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개벽(開闢)의 여명(黎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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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全文제1편 개벽(開闢)의 여명(黎明)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제3편 성업(聖業)의 결실(結實)

제1편 개벽(開闢)의 여명(黎明)

제1장 동방(東方)의 새 불토(佛土)

1. 서설

일찌기 정산 종사(鼎山宗師)는 새 회상의 창건사 서문에 쓰시기를 「역사는 세상의 거울이라 하였나니,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일의 흥망 성쇠가 다 이 역사에 나타나는 까닭이니라. 그러나, 역사를 보는 이가 다만 문자에 의지하여 지명(地名)이나 인명(人名)이나 연대(年代)만 보고 잘 기억하는 것으로 능히 역사의 진면(眞面)을 다 알았다고 할 수 없나니,반드시 그 때의 대세와, 그 주인공의 심경과, 그 법도(法度) 조직과, 그 실행 경로를 잘 해득하여야만 능히 역사의 진면을 볼 수 있고, 내외를 다 비치는 거울이 될 것이니라. 그런즉 우리 회상은 과연 어떠한 사명을 가졌으며, 시대는 과연 어떠한 시대이며, 대종사(大宗師)는 과연 어떠한 성인이시며, 법은 과연 어떠한 법이며, 실행 경로는 과연 어떻게 되었으며, 미래에는 과연 어떻게 결실될 것인가를 잘 연구하여야 할 것이니라」하시었다.

이에 따라, 이 교사는 먼저 동방의 새 불토인 한반도의 내력과, 선지자들의 자취와, 말세 말법의 현상을 대략 더듬고, 창건사에 의하여, 새 부처님 대종사의 출세기연(出世機緣)과, 성도 경로(成道經路)를 기술한 다음, 제생 의세의 크신 경륜 아래 첫 교화를 베푸시고 회상 건설을 정초(定礎)하시며, 새 교법을 초안하신 후, 새 회상의 창립을 공개하신 경로를 살폈다. 대종사께서 교법과 교제(敎制)를 정비하신 후 열반하시매, 정산 종사께서 시국의 만난(萬難)중에 법등(法燈)을 이어, 교단 체제를 형성 완비하시며, 보본 사업(報本事業)을 주재(主宰)하시며, 모든 목표사업 기관을 확립하시며, 교전의 편수, 삼동윤리의 선포 등으로 일원 세계 건설의 터전을 다지신 경과를 살피고, 정산 종사 열반 후 교헌에 따라 대산(大山)종법사를 추대하고, 대중이 합력하여, 교전 교서의 결집 발간, 법위 향상 운동, 종협 참여, 해외 포교, 제2차 보본 사업, 반백년 기념대회 등으로 결실의 성업에 정진한 개교 반백년 동안의 대체 과정(大體過程)을 살폈다. 우리는 이로써, 대종사께서 일찌기 예시 하신 사 오십 년 결실(四五十年結實)의 자취를 대관(大觀)하고, 사 오백 년 결복(四五百年結福) 향한 앞으로의 무궁한 전진에 반조하는 거울을 삼게 될 것이다.

2. 한민족과 한반도

하늘의 자손임을 믿는 인류의 한 갈래가 밝음의 근원을 찾아 동으로 동으로 옮겨 와서 극동의 한 반도에 정착하니 이것이 한민족이라 한다. 한민족은 대략 반만년 전에 이미 나라를 세우고, 아름다운 강산, 알맞은 기후와, 기름진 풍토, 넉넉한 물산에 의좋게 살면서 슬기로운 문화를 한반도에 이룩하여 왔다. 밝음을 숭배하고 예의를 숭상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한민족의 나라는, 이웃 나라들로 부터 예의 동방 군자국이라는 기림을 받았으며, 부당한 침략을 용감히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일찌기 한 번도 이웃을 침략하는 부당한 싸움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하나라는 뜻과 크다는 뜻을 겸하여 갖춘 「한」민족 가운데, 대대로 신령한 인물들이 이어 나왔지마는, 시대의 대운이 하나의 세계로 향하여 크게 열리는 새 세상 개벽의 여명에 도덕으로 천하를 한 집안 삼을 큰 주세 성자가 한민족 가운데서 출현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지도상의 한반도는 아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북으로 부터 남을 향하여 뻗어 내려, 양대륙이 좌우에서 감싸고 있으니, 이는 마치 세계의 추기(樞機)를 이룰 지형이며, 삼면 바다 일면 대륙에 연결된 그 위치는 세계의 문호가 됨직하다. 더구나 금강산은 천하의 명산이라, 대종사께서 「이 산은 장차 세계의 공원이 될 것이라. ···이 나라는 금강산으로 인하여 세계에 크게 드러나리라」하셨을 뿐더러, 일찍부터 금강산에 얽혀 온 불가(佛家)의 여러 인연 설화들은, 다 고요한 아침 나라 한반도가 장차 동방의 새 불토로 무궁한 영광을 길이 누릴 것을 예시하여 왔다.

3. 한반도의 종교

아득한 옛날 부터 한민족도 숱한 신앙을 가졌겠지마는, 역사의 첫 장을 넘기게 되는 때에는 이미 태양 숭배를 알맹이로 하는 민족적 종교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반도 고유의 신앙이다. 그 후 대륙과의 교통이 활발해 지면서 불교가 들어 오고, 유교·도교가 들어 와서, 서로 공존도 하고 배척도 하는 가운데, 각각 그 시대의 정신계를 지배하였고, 이웃 나라의 문화에 까지 적지 않은 이바지를 하였으며, 회회교도 전래된 흔적이 있으나 희미해 졌다.

근세에 이르러 개화의 물결을 타고 기독교가 서양에서 들어 왔으며,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개탄하고 무기력해진 유·불·선 삼교(儒佛仙三敎)의 총화를 이루어, 서교(西敎)에 대응하면서, 보국 안민(輔國安民) 광제 창생(廣濟蒼生) 하기를 주장하는 동학(東學)이 일어나고, 동학이 여러 가지 변모와 분파를 이루면서 특히 호남을 중심으로 펴지는 가운데 증산교(甑山敎)가 일어나, 동학과 쌍벽을 이룸으로써, 한반도에는 고유의 민간 신앙에 전래(傳來)의 비결들을 결부시켜 개벽의 대운을 기다리는 수 많은 신생 종파가 뒤를 이어 일어 났다.

4. 선지자들의 자취

서가모니 불께서 정법(正法).상법(像法).계법(季法)을 말씀하시고 여래 멸후 후 오백년을 말씀하시어, 삼시(三時) 또는 오시(五時)로 불법의 성쇠와 재흥(再興)을 예언하신 것이나, 미륵 보살을 당래 교주로 수기(授記)하신 것 등은 다 불문에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 중 특히 한반도에서, 금강산이 법기 도량(法起 道場)으로, 이 나라가 불국 연토(佛國緣土)로 믿어져 온 것은, 미륵불을 기다리는 신앙 행사가 다른 어느 지역에서 보다 성행하였던 사실과 더불어 주목할 일이다. 이는 실로 이 땅 불문의 선지자들이 한반도가 장차 새 불토로 될 것을 예견하고, 민중의 마음 속에 그 믿음을 뿌리 깊이 심어 준 것이다.

