신행(信行)의 양문을 열어 놓고 있다. 이는 인류 정신사에 있어 동서 종교를 통해 추구되어 온 모든 종교체험을 가능한 한 상보적(相補的)으로 조화 회통시킴과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이들을 둘로 보지 않는 통종교적 종교체험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②일원상 진리의 신앙:이는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한 감응적 종교체험으로서 그 구체적 내용은 ‘법신불ㆍ사은(四恩)신앙’이다. 곧 일원상은 ‘법신불ㆍ사은’의 상징으로서 이 가운데 법신불은 위에서 살펴본 일원상진리의 본체론적 파악인 진공체성에 중점을 둔 근원성 내지 대체상(大體相)을 의미한 것이라면, 사은은 그 일원상진리의 현상론적 파악인 묘유작용에 역점을 둔 현현작용 내지 구체상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데에는 법신불신앙과 사은신앙의 두 가지 의미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법신불 신앙은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우리 마음의 근원적 본성으로서, 우주를 관통하여 두루 존재하는 신령하고 거룩한 법신불에의 절대적 신앙과 전인적 귀의를 통해 그 법신불의 무한한 은총과 위력의 감응 속에 살아가는 신앙적 모습을 말한다. 이 법신불 신앙은 일체의 사념(邪念)을 제거하고 형상 없는 진리 법계에 일심으로 정성을 드리는 불공, 곧 진리불공이라고도 하는 바, 그 전형적 예로서 백지혈인(白指血印)을 나툰 법인성사(法認聖事)를 들 수 있다.
한편 이와는 달리 실지불공(實地佛供)으로서의 사은신앙은 어떠한가? 이에 대해 소태산은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를 믿어 복락을 구하나니,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만유로서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사물에 응할 것이며, 천만 사물의 당처에 직접 불공하기를 힘써서 현실적으로 복락을 장만할지니, 이를 몰아 말하자면 편협한 신앙을 돌려 원만한 신앙을 만들며, 미신적 신앙을 돌려 사실적 신앙을 하게 한 것이다”(《대종경》 교의품4)고 설명했다.
이 법문에 근거하여 사은신앙의 의의를 세 가지로 특징지어 살펴본다.
첫째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事事佛供)의 신앙이다. 곧 우주만유는 법신불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응화신(Nirma-kya)으로서 진리적 위력을 지니지 않은 존재가 하나도 없으므로, 모든 존재 모든 일에 존엄한 부처님을 모시고 받드는 경건한 신앙태도로 임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 감사보은의 신앙이다. 이와 같은 법신불의 응화신으로서의 우주만유는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한 법신불의 무한생성의 은(恩)적 현현체이므로, 이 천지ㆍ부모ㆍ동포ㆍ법률의 사은이 아니고서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무한한 은혜에 감사하고 나아가 보은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됨을 강조한 것이다.
셋째 인과진리에 바탕한 합리적 신앙이다. 이와 같은 사은의 무한생성의 은혜는 무질서와 혼돈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공정하고 합리적인 인과이법을 통해 발현되므로, 우리의 심신동작 하나하나를 경건한 부처님을 모시고 받드는 정성으로 행함을 강조한 합리적 신앙이다.
이처럼 일상적 삶의 현장 속에서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신념 아래 합리와 사실에 바탕한 감사보은행의 실천을 강조하는 사은신앙이야말로 원불교 신앙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다. 물론 이때 위에서 말한 법신불신앙과 사은신앙이 궁극적으로는 둘이 아니므로, 이들을 합칭하여 ‘법신불ㆍ사은신앙’이라 한다.
③일원상 진리의 수행:이는 법신불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한 합일적 종교체험이다. 곧 위와 같이 법신불 일원에의 철저한 신앙과 동시에, 그 법신불 일원의 진리는 바로 인간 자아의 본성이라 확신하여 진리를 주체적으로 자기 스스로의 내면세계에서 찾아 그 참된 자아에 의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일원상 진리의 수행을 세 가지로 특징지어 설명한다.
첫째 자성불(自性佛)에 대한 확신과 자각이다.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이며, 자기의 성품이 곧 법(法)”(《정산종사법》 원리편3)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는 우주만유의 본원인 법신불 일원이 인간 자아의 본성을 떠나 따로 초재(超在)해 있다고 보지 않고, 바로 자기의 자성(自性) 안에 내재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그저 아무렇게나 취급할 수 있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조종 여하에 따라 한없이 변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 자기 경외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곧 나의 본성은 다름 아닌 법신불 일원으로서 나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진리와 합일할 수 있다는 자각이 중요하다. 이처럼 진리적 삶의 출발을 무엇보다도 참된 자아(自我眞我)의 발견과 그러한 진아의 실현에 두고 경건한 구도적 삶을 전개하는 것이다.
둘째 이와 같은 자아실현의 방법으로서 법신불 일원의 진리에 의한 삼학수행(三學修行)의 인격완성이다. 그런데 앞에서 일원상 진리의 논리적 구조로서 검토한바 있는 진공ㆍ묘유 또는 공ㆍ원ㆍ정 등은 바로 그러한 일원상 진리 그 자체에 갖추어 있는 이대력 또는 삼대력으로서, 동시에 그것은 그 일원의 내재적 진리인 우리들 자신의 본성, 곧 자성불의 이대력 또는 삼대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삼학수행은 이 가운데 특히 일원상 진리의 삼대력에 초점을 두고, 그러한 삼대력을 일원의 내재적 진리인 우리들 스스로의 자성 안에서 발견하고(見性), 길러내고(養性), 실천해 나가는(率性) 세 가지의 진리실현 내지 자아실현의 수련법을 말한다. 이 삼학수행의 구체적 내용은 정신수양(精神修養)ㆍ사리연구(事理硏究)ㆍ작업취사(作業取捨)의 세 가지 실천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소태산은 일원의 원리를 깨닫는 것은 견성(見性)이요, 일원의 체성을 지키는 것은 양성(養性)이요, 일원과 같이 원만한 실행을 하는 것은 솔성(率性)이라고 정의 내린다(《대종경》 교의품5).
셋째 무시선에 의한 끊임없는 구도 노력과 진리적 삶의 전개이다. 여기에서 선(禪 dhyna)이란 일원의 내재적 진리로서의 자아의 본성 그 자체와 합일된 종교체험의 경지, 곧 ‘절대 진리의 자기화’ 내지 ‘주객 합일의 전일자(全一者) 체험’을 말하는 것으로서, 위와 같은 진리실현 또는 진아 완성의 노력으로서의 삼학수행은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부단히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한 말로 무시선이라 한다.
소태산은 이러한 무시선의 강령을, “육근(六根)이 무사(無事)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有事)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정전》 무시선법)고 하여, 무사시는 생명의 본원심(本源心)으로서의 일심을 양성하고, 유사시는 생명의 창조적 작업으로서의 정의를 실현할 것을 강조하는, 이른바 동정간불리선(動靜間不離禪)을 제시한다. 〈魯大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