그 후, 한반도에는 유명 무명의 많은 선지자들이, 혹은 비결로, 혹은 도참(圖讖)으로, 혹은 가요로, 미래의 조선이 세계가 우러르는 거룩한 국토로 된다는 신념을 더욱 고취하였고, 원기 전(圓紀前) 50년 대(1860~1864)에 동학의 최 수운(崔水雲 名濟愚)은 후천의 개벽을 외치면서 「유도(儒道)·불도(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運)이 역시 다했던가. ···만고(萬古) 없는 무극 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 ···운수(運數) 있는 그 사람은 차차 차차 받아다가 차차 차차 가르치니 나 없어도 다행일세」라 하였으며, 원기 전 10년대(1900~1909)에 강 증산(姜甑山 名一淳)은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라」고 말하고, 「예수교도는 예수의 재강림을 기다리고, 불교도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동학 신도는 최 수운의 갱생을 기다리나니, 누구든지 한 사람만 나오면 각기 저의 스승이라 하여 따르리라」고 말하여, 이 땅에 새 세상의 주세 성자가 뒤이어 출세하여 새 세상의 큰 회상을 건설할 것임을 밝히 예언하였다.

5. 일대전환의 시대

대종사께서 이 세상에 오신 시대는 인류 역사상 일찌기 없었던 큰 격동의 시대요 일대 전환의 시대였다. 19세기 말엽부터 밖으로는 열강 여러 나라의 침략 주의가 기세를 올려, 마침내 세계 동란의 기운이 감돌았고, 급속한 과학 문명의 발달은 인류의 정신 세력이 그 주체를 잃게 하였다. 안으로 한국의 국정은 극도로 피폐되고, 외세의 침범으로 국가의 존망이 경각에 달려 있었으며, 수백년 내려 온 불합리한 차별 제도 아래서 수탈과 탄압에 시달린 민중은 도탄에 빠져 있는 가운데, 개화의 틈을 타서 재빠르게 밀려 든 서양의 물질 문명은 도덕의 타락과 사회의 혼란을 가중 시켜 말세의 위기를 더욱 실감하게 하였다.

당시의 일대 위기를, 후일, 대종사께서는 [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사람이 사용하여야 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 고해가 없으리요] 라고 개교의 동기 설명에 요약하여 개탄하시고, 「이제 부터는 묵은 세상을 새 세상으로 건설하게」 된다고 말씀하시었다.

6. 말법현상과 구주출세

당시 한반도의 종교계 또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니, 고유의 신앙과 유·불·선 삼교는, 혹은 무당들의 미신 무대로 화하고, 혹은 유교의 세력에 밀려 산중에 숨어 들었으며, 혹은 허례와 공론으로 형식만 남게 되고, 혹은 일 없는 이의 양생술로 그림자만 남았으며, 서교(西敎)는 숱한 박해를 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고, 동학은 갖은 경난(經難)끝에 숨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 밖의 여러 교파들은 혹세 무민으로 민심의 혼란에 부채질을 더할 따름이었다. 이에 따라, 민중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으로써, 새 성자에 의한 새 사상 새 종교를 더욱 기다리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구원 겁래의 크신 서원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신 것이다.

후일 정산 종사는 대종사의 성비(聖碑)에 쓰시기를 「대범, 천지에는 사시가 순환하고 일월이 대명(代明)하므로 만물이 그 생성의 도(道)를 얻게 되고, 세상에는 불불(佛佛)이 계세(繼世)하고 성성(聖聖)이 상전(相傳)하므로 중생이 그 제도(濟度)의 은(恩)을 입게 되나니, 이는 우주 자연의 정칙(定則)이다」 하시고, 「옛날 영산 회상이 열린 후, 정법과 상법을 지내고 계법 시대에 들어 와서, 바른 도가 행하지 못하고 삿된 법이 세상에 편만하며, 정신이 세력을 잃고 물질이 천하를 지배하여 생령의 고해가 날로 증심 하였나니, 이것이 곧 대종사께서 다시 이 세상에 출현하시게 된 기연이다」 라고 밝히시어, 대종사께서는 새 세상의 주세불로 이 땅에 다시 오시었고, 새 부처님께서 세우신 새 회상은 새 세상의 주세 회상임을 분명히 하여 주시었다.

제2장 소태산 대종사(少太山大宗師)

1. 대종사의 탄생과 유시

대종사의 성(姓)은 박(朴)씨요, 이름은 중빈(重彬)이시요, 호(號)는 소태산(少太山)이시니, 원기 전(圓紀前) 25년(1891·辛卯) 음 3월 27일에 한반도의 서남 해변, 전라 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全羅南道 靈光郡 白岫面 吉龍里) 영촌(永村)에서 탄생하시어, 이웃 마을 구호동(九號洞)에서 성장하시었다. 부친은 박 회경(法名晦傾 字成三)이시요, 모친은 유 정천(江陵劉氏 法名正天)이시며, 신라 시조왕 박 혁거세(新羅始祖王朴赫居世)의 후예이시다. 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이시니, 신라 밀성 대군(景明王長子密成大君)에 의하여 본(本)을 얻었고, 그 후,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에 세거(世居)하다가, 대종사의 7대조 때 영광군에 이거하였으며, 처음에는 군서면 마읍리에 거주하다가, 대종사 탄생 전 7년(1884·甲申) 길룡리로 이사하시었다. 부친은, 가난하여 학문은 없었으나, 천성이 명민하여 평생에 사람들의 경모함을 받았고, 모친은, 천성이 인후하여 이웃에서 항상 덕인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대종사는 그 3남이시었다.

대종사, 어려서 부터 기상이 늠름하시고 도량이 활달하시며, 모든 사물을 대함에 주의하는 천성이 있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함을 항상 범연히 아니하시며, 매양 어른들을 좇아 그 모든 언행에 묻기를 좋아 하시며, 남과의 약속에 한번 하기로 한 일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실행하시었다. 어리신 때에 마을 앞 개울 가에서 큰 뱀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그를 쫓으신 일과, 4세 때 부친과의 약속을 지켜 동학군 왔다는 경보로 부친을 크게 놀라게 하신 일과, 10세 때 한문 서당 선생과의 약속을 지켜 그 날 해 전에 화재(火災)로 그를 크게 놀라게 하신 일 등은, 대종사의 비범한 성격 일단을 보이는 일화들로서 당시 참견한 여러 사람은, 혹은 장차 큰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고 비방도 하고, 혹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찬탄도 하였다.

2. 대종사의 발심

대종사, 7세 되시던 해, 어느 날, 화창한 하늘에 한 점 구름이 없고, 사방 산천에 맑은 기운이 충만함을 보시다가, 문득 「저 하늘은 얼마나 높고 큰 것이며, 어찌하여 저렇게 깨끗하게 보이는고」 하는 의심이 일어 나고, 뒤를 이어 「저와 같이 깨끗한 하늘에서 우연히 바람이 일고 구름이 일어나니, 그 바람과 구름은 또한 어떻게 일어 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일어났다.

이러한 의심이 시작됨을 따라 모든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 나서, 9세 때 부터는 나를 생각한즉 내가 스스로 의심이 되고, 부모와 형제간을 생각한즉 부모와 형제간 되는 일이 의심이 되고, 물건을 생각한즉 물건이 또한 의심이 되고, 주야가 변천하는 것을 생각한즉 그것이 또한 의심이 되어, 이 의심 저 의심이 한 가지로 대종사를 답답하게 하였다.

그 후 10세 때 부터 부모의 명에 의하여 겉으로는 비록 한문 서당에 다니시었으나, 글 배우는 데에는 뜻이 적으시며, 의복·음식·유희 등에는 조금도 생각이 없으시고, 오직 이 수 많은 의심을 풀어 알고자 하는 한 생각으로 마음이 차 있었다.

3. 대종사의 구도

대종사, 한번 의심을 발하신 후로는 날이 갈수록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하시어, 밤 낮으로 오직 소원 성취의 길을 찾기에 노심(勞心)하시더니, 11세 때 마읍리 선산 묘제(先山墓祭)에 참례하셨다가, 산신을 먼저 제사하고 선조를 뒤에 제사함을 보시고 친족 중 한 사람에게 그 연유를 물어, 산신은 크게 신령하다 함을 들으시고는 나의 이 모든 의심을 산신에게 물으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어, 그 날 부터 내심(內心)에 산신을 만나기로 작정하시었다.

그 후로는, 매일 산중을 더듬어 산과(山果)를 거두시며, 혹 정한 음식을 보시면 그것을 가지고 마을 뒷산 「삼밭재」에 오르시어, 「마당바위」라는 바위 위에 제물을 진설하시고, 전후 사방을 향하여 종일토록 예배하시다가, 해 진 후에야 귀가하시기를 매일 과정으로 하시되, 혹은 그 곳에서 밤을 지내기도 하고, 혹은 비가 오고 눈이 와도 하루도 빠짐 없이 5년 간을 일관하시었으며, 처음에는 부모 모르게 그 일을 시작하시었으나, 마침내 모친께서 알으시고 그 정성에 감동하여 많은 후원을 하시었다.

대종사, 15세 때에 부모의 명에 의하여 면내 홍곡리의 규수 양 하운(濟州梁氏 法名夏雲)과 결혼하시고, 16세 되시던 정월, 환세 인사 차로 처가에 가셨다가, 마침 마을 사람이 고대 소설(朴太溥傳 趙雄傳등) 읽는 것을 들으시는 중, 그 소설의 주인공들이 천신 만고 끝에 도사(道士)를 만나 소원을 성취하는지라, 대종사의 심중에 큰 변동이 생기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고자 하던 산신은, 5년 간 한결 같이 정성을 들였으나 한 번도 보이지 않으니, 가히 믿을 수 없을 뿐 더러, 그 유무를 확실히 알 수도 없는 것인즉, 나도 이제 부터는 저 소설의 주인공 같이 도사 만나는데에 정성을 들인다면, 도사는 사람이라 반드시 없지도 아니하리라」 생각하시고, 전날의 결심을 도사 만날 결심으로 돌리시었다.

그 후로는 길에 이상한 사람이나 걸인이 있어도 그가 혹 도사나 아닌가 하여 청하여 시험해 보시며, 또한 어디에 이인(異人)이나 은사(隱士)가 있다고 하면 반드시 찾아 가 보시고, 혹은 청하여 같이 지내시며 시험해 보기도 하여, 그 후 6년 간 도사를 찾아 일천 정성을 다 들이시었다.

4. 대종사의 입정

대종사, 어려서 부터 글 공부와 살림에는 뜻이 없으시고, 오직 도(道) 구하는 데에만 뜻을 두시매, 부친께서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다가, 마침내 대종사의 정성에 감동되어 그 구도를 적극 후원하셨으며, 대종사께서 20세에 이르도록 도사 만날 소원도 이루지 못함을 보시고는 「마당바위」 부근에 수간의 초당을 지어 심공(心功)을 들이게도 하시더니, 원기 전 6년(1910·庚戊) 10월 마침내 별세하시었다. 이에 대종사께서는 생활과 구도의 후원을 일시에 잃게 되신 데다가, 이미 큰 형과 아우는 출계(出系) 분가하고, 중형은 일찍 별세한지라, 모친의 봉양과 권속의 부양을 다 대종사께서 책임지시게 되니, 뜻 없는 살림과 경험없는 고생에 그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시었다.

뿐만 아니라, 6년 동안 구하고 바라던 도사도, 수많은 사람을 접응하여 보시었으나, 바른 스승을 찾을 곳이 없게 되매, 22세 때 부터는 도사 만날 생각도 차차 단념하시고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한 생각만 점점 깊어져 갔다. 처음에는 생활에 대한 계교심도 혹 있었고, 고생이라는 느낌도 혹 있었으나, 세월이 갈수록 다른 생각은 다 잊으시고, 오직 그 한 생각으로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고 저녁에서 아침에 이르시며, 때로는 저절로 떠 오르는 주문(呪文)도 외우시고, 때로는 고창 연화봉(全北高敞郡心元面蓮花峰) 초당 등으로 장소를 옮기어 정신을 수습도 해 보시었으나, 25세 때 부터는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그 생각마저도 잊어버리게 되어, 점점 행하여도 행하는 줄을 모르고, 말하여도 말하는 줄을 모르며, 음식을 드시어도 드는 줄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 이사에 집은 두 번 다 무너지고, 생계는 막연하여 조석 공양이 어려운 데다가, 복중(腹中)에는 큰 적(癪)이 들고, 온 몸에는 종기가 가득하여, 가족들의 근심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 사람들은 다 폐인으로 인증하게 되었으며, 그 정신이 어느 때에는 혹 분별이 있는 듯 하다가 다시 혼돈하여 지고, 혹 기억이 나타나는 듯 하다가 다시 어두어 지니, 부인은 대종사의 정신 회복을 위하여 다년간 후원 별처(後園別處)에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5. 대종사의 대각

원기 원년(1916·丙辰) 음 3월 26일 이른 새벽에, 대종사, 묵연히 앉으셨더니, 우연히 정신이 쇄락해 지며, 전에 없던 새로운 기운이 있으므로, 이상히 여기시어 밖에 나와 사면을 살펴 보시니, 천기가 심히 청랑하고 별과 별이 교교(皎皎)하였다. 이에, 맑은 공기를 호흡하시며 뜰 앞을 두루 배회하시더니, 문득 이 생각 저 생각이 마음에 나타나, 그동안 지내 온 바가 모두 고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며, 고생을 면하기로 하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며, 날이 밝으면 우선 머리도 빗고 손톱도 자르고 세수도 하리라는 생각이 일어 났다. 날이 밝으매, 대종사, 먼저 청결하는 기구들을 찾으시는지라, 이를 본 가족들은 대종사의 의외 행동에 한 편 놀라고 한 편 기뻐하여 그 동작을 주시하였으니, 이것이 곧 대종사 출정(出定)의 초보이었다.

그 날 조반 후, 이웃에 사는 몇 몇 마을 사람이 동학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가지고 서로 언론(言論)하는 중, 특히 「오유영부 기명선약 기형태극 우형궁궁(吾有靈符其名仙藥其形太極又形弓弓)」이란 귀절로 논란함을 들으시매, 문득 그 뜻이 해석되는지라, 대종사 내심에 대단히 신기하게 여기시었다. 얼마 후, 또한 유학자 두 사람이 지나다가 뜰 앞에 잠간 쉬어 가는 중, 『주역』에 「대인 여천지합기덕 여일월합기명 여사시합기서 여귀신합기길흉(大人與天地合其德與日月合其明與四時合其序與鬼神合其吉凶)」이라는 귀절을 가지고 서로 언론함을 들으시매, 그 뜻이 또한 환히 해석 되시었다. 이에 더욱 이상히 여기시어 「이것이 아마 마음 밝아지는 증거가 아닌가」하시고, 전 날에 생각하시던 모든 의두를 차례로 연마해 보신즉, 모두 한 생각에 넘지 아니하여, 드디어 대각을 이루시었다.

대종사, 이에 말씀하시기를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하시었다. 이로부터 대종사의 심경은 날이 갈수록 명랑해 지고, 야위던 얼굴과 몸에 기혈이 충만하여, 그간의 모든 병증도 차차 저절로 회복되니, 보는 이들 누구나 정신이 황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종사의 생장하신 길룡리는 산중 궁촌으로, 견문이 심히 적었고, 대종사께서도 글 공부한 시일이 2년에 불과하였으므로, 그 동안 어떤 종교의 교의(敎義)와 역사를 듣고 배우신 바가 없었으나, 듣고 보신 바가 없이 스스로 원을 발하시고, 스스로 정성을 다하시고, 스스로 정(定)에 드시고, 스스로 대각을 성취하여, 필경은 천만 교법의 대소 본말을 일원의 이치로써 관통하시었으니, 이는 곧 영겁에 수도의 종성(種性)이 매(昧)하지 아니한 까닭이라 할 것이다.

제3장 제생의세(濟生醫世)의 경륜(經綸)

1. 교법의 연원

대종사, 대각을 이루신 후, 마음에 홀로 기쁘고 자신이 충만(心獨喜自負)하여, 그 경로를 생각하시되 「순서 알기가 어렵다」 하시고, 「강연히 말하자면 자력으로 구하는 중 사은의 도움이라」 하시었다.

대종사, 다시 생각하시기를 「동양에는 예로 부터 유·불·선 삼교(儒佛仙三敎)가 있고, 이 나라에도 근래에 몇 가지 새 종교가 일어났으며, 서양에도 몇 가지 종교가 있다 하나, 내가 지금까지 그 모든 교의(敎義)를 자상히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 이제 그 모든 교서를 한 번 참고하여, 나의 얻은 바에 대조하여 보리라」 하시고, 이웃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그 경전들을 약간 구하여 대략 열람하시었다. 당시 열람하신 경전은, 유교의 사서(四書)와 소학(小學), 불교의 금강경(金剛經)·선요(禪要)·불교대전(佛敎大全)·팔상록(八相錄)·선가(仙家)의 음부경(陰符經)·옥추경(玉樞經), 동학의 동경 대전(東經大全)·가사(歌詞), 기독교의 구약(舊約)·신약(新約) 등인 바, 그 중 특히 [금강경]은 꿈으로 그 이름을 알으셨다 한다.

대종사, 경전들을 열람하신 후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 바는 옛 성인들이 또한 먼저 알았도다」 하시고, 「모든 경전의 뜻이 대개 적절하여 별로 버릴 바가 적으나, 그 중에도 진리의 심천(深淺)이 없지 아니한 바, 그 근본적 진리를 밝히기로는 불법이 제일이라, 서가모니 불은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하시었다. 대종사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 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 본다면 모든 일이 은연 중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하시고, 「장차 회상을 열 때에도 불법으로 주체를 삼고, 모든 교법도 마땅한 바를 따라 응용하여, 완전 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고 내정하시었다.

2. 최초의 법어

대종사, 안으로 모든 교법을 참고하신 후, 다시 밖으로 시국을 살펴 보시어, 정신 도덕의 부활이 무엇보다 시급함을 느끼시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제창하시니, 이것이 곧 개교 표어이다. 대종사, 다시 시국에 대한 감상과, 그에 따른 새 세상 건설의 대책을 최초 법어로 발표하시니, 곧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의 진화상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이다.

「수신의 요법」은, 시대를 따라 학문을 준비하고, 수양 연구 취사를 놓지 아니하여야 새 세상의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요, 「제가의 요법」은 실업과 근검 저축, 교육과 의견 교환, 도덕과 정치 복종, 희망과 방법 참조를 주의 하여야 새 가정 새 국가를 이룩한다는 것이요, 「강자 약자의 진화상 요법」은, 강자는 자리이타로 약자를 진화시키며, 약자는 강자를 선도자로 삼아, 강약이 서로 진화하는 길로 나아가야 상극없는 새 세상을 이룩한다는 것이요,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은, 이상 지식을 가지고, 신용을 잃지 말며, 사리를 취하지 말고, 지행을 대조하여야 제생 의세의 경륜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3. 첫 제도의 방편과 구인제자

대종사, 표어와 법어를 발표하신 후,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이제 나의 안 바는 곧 도덕의 정체(正體)요, 나의 목적하는 바는 곧 새 회상을 이 세상에 창건하여 창생을 낙원으로 인도하자는 것이나, 내가 몇 달 전까지도 폐인으로 평을 받았고, 일찌기 어떤 도가에 출입하여 본 바가 없었으며, 현재의 민중은 실생활의 정법은 모르고 허위와 미신에만 정신이 돌아 가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하시고, 포교할 기회를 기다리시었다.

때 마침 증산 교파가 사방에 일어 나서 모든 인심을 충동 하던 중, 길룡리 부근에도 그 전파가 성한지라,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방편으로 여러 사람의 단결과 신앙을 얻은 후에 정도를 따라 차차 정법 교화를 하리라 결심하시고, 원기 원년(1916·丙辰) 7월 경, 친히 그 교파 선전원을 청하여 치성하는 절차를 물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특별한 정성으로 7일 치성을 지낸 후, 보통 생각으로는 가히 추상할 수 없는 말씀과 태도로 좌우 사람들의 정신을 황홀케 하시니, 몇 달 아니되어 이웃 각 처에서 믿고 따르는 사람이 40여명에 달하였다.

대종사, 40여명의 신자들과 서로 내왕한 지 4·5개월이 되었으나, 그들은 대개 일시적 허영심으로 모였고, 또한 그 동안 어떤 통제 있는 생활을 하여 본 바가 없는 이들이라, 그들을 일률 지도할 생각을 뒤로 미루시고, 그 해(원기원년·1916) 12월 경, 그 중에서 특별히 진실하고 신심 굳은 여덟 사람을 먼저 선택하시니, 곧 김 성섭(金成燮)·김 성구(金聖久)·박 한석(朴漢碩)·오 재겸(吳在謙)·이 인명(李仁明)·박 경문(朴京文)·유 성국(劉成國)·이 재풍(李載馮) 등이었으며, 그 후 송 도군(宋道君)을 맞으시니, 이들이 곧 새 회상의 첫 구인 제자이다.

9인 중 첫 제자는 김 성섭이니, 그는 본래 대종사의 가정과 교의(交誼)가 있어 친절함이 형제같은 중, 대종사의 입정 전후에 많은 보조가 있었고, 박 한석은 대종사의 친제(親弟)요, 유 성국은 외숙이요, 박 경문은 족질이며, 이 인명·김 성구·오 재겸은 모두 근동 지우(近洞知友)이고, 군서(郡西) 사람 이 재풍은 오 재겸의 인도로 처음 만났으며, 송 도군은 경북 성주 사람으로, 정법을 찾아 방황하다가 원기 3년(1918·戊午) 3월에 대종사께 귀의하였다.

4. 첫 조단과 훈련

대종사, 일찌기 공부인의 조단 방법을 강구하시어, 장차 시방 세계 모든 사람을 통치 교화할 법을 제정하시니, 그 요지는, 오직 한 스승의 가르침으로 원근 각처의 모든 사람을 고루 훈련하는 빠른 방법이었다. 그 대략을 말하자면, 9인으로 1단을 삼고, 단장 1인을 가(加)하여 9인의 공부와 사업을 지도 육성케하며, 9단이 구성되는 때에는 9단장으로 다시 1단을 삼고, 단장 1인을 가하여 9단장의 공부와 사업을 지도 육성케 하되, 이십팔수(二十八宿)(角亢氐房心尾箕斗牛女虛危室壁奎婁胃昴畢觜參井鬼柳星張翼軫)의 순서를 응용하여, 이상 단장도 계출(繼出)되는 대로 이와 같은 예로 다시 조직하여, 몇 억만의 많은 수라도 지도할 수 있으나 그 공력은 항상 9인에게만 들이면 되는 간이한 조직이었다. 또한 단의 종류도, 위에 수위단이 있고, 그 아래 모든 사람의 처지와 발원과 실행에 따라 전무출신 단·거진출진 단·보통 단 등으로 구분하기로 하시었다.

대종사, 이 방법에 의하여, 원기2년(1917·丁巳) 7월 26일에, 비로소 남자 수위단을 조직하시니, 단장에 대종사, 건방(乾方) 이 재풍, 감방(坎方) 이 인명, 간방(艮方) 김 성구, 진방(震方) 오 재겸, 손방(巽方) 박 경문, 이방(离方) 박 한석, 곤방(坤方) 유 성국, 태방(兌方) 김 성섭이었고, 중앙은 비워 두었다가 1년 후(원기3년·戊午7월) 송도군을 서임(叙任)하였다.

대종사, 최초의 단을 조직하신 후, 단원들의 신성이 날로 전진은 하나, 아직도 마음에 원하는 바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결이며, 난측한 신통 묘술이며, 수고 없이 속히 되는 것 등이요, 진리의 당체와 인도의 정의를 분석하는 공부는 원하지 아니함을 보시고, 종종 하늘에 제사하여 그 마음을 결속케 하시고, 친히 지도하실 말씀도 천제(天帝)의 말씀이라 하여 그 실행을 권면하시었다.

그 후, 차차 법을 정하여 매월 예회 보는 법을 지시하시니, 곧 삼순일(三旬日)(1일·11일·21일)로써 모이되, 신(信)을 어긴 이는 상당한 벌이 있게 하시고, 또는 『성계명시독(誠誡明示讀)』이라는 책을 두시사, 단원들의 10일 동안 지낸 바 마음을 청(靑)·홍(紅)·흑점(黑點)으로 조사하여, 그 신성 진퇴와 실행 여부를 대조케 하시니, 단원들은 한 편 두려워 하고 한 편 기뻐하여, 그 마음의 결합됨과 신성의 철저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5. 법의 대전과 창립 한도

원기 2년(1917·丁巳) 이래로, 대종사, 종종 김 성섭에게 붓을 잡으라 하시고, 친히 수 많은 문장과 시가 등을 읊어 내어 기록케 하시고, 편집하여 『법의대전(法義大全)』이라 이름하시었다. 『법의대전』의 내용은 그 뜻이 심히 신비하여, 보통 지견으로는 가히 다 헤아려 말할 수 없었으나, 그 대강은, 곧 도덕의 정맥이 끊어 졌다가 다시 난다는 것과, 세계의 대세가 역수가 지내면 순수가 온다는 것과, 새 회상을 건설하실 계획 등 이었다.

단원들은 [법의대전]을 재미 있게 읊고 노래 하여, 그 신심 고취에 큰 자료가 되었으나, 이는 한 때의 발심 조흥은 될지언정 많은 사람을 제도할 정식 교서는 아니라 하여, 후일 봉래산에서 새 교강(敎綱) 발표 후 거두어 불사르게 하심으로써, 서문 첫 절과 11귀의 한시가 구송(口誦)으로 전하여 대종경(大宗經·전망품2장)에 수록되었을 뿐, 세상에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백일소(白日嘯)·심적편(心迹篇)·감응편(感應篇) 등의 저술과, 봉래산에서 지으신 회성곡(回性曲)이 있었으나, 그도 다 불사르게 하심으로써 후세에 남지 못하였다.

원기 3년(1918·戊午) 10월에, 대종사, 새 회상의 창립 한도를 발표하시니, 앞으로 회상의 대수(代數)는 기원 연수(紀元年數)로 구분하되, 매대(每代)를 36년으로 하고, 창립 제일대(第一代) 36년은 이를 다시 3회(回)로 나누어, 제 1회 12년은 교단 창립의 정신적 경제적 기초를 세우고 창립의 인연을 만나는 기간으로, 제 2회 12년은 교법을 제정하고 교재를 편성하는 기간으로, 제 3회 12년은 법을 펼 인재를 양성 훈련하여 포교에 주력하는 기간으로 하며, 시창 기원은 대종사의 대각하신 해(1916·丙辰)로 기준 실시할 것도 아울러 발표하시었다.

제4장 회상 건설(會上建設)의 정초(定礎)

1. 저축 조합 운동

원기 2년(1917·丁巳) 8월에, 대종사, [저축 조합]을 창설하시고, 단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장차 시방 세계를 위하여 함께 큰 공부와 사업을 하기로 하면, 먼저 공부할 비용과 사업할 자금을 예비하여야 하고, 예비를 하기로 하면 어떠한 기관과 조약을 세워야 할 것이므로, 이제 회상 기성(期成)의 한 기관으로 저축 조합을 실시하여 앞 일을 준비하려 하노라」 하시었다.

이에 모든 단원이 술·담배를 끊어 그 대액(代額)을 저축하며, 의복·음식 등에 절약할 정도가 있으면 그 대액을 저축하며, 재래의 여러 명절 휴일을 줄여 특별 노동 수입을 저축하며, 각자 부인에게도 끼니마다 시미(匙米)(후일 報恩米)를 저축케 하며, 그 간 실행해 온 천제(天祭)도 폐지하여 그 소비 대액을 조합에 저축하기로 하고, 대종사, 친히 조합장이 되시어 그 실행을 장려하시니, 불과 몇 달에 저축된 금액이 상당한 액수(200여원)에 달하였다.

대종사, 조합원들에게 명하여, 그 동안의 저축금으로 숯을 사 두라 하시고, 한 편으로는 이웃 마을 부호 한 사람에게 빚(400원)을 얻으며, 대종사께서 그 간 준비해 두신 사재(400원)도 판출 제공하사 다 숯을 사 두게 하시니, 7·8개월 후 그 값이 일약 10배(倍)로 폭등하여 조합은 1년 안에 큰 자금을 이루게 되었다. 대종사의 사재는 대각 이후로 본 댁에 남아 있는 가구 등속을 매각 작전(賣却作錢)하여 운용 조성한 것이요, 빚은 당시 조합의 신용으로는 얻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대종사께서 명령하신 다음 날, 부호가 자진하여 빚을 주었다. 조합원들은 뜻 밖의 성공에 기뻐하는 동시에, 이것은 아마 하늘이 우리 사업을 도와 주심이라 하여, 더욱 신심과 용기를 얻게 되었고, 숯 무역은 제 1차 대전으로 숯 시세의 일대 변동을 당하여 그러한 이익을 보게 되었다.

2. 정관평 방언 공사

원기 3년(1918·戊午) 3월에, 대종사, 저축 조합의 저축금을 수합하신 후, 조합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어떠한 사업이나 가히 경영할 만한 약간의 기본금을 얻었으니, 이것으로 사업에 착수하여야 할 것인 바, 나의 심중에 일찌기 한 계획이 있으니, 그대들은 잘 생각해 보라」 하시고, 길룡리 앞 바닷물 내왕하는 간석지를 가리키시며 「이것은 모든 사람의 버려 둔 바라, 우리가 언(堰)을 막아 논을 만들면 몇 해 안에 완전한 논이 될 뿐 더러 적으나마 국가 사회의 생산에 한 도움도 될 것이다. 이러한 개척 사업부터 시작하여 처음부터 공익의 길로 나아감이 어떠하냐」 하시었다. 조합원들은 원래 신심이 독실한 중에 몇 번의 증험도 있었으므로, 대종사의 말씀에는 다른 사량 계교를 내지 아니하고 오직 절대 복종 하였다. 이에, 일제히 명을 받들어 오직 순일한 마음으로 지사 불변(至死不變)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다음날로 곧 방언 공사에 착수하였다.

조합원들이 공사에 착수하니, 근방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냉소하며, 혹은 장차 성공치 못할 것을 단언하여 장담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그 비평 조소에 조금도 끌리지 아니하고, 용기를 더욱 내며 뜻을 더욱 굳게 하여, 일심 합력으로 악전고투를 계속 하였다. 삼복 성염(三伏盛炎)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삭풍 한설에는 추위를 헤치면서, 한 편은 인부들을 독촉하고 한 편은 직접 흙짐을 져서, 조금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아니 하였다.

방언 공사는 이듬해인 원기 4년(1919·己未) 3월에 준공되니, 공사 기간은 만 1개년이요 간척 농토 면적은 2만6천여평(坪)이었다. 대종사, 피땀의 정성 어린 새 농장을 「정관평」이라 이름하시니, 이는 오직 대종사의 탁월하신 영도력과 9인 제자의 일심 합력으로써 영육 쌍전의 실지 표본을 보이시고, 새 회상 창립의 경제적 기초를 세우신 일대 작업이었다. 공사를 마친 후에도 조합원들의 노력과 고생은 쉬지 아니하였으니, 넉넉지 못한 힘으로 근근히 준공은 하였으나, 아직 굳어지지 않은 언(堰)의 뒷 일과 4·5년 간의 해독(海毒)으로 수 년간 작농에 손실을 보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여러 해를 두고 조합원 외에도 육신과 재력(財力)으로써 직접 간접으로 후원을 한 이가 적지 않았으니, 특별 후원자는 유 정천(劉正天)등 18인(별록1)이었다.

3. 첫 교당 건축과 공부 사업 병행

원기 3년(1918·戊午) 10월, 옥녀봉(玉女峰) 아래 도실(道室) 건축을 착수하여, 12월에 준공하니, 이것이 곧 새 회상의 첫 교당인 옥녀봉 구간 도실이다. 그 동안 조합원들이 모이는 장소가 일정치 못하여, 처음에는 이웃 마을 범현동(帆懸洞)의 재각(齋閣) 한 편을 빌려 썼고, 다음에는 강변 주점을 임시 방언 관리소로 정하였으나, 모두 비좁아 여러가지 행사에 불편이 많으므로, 이에, 비로소 도실을 건축한 것인 바, 조합원들이 한 편으로는 방언에 종사하고 한 편으로는 건축에 주력하여, 산에 올라 나무를 베고 땅을 녹여 흙을 이겨서, 풍설을 무릅쓰고 근근히 성조(成造)하였다. 대종사, 그 상량에 쓰시기를 「사원기일월 직춘추법려(梭圓機日月織春秋法呂)」라 하시고, 또 그 아래에 쓰시기를 「송수만목여춘립 계합천봉세우명(松收萬木餘春立 溪合千峰細雨鳴)」이라 하시었다.

첫 교당을 준공한 후, 대종사, 낮에는 방언 공사를 총감하시어 잠시도 쉬실 여유가 없고, 밤에는 또한 설법으로써 밤을 지내실 때가 많았다. 조합원들은 낮에 비록 그와 같이 힘겨운 노동을 하나, 밤마다 법설 듣는 재미가 진진하여 그 즐거운 마음과 활달한 태도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으며, 사업과 공부의 병진으로 지혜의 길도 점차 개척되어, 재래에 가졌던 허영의 마음이 차차 진실한 마음으로 전환되고, 미신의 생각이 차차 올바른 믿음으로 돌아 오며, 타력에만 의뢰하던 생각이 차차 자력을 찾게 되고, 공부의 정도도 또한 점점 진보되어, 정법 선포의 기연이 날로 가까와 졌다.

4. 구인 단원의 기도

원기 4년(1919·己未) 3월, 방언 공사를 마친 후, 대종사, 9인 단원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물질 문명은 그 세력이 날로 융성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은 날로 쇠약하여, 개인·가정·사회·국가가 모두 안정을 얻지 못하고, 창생의 도탄이 장차 한이 없게 될지니, 세상을 구할 뜻을 가진 우리로서 어찌 이를 범연히 생각하고 있으리요. 옛 성현들도 창생을 위하여 지성으로 천지에 기도 하여 천의(天意)를 감동시킨 일이 없지 않나니, 그대들도 이 때를 당하여, 전일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으로 모든 사람의 정신이 물질에 끌리지 아니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천지에 기도하여 천의에 감동이 있게 하여 볼지어다. 그대들의 마음은 곧 하늘의 마음이라, 마음이 한번 전일하여 조금도 사(私)가 없게 되면, 곧 천지로 더불어 그 덕을 합하여 모든 일이 다 그 마음을 따라 성공될 것이니, 그대들은 각자의 마음에 능히 천의를 감동시킬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각자의 몸에 또한 창생을 제도할 책임이 있음을 항상 명심하라」 하시니, 9인은 황송하고 기쁜 마음으로 일제히 지도하심을 청하였다.

이에, 3월 26일에 시작하여, 10일간 재계(齋戒)로써 매 삼륙일(每三六日)(6일·16일·26일)에 기도식을 거행하되, 치재(致齋) 방식은, 첫째 마음 정결을 위주하고, 계문(戒文)을 더욱 준수하며, 육신도 자주 목욕 재계하고, 기도 당일에는 오후 8시 안으로 일찌기 도실에 모여 대종사의 교시를 받은 후, 9시 경에 기도 장소로 출발하게 하였다. 기도는, 10시 부터 12시 정각 까지 하며, 기도를 마친 후 또한 일제히 도실에 돌아오되, 단원들이 각각 시계를 가져, 기도의 시작과 그침에 서로 시각이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장소는 각각 단원의 방위를 따라 정하되, 중앙봉으로 비롯하여 8방의 봉우리(峰巒)를 지정하고, 단기(團旗)인 팔괘기(八卦旗)를 기도 장소 주위에 세우게 하며, 기도식을 시작할 때에는 먼저 향촉과 청수를 진설하고 헌배와 심고를 올리며, 축문을 낭독한 다음 지정한 주문을 독송케 하였다.

5. 백지 혈인의 법인 성사

원기 4년(1919·己未) 7월 16일에, 대종사, 단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지금까지 기도해 온 정성은 심히 장한 바 있으나, 나의 증험하는 바로는 아직도 천의(天意)를 움직이는 데는 그 거리가 먼 듯하니, 이는 그대들의 마음 가운데 아직도 어떠한 사념(私念)이 남아 있는 연고라, 그대들이 사실로 인류 세계를 위한다고 할진대, 그대들의 몸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서 모든 창생이 도덕의 구원만 받는다면 조금도 여한 없이 그 일을 실행하겠는가」 하시니, 단원들이 일제히 「그러하겠읍니다」고 대답하였다.

대종사, 더욱 엄숙하신 어조로 「옛 말에 살신 성인이란 말도 있고, 또는 그를 실행하여 이적을 나툰 사람도 있었으니, 그대들이 만일 남음 없는 마음으로 대중을 위한다면 천지 신명이 어찌 그 정성에 감동치 아니하리요. 멀지 않은 장래에 대도 정법이 다시 세상에 출현되고 혼란한 인심이 점차 정돈되어 창생의 행복이 한 없을지니, 그리 된다면, 그대들은 곧 세상의 구주요, 그 음덕은 만세를 통하여 멸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런즉 그대들은 각자의 실정으로 대답해 보라」 하시니, 9인은 잠간 비장한 태도를 보이다가 곧 일제히 희생하기로 고백하였다. 대종사, 크게 칭찬하시며, 이에 10일간 치재를 더하게 하시어, 다음 기도일(7월26일)을 최후 희생일로 정하고, 그 날 기도 장소에 가서 일제히 자결 하기로 약속하였다.

7월 26일(음)에, 9인은 모두 만면(滿面)한 희색으로 시간 전에 일제히 도실에 모이는지라, 대종사, 찬탄함을 마지 아니하시었다. 밤 8시가 되매, 대종사, 청수를 도실 중앙에 진설케 하시고, 각자 가지고 온 단도를 청수상 위에 나열케 하신 후, 일제히 「사무여한」이라는 최후 증서를 써서 각각 백지장(白指章)을 찍어 상(床)위에 올리고, 결사(決死)의 뜻으로 엎드려 심고(伏地心告)하게 하시었다. 대종사, 증서를 살펴 보시니, 백지장들이 곧 혈인(血印)으로 변하였는지라, 이를 들어 단원들에게 보이시며 「이것은 그대들의 일심에서 나타난 증거라」 하시고, 곧 불살라 하늘에 고(燒火告天)하신 후 [바로 모든 행장을 차리어 기도 장소로 가라] 하시었다.

대종사, 한참 후에 돌연히 큰 소리로 「내가 한 말 더 부탁할 바가 있으니 속히 도실로 돌아오라」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마음은 천지 신명이 이미 감응하였고 음부 공사가 이제 판결이 났으니, 우리의 성공은 이로 부터 비롯하였다. 이제 그대들의 몸은 곧 시방 세계에 바친 몸이니, 앞으로 모든 일을 진행할 때에 비록 천신 만고와 함지 사지를 당할지라도 오직 오늘의 이 마음을 변하지 말고, 또는 가정 애착과 오욕의 경계를 당할 때에도 오직 오늘 일만 생각한다면 거기에 끌리지 아니할 것인즉, 그 끌림 없는 순일한 생각으로 공부와 사업에 오로지 힘쓰라」 하시었다. 9인은 대종사의 말씀을 듣고 여러 가지 이해는 얻었으나, 흥분된 정신이 쉽게 진정되지 아니하였다.

11시가 지난 뒤, 대종사, 다시 일제히 중앙봉에 올라가 기도를 마치고 오라 하신 후, 돌아 온 단원들에게 법호(法號)와 법명(法名)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전 날 이름은 곧 세속의 이름이요 개인의 사사 이름이었던 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세계 공명(世界公名)인 새 이름을 주어 다시 살리는 바이니, 삼가 받들어 가져서 많은 창생을 제도하라」 하시니, 이것이 거룩한 백지 혈인(白指血印)의 법인 성사(法認聖事)였다. 9인의 법호 법명은 일산 이 재철(一山李載喆)·이산 이 순순(二山李旬旬)·삼산 김 기천(三山金幾千)·사산 오 창건(四山吳昌建)·오산 박 세철(五山朴世喆)·육산 박 동국(六山朴東局)·칠산 유 건(七山劉巾)·팔산 김 광선(八山 金光旋)·정산 송 규(鼎山宋奎)였다.

그 후로도 단원의 기도는 여전히 계속하여 모든 절차에 조금도 해이함이 없더니, 그 해 10월, 대종사의 명에 의하여 드디어 해재(解齋)하였다. 이 9인 기도와 법인 성사는 곧 무아 봉공의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고, 신성·단결·공심을 더욱 굳게 한 새 회상 건설의 일대 정신 작업이었다.

제5장 교법(敎法)의 초안(草案)

1. 불법에 대한 선언

원기 4년(1919·己未) 10월 6일에, 대종사 「저축조합」의 이름을 고쳐 「불법연구회 기성조합(佛法硏究會 期成組合)」이라 하시고, 모든 기록에도 일제히 불법의 명호(名號)를 쓰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우리가 배울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요 후진을 가르칠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니, 그대들은 먼저 이 불법의 대의(大義)를 연구해서 그 진리를 깨치는 데에 노력하라. 내가 진작 이 불법의 진리를 알았으나, 그대들의 정도가 아직 그 진리 분석에 못 미치는 바가 있고, 또는 불교가 이 나라에서 여러 백 년 동안 천대를 받아 온 끝이라, 누구를 막론하고 불교의 명칭을 가진 데에는 존경하는 뜻이 적게 된지라, 열리지 못한 인심에 시대의 존경을 받지 못할까 하여 짐짓 법(法)의 사정 진위(邪正眞僞)를 막론하고 오직 인심의 정도를 따라 순서없는 교화로 한갓 발심 신앙에만 주력하여 왔거니와, 이제 그 근본적 진리를 발견하고 참다운 공부를 성취하여 일체 중생의 혜복 두 길을 인도하기로 하면 이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야 할 것이며, 불교는 장차 이 나라의 주교(主敎)가 될 것이요, 또한 세계적 주교가 될 것이니라.

그러나, 미래의 불법은 재래와 같은 제도의 불법이 아니라, 사 농 공 상을 여의지 아니하고, 또는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불법이 될 것이며, 부처를 숭배하는 것도 한갓 국한된 불상에만 귀의하지 않고 우주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로 알게 되므로, 일과 공부가 따로 있지 아니하고, 세상 일을 잘하면 그것이 곧 불법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요, 불법 공부를 잘 하면 세상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또는 불공하는 법도 불공할 처소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공하는 이의 일과 원을 따라 그 불공하는 처소와 부처가 있게 되나니, 이리 된다면 법당과 부처가 없는 곳이 없게 되며, 부처의 은혜가 화피초목(化被草木) 뇌급만방(賴及萬方)하여 상상하지 못할 이상의 불국토가 되리라.

그대들이여! 시대가 비록 천만 번 순환하나 이 같은 기회 만나기가 어렵거늘 그대들은 다행히 만났으며, 허다한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드물거늘 그대들은 다행히 이 기회를 알아서 처음 회상의 창립주가 되었나니, 그대들은 오늘에 있어서 아직 증명하지 못할 나의 말일지라도 허무하다 생각하지 말고 모든 지도에 의하여 차차 진행하면 멀지 않은 장래에 가히 그 실지를 보게 되리라」 하시었다.

2. 봉래산 법회와 일원상 구상

대종사, 일찍부터 새 회상 창립의 준비를 위한 휴양처를 물색하시어, 원기 4년(1919·己未) 3월에 오 창건을 데리시고 전라북도 부안 봉래산(全羅北道 扶安郡 蓬萊山 本名邊山) 월명암(月明庵)에서 10여일 유하신 후 돌아 오시고, 7월 말에는 다시 송 규를 보내시어 미래의 근거를 정하게 하시더니, 10월에 이르러 조합의 뒷일을 여러 사람에게 각각 부탁하시고, 몇 해 동안 수양하실 계획 아래 월명암에 행차 하시었다. 대종사, 서해연변을 돌아 월명암에 오시니, 오랫동안 고대하던 송 규는 환희 용약하였고 백 학명(白鶴鳴) 주지도 반가이 영접하였다. 대종사의 입산 동기는, 다년간 복잡하던 정신을 휴양하시며, 회상 창립의 교리 제도를 초안하시고, 사방 인연을 연락하여 회상 공개를 준비하시며, 험난한 시국에 중인의 지목을 피하시기 위함이었다.

한 편 대종사, 이 해(1919·己未) 8월에 휴양처를 물색차, 김제 금산사에 가시어 잠시 머무는 동안, 거처 하시던 별채 문미(門楣)에 일원상을 그리신 바 있었으니, 이는 장차 새 교법의 종지(宗旨)인 일원상을 그림으로 그려 보신 첫 구상의 표현이었다. 대종사, 월명암에 계실 제, 전주 김제 등지에서 송적벽(宋赤壁) 등(별록2)이 달려와 모시기를 원하는 지라, 그 해(원기4년·1919) 12월,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 옆 몇 간 초당에 거처를 정하시고, 몇 몇 제자(별록3)로 더불어 간고한 살림을 하시면서 심신의 휴양에 주력하시었다. 그러나, 새 해(원기5년·1920)부터 영광·김제·전주 등지의 신자들이 은연 중 서로 소식을 통하여 그 심산 궁곡에 찾아 오는 사람이 차차 많아지는 지라, 대종사, 그들의 정성에 감응하시어, 매양 흔연 영접하시며 조석으로 설법하시니, 당시의 법설 요지는 대개 관심 입정(觀心入定)과 견성 성불하는 방법이었다.

3. 교강 선포와 첫 교서 초안

원기 5년(1920·庚申) 4월에, 대종사, 봉래산에서 새 회상의 교강을 발표하시니, 곧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三綱領)·팔조목(八條目)이었다. 사은은,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으로서, 그 피은(被恩) 보은(報恩) 배은(背恩)을 말씀한 것이요, 사요는 그 후 누차 연마하여 완정하신 바, 남녀 권리동일 지우 차별(智愚差別) 무자녀자 타자녀교양(無子女者他子女敎養) 공도헌신자 이부사지(公道獻身者以父事之)니, 이는 인생의 마땅히 행할 바 도로서 세상을 구원할 요법이 되고, 삼강령은, 정신 수양 사리 연구 작업 취사니, 이는 곧 공부인의 마땅히 밟을 도로서, 부처님의 말씀하신 계·정·혜를 단련하여 생령을 제도하는 요법이 되며, 팔조목(八條目)은 신(信) 분(忿) 의(疑) 성(誠)과 불신(不信) 탐욕(貪慾) 나(懶) 우(愚)니, 신·분·의·성 사조(條)로는 진행건(進行件)을 삼고, 불신·탐욕·나·우 사조로는 사연건(捨捐件)을 삼아, 삼강령 공부를 운용하는 요법이 되는 바, 그 강령이 간명하고 교의가 원만하여, 모든 신자로 하여금 조금도 미혹과 편벽에 끌리지 아니하고, 바로 대도(大道)에 들게 하는 새 회상의 기본 교리이다.

이 때에, 대종사, 또한 밖으로 승려들과 교제하사, 재래 사원의 모든 법도를 일일히 청취하시고, 안으로 제자들로 더불어 새 회상의 첫 교서 초안에 분망하시니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과 「수양 연구 요론(修養硏究要論)」 등이 차례로 초안되었다. 「혁신론」은 재래의 불교를 시대에 맞도록 하여 대중 교화를 하자는 것이요, 「수양 연구 요론」은 전문 수양의 방법과 각 항 연구 조목을 지정하여 공부인으로 하여금 수양과 연구의 실지경(實地經)을 밟게 하자는 경전이니, 「수양 연구 요론」은 원기 12년(1927·丁卯) 5월에, 「혁신론」은 원기 20년(1935·乙亥) 4월에 발간하여, 각각 상당한 동안 새 회상 초기 교서의 일부로 사용하였다.

원기 6년(1921·辛酉) 7월에, 김 남천(金南天)·송 적벽 등의 발의(發議)로 실상 초당(實相草堂) 윗 편에 몇 간 초당의 건축을 착공하여 그 해 9월에 준공하고 이름을 「석두암(石頭庵)」이라 하니, 이것이 곧 「봉래정사」이다. 대종사, 봉래 정사에서 새로 초안된 교강과 교서로 여러 사람의 근기에 따라 예비 훈련을 시험해 보시니, 그 성적이 매우 좋아 모든 신자의 정법에 대한 이해가 한 층 진보하였다.

4. 창립 인연들의 결속

대종사, 봉래산에서, 각지 신자가 불어남을 보시고, 다시 조단 교화(組團敎化)를 시험하기 위하여, 원기 6년(1921·辛酉) 6월에 영광 지방에 남자 1단을 조직하시고, 8월에 영광·김제·전주 등지를 합하여 남자 1단, 여자 1단을 조직하시었으나, 그 후 정원이 고르지 못하고 통치가 귀일치 못하므로 후일을 기다려 다시 실행하기로 하고 종전대로 직접 교화를 시행하시었다. 대종사의 그 동안 교화하신 순서를 대략 말하자면, 대각 직후에는 어떠한 법을 인용하든지 오직 발심으로써 교화의 주체를 삼으시었고, 원기 2년(1917·丁巳)부터 4년(1919·己未)까지는 신성 단결 공심으로 교화의 주체를 삼으시었고, 원기 5년(1920·庚申) 새 교강 선포 후로는 교강으로써 교화의 주체를 삼으시었다.

대종사, 입산 후 수년을 경과하여, 장차 정식 회상 열만한 기연이 성숙함을 보시고, 하산의 시기를 기다리시었다. 원기 7년(1922·壬戌) 9월에는 송 규를 진안(鎭安) 지방에 보내시어, 만덕산(萬德山) 미륵사(彌勒寺)에서 최 도화(崔道華)를 만나게 하시고, 그 해 12월, 오 창건·송 도성(宋道性)을 데리시고 친히 가시어, 최 도화·전 삼삼(田三三)·전 음광(全飮光)·노 덕송옥(盧德頌玉) 등을 만나신 후, 이듬 해(원기8년·1923) 3월에 봉래산에 돌아 오시어, 5월에 김제 서 동풍(徐東風)·서 중안(徐中安) 형제를 만나시었다.

이 밖에도, 원평(院坪) 구 남수(具南守)·이 만갑(李萬甲)·장 정수(張正守)·장 적조(張寂照) 등과, 전주 문 정규(文正奎)· 박 호장(朴戶張), 이리(裡理) 박 원석(朴元石) 등 초창의 주요 인연들을 차례로 만나시었고, 원기 9년(1924·甲子) 2월에는 정읍 내장사에서 송 만경(宋萬京)을 만나시었으며, 이어, 최 도화의 안내로 서울에 가시어, 박 사시화(朴四時華) 형제와 성 성원(成聖願)·이 동진화(李東震華)·김 삼매화(金三昧華)를 만나시고, 그 후 이 공주(李共珠) 등을 차례로 만나시었다.

5. 회상 공개의 준비

원기 8년(1923·癸亥) 6월에 서 중안이 부인 정세월(鄭世月)과 함께 다시 봉래 정사에 와서 사뢰기를 「이 곳은 길이 험난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장소가 협착하오니 마땅히 교통과 장소가 편리한 곳을 택하여, 모든 사람의 앞길을 널리 열어 주심이 시대의 급무일까 하나이다」 하며, 대종사의 하산(下山)을 지성으로 간청하였다. 대종사, 그의 말에 응하사 장차 정식 회상 열 계획을 함께 의논하시더니, 때마침 영광으로 부터 모친의 병보가 온지라, 겨울에 만날 것을 약속하시고, 급거 본댁에 가시어, 7월에 모친 상사(喪事)를 당하시었다. 이 때에 각지 신자들이 문상 차 영광에 많이 모이니, 옥녀봉 도실은 너무 비좁아 대중을 수용하기가 심히 불편하고, 또는 기지가 비습(卑濕)하여 영원한 교당 위치로는 적당치 아니하므로, 이에 교당의 이축을 발론하시어, 드디어 범현동 기슭에 새 터를 정하고 목조 초가 10간(間) 1동(棟)과 8간(間) 2동(棟)의 건축을 10월에 마치니, 이것이 곧 영산원(靈山院)의 첫 건설이었다.

11월에, 대종사, 이리(朴元石집)를 거쳐 전주로 가시어, 박 호장·이 청춘(李靑春) 등이 주선한 10여간(餘間)의 집을 임시 출장소로 정하시고, 회상 공개에 관한 취지 규약의 작성 인쇄와 제반 준비를 서 중안에게 일임하신 후 봉래산에 돌아 오시었다. 대종사, 그 동안의 취지와 경과를 백 학명 주지에게 말씀하시니, 그가 크게 동감하여, 자신의 새 임지인 내장사의 일부를 빌려 드릴 터인즉 거기에서 취지를 실현해 보시라고 제의하였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찰은 공유라, 어찌 한 두 사람의 생각대로 되리요마는, 될 수만 있다면 미래 불교계에 많은 서광(瑞光)이 될 것이라」 하시고, 우선 송 규 등 5인(별록4)을 내장사로 보내시었다.

원기 9년(1924·甲子) 2월에, 대종사, 이리 김제를 거쳐 내장사에 이르시니, 전 날의 의논은 승려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백 학명 주지는 크게 미안히 여기는지라, 대종사 여러 모로 그를 위안하신 후, 몇 몇 제자들을 데리고 서울에 가시어 서 중안이 주선한 집(唐珠洞)에 임시 출장소를 정하시고, 한 달 동안 머무시며 여러 인연들(본장4절 기술)을 얻으시었다.